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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28. 2023

연민과 사랑 사이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추천해 줄 책, 없어요?"

"책은 누가 추천해 준다고 읽는 게 아냐"

"..."

"너도 너에게 필요한 책을 찾을 수 있을 거야"


           -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중에서 -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중에서

서점의 책 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 내가 만날 책은 우연이고 인연이 되고 또 운명이 된다. 그냥 스치듯 읽어 내려가는 우연도 있고 읽으며 감동과 눈물을 선사하는 인연도 있으며 읽고 난 뒤 가시질 않은 여운과 잊히질 않는 깨달음을 주는 운명도 있다.


당신은 그런 책이 있는가? 나는 이제 이 세 가지 종류의 책을 모두 만난 듯하다.  뭐 앞으로 또 다른 우연과 인연과 운명이 다가올 것이다. 나는 계속 찾고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기대되는 것이다. 나는 그 책이 무엇인지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당신이 읽을 우연과 인연 그리고 운명의 책은 나와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우연과 인연 그리고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연 혹은 인연만 만나고 운명을 만나지 못함이다. 아니면 운명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밤이 깊은 시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비가 내리고 있다.  6년 전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그때도 이곳에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비가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빗 속을 헤치고 공항 밖으로 나갔다. 그때는 이곳이 목적지였고 지금은 경유지이다. 활주로에는 목적지로 향할 비행기가 홀로 비바람을 맞으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나는 또 다른 비행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탑승까지 적잖은 시간이 남았다. 과거에는 여행 중에 이런 하릴없는 시간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젠 이런 기다림의 시간을 즐긴다. 기다림이 여유가 되었다. 시간은 뉘앙스가 없다. 그저 우리가 그 뉘앙스를 만들 뿐이다.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몸이 피로하면 텍스트가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뇌가 게을러진다.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한다. 확실히 영상은 텍스트보다 주의 집중을 덜 요한다. 뇌가 생각을 덜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 장면들이 멈춰있던 생각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恋は雨上がりのように, Love is Like after the Rain.] 동명의 만화를 영화로 만들었다. 하필 영화는 내가 감정이입을 하기에 아주 적절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우연이 만난 영화가 마치 인연을 만난 듯한 느낌이랄까? 영화 속으로 빠져든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곤도 마사미, 중년의 돌싱 레스토랑 점장이자 소설가를 꿈꾸는 중년, 글을 쓰며 자유를 꿈꾼다. 꿈 속에선 자유롭지만 꿈 때문에 현실이 애처로워 보이는 인물이다. 뒤늦게 찾아든 꿈은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지만 또한 삶을 힘겹게 만드는 방해꾼이기도 하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현실은 그를 가만히 놔주질 않는다. 이상을 좇아야 하지만 현실에 발이 묶여있다. 그럼 이상도 현실도 모두 요원해진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중에서

"가족 팽개치고 작가를 꿈꾼 게 이 꼴이야"


                                         -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중에서 -


영화 그의 친한 지인의 소설이 베스트셀러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친구를 지켜보며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지만 그의 앞에서 자존심을 꺾이고 싶지 않다. 그와 술잔을 부딪치며 얄미운 우상이 되어버린 자에게 푸념들을 늘어놓아 보지만 푸념은 아무것도 바꿔놓질 못한다. 꿈이 현실의 많은 것들을 앗아갔기에 더욱 그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건 체념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심리일까. 아니면 지나온 시간이 가져다준 오기일까? 그런 잡념들이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글은 더욱더 자신과 멀어져만 간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중에서

"난 어쩐지 소설이랑 계속 짝사랑 중이다"


    - 영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중에서 -


그러다 찾아든 인연.... 타치바나 아키라, 달리는 소녀, 달릴 때만 자유를 꿈꾸는 소녀이다. 이제 달리지 못한다. 그래서 자유를 잃어버렸다. 꿈을 잃어버린 자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용기일까 아님 위로 일까? 둘 다 아니다. 영화는 말한다. 꿈을 잃어버린 자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이라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서 느끼는 연민이 필요하다. 연민은 슬픈 공감이다. 그런데 하필 그게 아저씨다. 그것도 애 딸린 주름살 가득하고 흰머리와 검은 머리의 비율이 비슷해지려는, 게다가 몸 곳곳에는 담배냄새까지 깊이 배어있는... 그런 중년의 아저씨에게서 그런 연민을 느낀다. 신기하지만 이런 연민이 그 모든 다른 외적인 요소들을 가려버릴 만큼 강력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왜냐 아직 미움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슬픔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것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건 아마 눈물이 사랑과 더 어울리기 때문일까. 그래서 연민은 때론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기도 한다. 연민은 서로에게 힘이 되지만 반드시 함께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미움도 품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연민의 힘은 서로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연민도 사랑의 다른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지만 아마도 아직은 불완전한 사랑이 아닐까.


꿈에서 멀어져 가는 두 남녀는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 남자는 여자를 투영해 자신을 보고 여자는 남자를 투영해 자신을 바라본다. 그렇게 서로는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매일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지만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건 내 모습(형상)이 나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가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나를 지워야 하고 나를 없애야 내 안에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지만 우리는 자신의 모습에 덮여 그것을 끄집어내지 못한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상이 필요하다. 타인이 필요한 것이고 다른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남자는 책 속에서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고 여자는 새로운 이색적인 무언가로부터 그것을 찾길 바랐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서 그것을 찾아간다. 남자가 먼저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고 여자는 이색적인 관심에 서슴없이 100m 달리기를 하듯 그에게 다가간다. 현실의 제약과 주변의 시선이 그들의 관심을 방해한다. 하지만 끌림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서로는 점차 서로를 들여다보며 자신 안에 감춰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중에서

우리는 비가 내리면 우산을 씌워줄 사람이 필요하지만 우산이 없다면 같이 비를 맞아주는 사람에게서 더 큰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우산을 씌워주는 것은 동정이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은 연민이다.


우리와 다른 더 나은 환경과 더 나은 능력을 가진 자를 바라보며 변화하고 성장해 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며 키우는 것은 시기와 질투 혹은 경쟁심일 경우가 더 많다. 누군가를 나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느끼면 결국 내가 작아지고 비참해질 뿐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반감을 드러낼 뿐이다. 삶이 나아질 리 없다.


하지만 우리는 나와 비슷한 힘든 환경 속에 놓인 자들을 바라볼 때 내가 더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모르고 살아간다. 이것을 깨달으면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던 사람에게서까지 연민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젠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달라지게 된다. 모두가 저마다의 힘듦을 짊어지고 살아감을 알게 된다. 서로가 비록 모습과 환경은 다를지라고 그 속에서 느끼는 비슷한 감정과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에게서 우리는 삶의 동력을 얻는다. 동질감이다. 나와 비슷한 존재, 나의 존재의 이유를 알려주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살아갈 이유를 아는 자는 삶을 허비하지 않는 법이다. 변화한다.

변화 -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중에서

남녀는 그렇게 서로에게 변화를 이끌어 낸다. 서로의 삶이 변해간다. 삶이 멈춰있을 땐 꿈도 멈춰 있었다. 삶의 변화가 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남자는 자신을 버리고 다시 글을 쓰고 여자는 한계를 극복하며 다시 달린다.


연민과 사랑 사이에서 우리는 변화한다.



 영상오디오 - 릴스

https://www.instagram.com/reel/C1fVff1y3C_/?igsh=OWR5a250YTVkZm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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