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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08. 2021

내 모습 이대로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최진석

"도(道) 아십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일 것이다. 듣는 순간 별고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어쩌다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굳혀졌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길거리에서 도를 알려주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오히려 도와 멀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道)와 인(仁)


   우리가 생각하기에 노자의 도가 사상을 떠올리면 마치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는 삶을 떠올리곤 한다. 그건 노자의 도가 사상이 자연의 이치에 입각하여 인간 세상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공자의 유가 사상은 인(仁 : 남을 사랑하고 어질게 행동하는 일) 바탕으로 철저히 인간 내면과 본위의 입장에서 인간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그렇기에 공자의 유가 사상은 과거에서부터 국가와 사회를 운용하는 중요한 사상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온 것이다.


"유가는 채워서 높이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했고, 도가는 비워서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중에서 -


  인덕(德)을 쌓는 길과 무위(爲)를 실천하는 길로 두 사상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공자는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개념화하는데 집중한다. 그 말은 규칙과 질서와 체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국가와 사회가 구성되고 그 구성원을 교육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아주 적합한 사상이다. 반면 노자는 모든 세상의 자연의 이치인 관계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 말은 본질이란 결국 인간과 세상을 한정 짓는 것이고 세상 모든 만물은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공동의 이상향이 아닌 개별의 관계성에 집중했다.


   당신은 어디에 더 마음이 끌리는가? 공자와 노자는 중국의 철학을 대표하는 가장 큰 두 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으로 치면 소크라테스(+플라톤)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후자에  관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현재의 세상도 갈수록 과거 전자에서 지금은 후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랜 세월 본질과 개념화에 집중한 인간이 현재 맞닥뜨린 한계는 이제 후자의 관계성 속에서 찾아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비단 인간사뿐만이 아니라 과학분야에서도 비슷한 성향을 드러낸다. 과거 절대적인 과학 논리를 추구하던 과학계도 이제는 양자역학이라는 관계성으로 밖에는 설명하기 힘든 논리를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모처럼 주말 연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책을 읽었다. 과거 철학 관련 책들을 여럿 읽었지만 이번처럼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도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은 그 동안 희미한 안갯속에 휩싸여 있던 나의 생각에 한 줄기 빛을 내려준 것 같은 느낌이다.  노자의 세계를 간단히 내 생각과 버무려 보려 한다.

해품달

해품달


  해품달(해를 품은 달)을 기억하는 가? 대부분 드라마 제목을 떠올릴 것이다. 구글이나 네이버에 이것을 검색하면 바로 뜨는 것이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만큼 드라마가 큰 인기몰이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쉽지만 난 그 드라마를 보지 못했기에 드라마 얘기를 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추측 건데 드라마 속에는 남자가 여자를 품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마치 해를 품을 달처럼 말이다. 해는 양을 뜻하고 달은 음을 뜻한다. 양은 남자를 의미하며 음은 여자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유추될 수 있는 것이다.   


“知仁者智 自知者明”

(타인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 노자의 [도덕경] 33장 -

                                                          

  방금 얘기했던 해품달은 노자의 사상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해를 품은 달의 형상은 명()이다. 이건 노자가 강조하는 관계를 설명한다. 해가 있기에 달이 존재가 의미를 가진다. 그건 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있는 건 너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가 있기에 남자가 되는 것이고 여자도 남자가 있어 여자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건 공자가 추구하는 사물과 인간의 본질을 파고드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본질은 한계를 짓지만 관계는 한계를 짓지 않는다.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열려있다.


  공자는 말 그대로 지혜로운 사람을 추구하고 노자는 명철한 사람을 추구한 것이다. 지혜의 지(智)는 알지(知) 자 아래에 해(日)가 있는 형상이다. 해만 아는 것이다. 명(明)은 해(日)와 달(月)이 같이 있는 형상을 의미한다. 공자는 해의 본질을 파고드는 것이고 노자는 해와 달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 -


   여기서 또다시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세상의 이치를 알려고 배우고 또 배우는 우리는 어떤가? 그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경험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쫓는 자들은 지혜로워져서 세상과 사람들의 우러러봄을 얻을지언정 진정한 자신을 볼 수 있는 명철함과는 계속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어릴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얼핏 듣기에 사투리 같지만 표준어이다. "그것이면 그것이고 아니면 아니다"라는 말의 준말이다. 내가 갑자기 왜 이 말을 하냐고 할 것이다. 이 말이 한국인의 습성을 아주 잘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정쩡한 상태를 아주 싫어한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남북과 동서가 나뉘고 남녀 또한 갈라져 있는 형국이다. 색깔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민족성이 드러난다. 어중간하게 경계에 선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중도가 한국에서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자의 사상을 아주 반대로 실천하는 형국이다.


  분열과 혐오 그리고 양극화는 결국 이런 한국의 흑백논리가 만들어 낸 결과물임을 모르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노자의 관계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편이 아닌 다른 편을 죽이자고 달려든다. 죽이면 어떻게 되는가? 자신의 의미도 사라진다는 것을 모른다. 여태껏 으르렁대었던 것도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고 상대가 있어 자신의 존재가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관계가 없어지고 혼자(본질)만 남아버리면 좋은가? 아닐 것이다. 그 안에서 또 다른 분열이 일어나거나 스스로가 소멸할 가능성이 크다. 혼자로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모호함을 분명함이나 명료함으로 개선하려는 순간 세계의 실상과 멀어지게 됩니다. 이 모호함은 명료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품어버려야 할 것이지요"


                  -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중에서 -


  안타깝지만 인간세상은 모호함을 없애가면서 발전해간다. 법과 질서는 문서화 체계화를 통해 모호하고 애매한 상황들을 명료하게 규명하려 하고 과학과 기술은 모호함을 증명하며 기호화 공식화시킴으로써 발전해 간다. 그래서일까 세상이 발전하면 인간은 피폐해진다.


유무 상생(有無相生)의 원칙


   노자의 핵심 사상이다. 있음은 없음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있는 것만 본다. 없는 것의 소중함을 모른다. 하지만 없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건 부처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너와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오래 존족할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이 존재함은 모두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아무것도 이루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다. 인간은 지식과 욕망을 통해 무언가를 계속 이루려 하지만 사실 그 과정 속에 자신을 잃어가고 세상을 피폐하게 만든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이루려 하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해 준다는 말이다. 참 어렵다.


  간단히 예를 들면 부모가 이루고자 함을 자식에게 반영함으로써 자식과 부모 간의 갈등이 빚어진다. 이것의 밑바탕에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한 것이다. 믿음이 없기에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그냥 자식을 그대로 믿고 사랑하고 기다려주는 것만 하면 된다. 자녀를 내 것으로 만들지 말고 자녀가 자신이 되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할미꽃이 싫다고 할미꽃을 장미로 만들 순 없다. 세상은 할미꽃도 있고 장미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내 모습 이대로


♩♬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시네

연약한 그대로 사랑하시네

나의 모든 발걸음 주가 아시나니

날 인도하소서 ♪♫


  내가 좋아하는 찬양이 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은 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사랑하신다고 한다. 인위적인 세상의 무언가를 쫓는 자가 되지 말고 나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만물이 나아가야 할 방향인 것이다.


당신은 당신 모습 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하는힘 노자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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