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다면 다음 생애 남자로 태어나고 싶으세요? 한국에서요"
"아뇨, 남자로 태어나고 싶진 않아요, 한국에서는"
이 질문은 내가 과거 어느 여성에게 했던 질문이다. 한 명이 아니었다. 시점은 조금씩 달랐지만 여러 명의 여성에게 물었다. 재미 삼아 소개팅에서 물어본 질문이었다. 답변 방식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결론은 모두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제목은 미끼?!
혹여 제목만 보고 흥분하시는 여성분이 있다면 글을 끝까지 읽어보길 당부드린다.
제목이 분란의 요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요즘은 제목에서 눈길을 끌지 못하면 끝이다. 적잖은 시간 글을 써오면서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제목에서 독자를 사로잡지 못하면 내 글은 사장된다는 사실이다. 넘쳐나는 콘텐츠 홍수 속에 떠내려가는 물건 중에 안에 뭐가 있는지는 볼 여유가 없다. 일단 껍데기가 눈에 띄어야 건져라도 볼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제목에 미끼를 좀 끼웠다는 점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브런치에 오랜 시간 글을 올리며 든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 글이 구독자가 적고 노출이 잘 안 되는 건 이런 나의 민감하고 분란의 소지가 있는 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많은 구독자와 좋아요가 달린 실용적인 혹은 감수성 짙은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볼 때면 조금 부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따라 할 수 없다. 나는 나의 글을 써야 한다. 개인적으로 비판적인 글을 좋아한다. 그런 성향이 내 소설에도 많이 반영되는 것이 사실이다.
오래간만에 심리학 책을 읽었다. 책은 카를 융의 정신분석학을 근거로 쓰인 책이다. 저자 제임스 홀리스는 융 심리학의 대가로 예전에 [내가 누군지도 모른 체 마흔이 되었다](서평 참조)를 통해 그의 심리학의 세계를 경험했다. 이해하기 쉬운 해석과 설명 그리고 깊은 공감과 놀라움을 가져다주는 그의 문체는 딱 내 취향인 듯하다. 이번에 읽은 [남자로 산다는 것] 또한 나의 기대에 십분 부응했다. 독서를 계속 이어가다 보면 나랑 맞는 성향의 작가들을 찾아가는 것 같다. 그 작가들의 책은 결코 후회나 실망을 남기지 않는다. 이 책은 남자의 삶에 대해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 알려주고 가슴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던 무의식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한다.
남자로 산다는 것
나의 경험에 빗대어 서두에서 언급했던 여성들이 한국의 여성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으로부터 동일한 답변을 들었기에 왜 그럴까에 대한 궁금증이 오랜 시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 대세인 시대이다. 남아선호 사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남자들도 같은 남성인 아들을 원치 않는 시대이다. 어쩌다 세상은 남성을 이렇게도 홀대하게 되었을까? 여자들도 원치 않는 한국 남자들의 삶을 드려다 보려 한다.
나도 사실 다음 생애 태어난다면 꼭 한 번 여자로 태어나보고 싶다. 왜냐고 궁금하니까. 여성의 삶이... 이런 나의 말에 다른 남자들은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 거부 반응의 근본 밑바닥에는 그들이 육체적인 혹은 성적인 역할과 변화에만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지배하고 있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거부감이 밀려오는 것 당연하다. 여성은 그토록 양성평등을 외치면서 남성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일까? 아이러니하다.
젠더 갈등의 원인
젠더갈등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녀가 서로의 살아온 과정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현재의 정치와 언론 및 영상매체 등의 역할 또한 무시 못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서로에 대한 피해의식이다.
현대 사회는 여성의 사회적 권리와 참여가 신장되면서 남성은 기존의 자리를 여성들에게 조금씩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것이 뭇 남성들에게는 생존 경쟁에 여성까지 참여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동성뿐만 아니라 이성까지 이겨야 하는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이건 과거 아버지가 살아왔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형국인 것이다. 과거 남성들의 완력은 기계화와 자동화로 대체되고 더 이상 그들만의 독보적인 영역은 사라졌다. 여성들의 교육기회가 늘어나고 사회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도태되는 남성이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회적 인력 수요는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늘어가니 경쟁은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 자주 듣던 '안사람'(아내, 여성), '바깥사람'(남편, 남성)으로 대변되던 기혼 남녀의 호칭은 이제 과거의 유물로 변해갈 듯 보인다.
