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시작하고 배우와 스탭 이름이 소개되는 중에 "극본 김은희"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글을 쓰는 취미를 가진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극본을 누가 썼는지에 제일 관심이 많다. 요즘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능력이 부각된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의 미묘하고 환상적인 조합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 그것이 부럽다.
킹덤 [아신전]
옛날 이야기
어린 시절 명절이면 시골집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귀신 이야기가 기억난다. 학교 선생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데 할머니의 이야기는 왜 그리 기억에 오래 남는지 할머니가 들려준 여러 귀신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이다. 내용이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생생한 할머니의 상황 묘사와 성대모사까지 섞인 말투가 나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때 들려준 할머니의 귀신 이야기 때문에 어린 시절 칠흑 같은 시골의 밤이 공포의 시간으로 변해버렸다. 뒷간 아래에 산다는 귀신 때문에 밤에 할머니의 옷자락을 잡고 뒷간에 갔던 기억 그리고 연못에 사는 물귀신이 밤에 소를 잡아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다는 이야기에 아침이 되면 외양간에 소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할머니의 그 이야기보따리는 어디서 온 걸까? 아마 할머니 또한 전해 들은 이야기에 본인의 경험이나 상상이 덧붙여진 것일 것이다. 내가 할머니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나를 잘 알았던 것이다. 그냥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을 듣는 사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구조화하여 맞춤형 이야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잘 만든다는 건 듣고 읽는 사람들 즉 대중을 잘 이해한다는 말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쓰는 사람이 소설가와 극작가로서 인정받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야기는 작가에서 시작해서 독자에서 끝나는 것이다. 특히 직업으로서의 작가는 더욱 그러하다.
누구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만...
내가 쓰는 이야기도 아직까지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많다. 이야기가 제한적이고 진부하다. 물론 아직은 독자의 공감과 이해를 끌어내는 글쓰기라기 보단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글쓰기 수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책을 많이 읽으려는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책에서 얻어내는 영감과 상상으로 좀 더 공감 가는 이야기를 쓰고픈 나의 소망이 책을 읽게 만든다. 인풋이 없이는 아웃풋이 없다는 걸 알기에 독서를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다만 어려서부터 책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나였기에 뒤늦은 독서는 독서량의 한계가 부딪친다. 인풋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책이 아닌 경험과 다른 매체를 통해 얻은 것들도 이야기의 소재나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소재와 영감을 찾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한다. 떠오른 소재와 영감을 이야기로 풀어내려면 복합적이고 다양한 인풋이 쌓여있어야 한다. 그 인풋은 머릿속 무의식의 세계에서 잠자고 있다가 키보드 자판에서 손가락을 통해 빠져나온다. 인풋의 양이 부족하다면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책을 읽고 난 후 되도록 빨리 서평이나 독후감을 적는 것은 인풋 된 내용이 생생하기에 글을 써 내려감에 거침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손가락이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험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손가락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속기법은 이럴 때를 위해 연습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독자가 아닌 작가로서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 없이 보기보단 작가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된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어떻게 저렇게 연결시켰을까 하며 작가의 상상력과 구조화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킹덤은 사극이기에 역사적 배경지식과 과거 인물에 대한 시각과 주변 지리적 조건 등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해서 극본을 써야 하기에 작가의 상상력뿐만 아니라 배경지식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아마 여러 가지 사료나 각종 자료들을 많이 찾아보면서 글을 썼으리라 생각된다.
나 또한 소설이나 칼럼을 쓸 때는 자료검색을 많이 하는 편이다. 지식이 부족하면 검색에 소요되는 시간이 많아져 글을 쓰는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글을 쓰다 떠오른 소재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 그것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다가 결국 글을 흐름이 끊겨버려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을 포기한 적도 여러 번 있다. 자료 검색은 5분 안에 빨리 끝내고 글을 이어가야 한다. 일단 초고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 편의 완성된 초고를 나중에 다시 꼽씹으려 수정 보완을 하면 되는 것이다. 초고부터 완벽함을 추구하다가는 미완성으로 버려지는 경우가 생긴다.