여성은 과거 어머니의 삶에서 벗어나려 하고 남성은 과거 아버지의 삶을 답습하려는 과정 속에서 남녀의 갈등이 시작된다. 걔 중에는 과거 어머니의 삶은 답습하는 여성도 있고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벗어나려는 남성도 있지만 유년기 때 보고 배운 동성 부모의 행동 패턴은 무의식의 세계에 굳건히 자리 잡고 성인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발현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마초이즘(Machoism : 남성성에 극도로 집착하는 형태)은 남성이 지닌 공포에 비례해 커지며, 공포에 질린 남성들이 뭉치면 폭력을 낳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자신들 속의 여성성이 지닌 위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 [남자로 산다는 것] 중에서 -
하이힐 과거에 봤던 [하이힐 2014]이라는 영화를 기억한다. 장진 감독이 직접 동성애자들을 취재해 가며 영화의 시나리오를 짰다고 한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당시 나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그 영화는 한참 시간이 지나고 지금에 와서 느끼는 감흥은 남다른다. 영화는 동성애를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는 강한 남성성이 자신 안에 감춰진 여성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어찌 보면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 여성 앞에 강해지고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여성이 아닌 그것을 잘 아는 다른 남성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해가 동성애로 향하는 것은 아닐까? 여성이 이해할 수 없는 남성 안에 여성성은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서 발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정적인 남자? 여성적인 남자?
요즘은 남자의 대세는 단연 가정적인 남자일 것이다. 육아와 가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남성이 이 시대의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남편이자 가장의 모습일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동의하는 바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예능프로그램을 알 것이다. 육아와 가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정적인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은 많은 이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특히 많은 여성분들의 극찬과 인기를 한 몸에 받은 프로그램이었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2013년에 시작한 프로그램이 아직까지도 방영되고 있으니 횟수로 벌써 9년이 넘는 장수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적지 않은 남성들을 바람직한 남편과 아버지로의 변화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여성들이 전담하던 육아를 남성과 같이 나눠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남자는 슈퍼맨이 아니다
웃긴건 그 예능 프로그램이 9년이라는 긴 시간 방영되는 동안 아이는 계속 줄어들기만 했고 가정(결혼)은 만들어지기보다 깨지는 일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프로그램의 취지와는 다른 사회현상에 프로그램 담당자들과 관계 당국도 의아했을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이 가족과 아이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더 많은 남녀가 이와 같이 가정을 꾸리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우리나라 방송국은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식보다는 시청률을 이끌어내는 인식밖에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인간이 안타까운 현실에 몸담고 있기에 안타깝지 않은 비현실을 꿈꾸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TV나 콘텐츠는 그런 비현실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긴 하지만 현실을 바로 보는 시각과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사라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무언가를 같이 해본 기억이 없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일하고 돈을 벌어서 가정경제를 이끌어가는 존재였지 나와 동생의 커뮤니케이션 혹은 교감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건 비단 나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베이비 붐 세대 부모로부터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라면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왜 우리는 좀 더 가깝게 지내지 못했던 건가요?" 삶이 48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 [남자로 산다는 것] 중에서 -
사실 우리는 지금 사회와 여성이 요구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아버지로부터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이 없기에 익숙하지 않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사회는 그것이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어느 순간 마치 뚝딱 변해야 하는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교과서만 보고 공부하라고 해놓고서는 세상은 교과서와 다르게 돌아가게 만들어 놓은 것과 같다. 부모(아버지)라는 교과서를 보고 성장해 왔지만 부모가 살아온 것과는 다르게 살아라고 강요한다.
혼란에 빠진 남성들
사회는 지금의 인구절벽(노령화와 출산 감소) 현상을 청년들의 직업적, 경제적 궁핍함에만 국한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아주 복합적인 문제이다. 매년 돈으로 쏟아붓는 제도와 정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지금의 청년세대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봐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어쩌겠니 너희들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걸"
전체 베이비 붐 세대(1955년~1974년)는 현재 한국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할 정도(1758만 명)로 그 비중이 크다. 그중에서도 전반기 속하는 베이비붐 세대(1955년~1969년)만 해도 인구의 1/4이다.