넓고 얕은 지식
작가는 다양한 영역의 넓고 얕은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지식이 바로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인문교양이라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인문교양 위에 여러 가지 상상과 경험 그리고 다른 전문영역들이 얹혀서 다양한 색깔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려서 많은 책을 읽고 잡다하고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만드는데 더 유리하다. 그 과정이 바로 교양이라는 이야기의 토대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글, 예를 들면 경영, 과학, 의학, 법률 등과 관련된 글은 얘기가 다르다. 전문영역의 글은 이야기라기 보단 지식 요약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은 소설이나 시나리오 작가 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한 분야를 깊이 있게 파는 자들이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골고루 잡다한 교양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락다운 기간 정주행 한 [응답하라 1988]에서 바둑 천재 "최택" 인물을 보면 그것을 실감한다. 바둑밖에 몰랐기에 다른 친구들이 겪는 다양한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다. 신발끈 묶는 것조차도 혼자서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추앙한다. 그런 자들에게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탄생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공감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생명력이 없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야기가 가장 최상이겠지만 쉽지 않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이나 어린 왕자 같은 책이 아닐까? 요즘은 그런 책을 바라지 않는다. 소수이더라도 이야기가 진정성과 시사 통찰 그리고 해학이 섞여 있으면 된다. 내가 무지한 영역이라도 그 이야기를 봄으로서 그 영역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한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것도 없다. 그렇게 서로가 공감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부활
코로나로 인한 언텍트 시대에 혼자 있는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해주는 일 중의 하나가 글쓰기가 아닐까? 실업이 증가하고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그 시간에 조금씩 적응하며 다른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찾게 된다. 인간은 무료함에 갇혀서만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옛날 수렵생활을 하던 사피엔스들이 무료하고 기나긴 밤 동굴에 벽화를 그린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표현하고 싶어 한다. 인스타와 틱톡 등 여러 SNS에는 자신을 표현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무언가를 생각하고 창조해 낸다.
요즘 네이버 웹툰이나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웹소설 등의 콘텐츠 IP (Intellectual Property) 시장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판데믹 이후 이 시장은 급격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지금 다양한 어중이떠중이들이 만든 독특하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고 인기 있는 이야기 원작(웹툰, 웹소설)은 2,3차 영상 콘텐츠로 제작되고 다양한 영상 플랫폼(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유튜브 등)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인터넷 국경이 사라진 요즘은 가능성 있는 원작은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진다. 말 그대로 대박이 터질 수 있는 시대이다. 킹덤 시리즈나 BTS가 좋은 사례이다.
웹소설과 소설(순수문학)의 명확한 구분이나 경계는 없지만 내 나름 찾아보고 찾아낸 가장 큰 차이점은 웹소설은 재미가 우선이고 소설은 통찰이 우선 아닌가 생각해 본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시대의 우울함을 반영하듯 안 그래도 우울한 팬데믹과 저성장의 시대에 굳이 복잡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찾아가며 통찰을 얻기보다 좀 더 빨리 유쾌하고 신선한 재미를 얻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긴 템포가 이어지며 나중에 아련하고 깊은 공감과 통찰보다는 짧은 템포의 재미와 공감이 곳곳에서 뛰어나와야 대중이 이야기를 따라오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둘 다 공감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공통점은 존재한다.
나도 최근 웹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락다운의 답답한 시간 작은 방안을 탈출해 드넓은 상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 팬데믹을 견디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웹소설과 소설의 구분이 애매하기 하지만 이야기를 쓴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기존에 쓰던 소설의 틀을 깨뜨리고 막 써보자는 생각이다.
과거 중세에서 근세로 이어지는 교두보의 역할을 했던 르네상스 시대는 다양한 생각과 가치가 기존의 틀을 깨뜨리면서 탄생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지금의 판데믹은 또 다른 르네상스 시기로 기억될지 모른다. 과거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던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