이 세대들은 급격한 산업화 시대에 태어나 불철주야 산업현장의 주요 노동자로 살아오신 분들이다. 이 시대의 아버지는 항상 산업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나라 경제를 일으키고 가정경제를 받치며 살아온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만약 당시 가정 커뮤니케이션(소통)을 책임지며 살았다면 뭇 남성들의 지탄을 받으며 왕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자녀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잘했던 아버지들도 없진 않았겠지만 지금과 같진 않았음을 부인할 자는 없을 것이다.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절이었다. 당시 아들들에게 절실했던 아버지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지나가 버렸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이젠 한국에 돌아가면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안아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제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가족을 부양하며 딸아이의 육아와 아내의 가사를 도우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한 동생의 말이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 마음을 가지게 만든다. 그도 나와 다르지 않은 유년기(아버지와의 교감이 없는)를 보냈고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일구고 나서 그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이제는 과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 모양이다. 그는 항상 고민한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일하는 시간과 가족과 교감하는 시간의 밸런스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 지에 대해서 말이다. 비자 없이(영주권) 타향 만 리 호주에서 비자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자녀까지 양육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와중에서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금이 아니면 돌이킬 수 없잖아요"
아이와 놀아주고 함께하는 시간은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추억을 통해 쌓아가는 부모와 자녀와의 유대감은 유년기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 사실 어찌 보면 그 동생이 그의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더 많이 벌지 못해도 더 많은 추억을 남겨준 아버지가 자녀에게는 더 위대한 아버지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하지 못한 것 당신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자신 스스로가 지금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부담스러운 의무
지금의 청년세대 남성들은 아마도 큰 딜레마에 빠져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청년 남성들이 분노하는 이유 또한 이런 남성들을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 국가와 사회에 그리고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들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그들은 아들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으면서 지금에 와서 이들에게 자신들은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하며 강요하며 그것이 마치 남자로 태어나 해야 할 당연한 의무처럼 만들어 버렸다.
저성장의 불안정한 사회 현실 속에서 내 몸 하나 추르려 둘 곳 없는 현실에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며 사회의 가혹함과 가족 부양의 고단함을 모두 떠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사회에 대한 서운함이 쌓여온 것인지도 모른다. 남성으로 살아가는 자부심과 권리는 점점 사라져 가는 가운데 남자로서의 의무와 책임만 가중된다. 남성이 결혼과 출산이 기피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삶은 이제 그만
그럼 그 시대 어머니를 보고 자란 밀레니얼 세대 여성들은 어머니의 삶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그건 이미 많은 드라마 혹은 소설 등의 매체를 통해 알려져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은 과거 어머니 세대를 보고 자라난 밀레니얼 세대 여성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한국의 남녀 성역할에 대한 적지 않은 분쟁을 불러왔다.
82년생 김지영 근래에 여성해방운동, 양성평등, 미투 운동 등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많이 변해왔다. 그만큼 사회가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는데 얼마나 많은 활동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도 개선되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관심과 정책이 너무 한쪽으로 집중된 나머지 균형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에로스의 이면
이상하게도 그런 과거 아버지의 삶을 살아온 남성들이 지금의 아들들을 너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남자는 남자에게 관대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서로 관대하지 않은 남자들의 관계가 기업과 조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건 수컷들의 세계에서 변치 않는 진리이다. 남성은 남성을 동료(아군)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정치에 중도가 살아남을 수 없는 이유) 여성은 뭉치며 서로에게 공감하는 동물이지만 남성은 뭉치면 서열화하고 자신만의 고유영역을 다른 수컷들로부터 지켜내려는 본성을 가졌다.
"배우자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끄집어내고 무의식 중에 아내에게 '자신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가 되어줄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여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억압한다."
- [남자로 산다는 것] 중에서 -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남성은 남성을 위로해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남성은 끊임없이 여성을 통해 자신을 위로받기 원한다. 그것이 에로스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 성향은 태아기 어머니의 자궁 속의 따뜻함과 유년기 모체(어머니)의 아늑함 속에 있고자 하는 본성과도 같다. 문제는 그 에로스가 상처 입으면 권력이나 폭력의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당연한 건 없다.
쓰다 보니 장편의 칼럼 같은 서평이 된 것 같다. 글의 길이만큼이나 책은 나에게 적지 않은 사유의 시간을 던져주었다. 과거의 나의 삶을 돌아보고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여성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던 같다.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은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당연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세상에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 과거에 물과 공기는 당연하다고 여겨졌지만 지금 물과 공기의 소중함을 깨달아가고 얼마 있지 않아 절실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관계 또한 그와 같다.
'너는 남자니까 너는 여자니까'라며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서로의 성역할을 강요하며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처 입은 영혼들은 이제 서로를 마주 보길 힘들어하며 각자의 방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 일인가구, 고독사, 개인주의가 만연함은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남자의 육아와 가사가 당연하지 않은 것은 이전 세대가 해내지 못한 것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이제 여자의 임신과 출산이 당연하지 않은 것과 같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이다.
남자로 산다는 것 글짓는 목수 유튜브 계정
https://youtu.be/_BcKNWUZg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