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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04. 2022

2022년을 맞이하며

2021년을 보내며

또 한 해가 지나갔다.


  올해의 마지막은 일과 함께 였다. 새해를 알리는 폭죽 소리가 들리기 10분 전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지인의 가게 오픈일을 도와주느라 다들 여행과 여가를 즐기는 시기에 쉼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 것 같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돌아본다.


호주에 온 지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첫해는 산불로 작년은 코로나로 올해도 작년에 이은 팬데믹으로 어려운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하필 내가 호주에 온 이후 천재지변과 바이러스로 한 해 한 해를 지나왔다. 그 속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그 상황에 맞게...


달의 민족이 되다


  코로나19가  호주에서도 외식문화가 주춤하는 사이 딜리버리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코로나로 잠시 일이 끊긴 사이 딜리버리 행렬에 합류했다. 아는 지인의 소개로 케이터링(Catering) 서비스 업체 일을 시작했다. 파티나 행사 음식을 배달하고 세팅해주는 일이었다.


  호주에서 태어난 한국인 사장이 코로나19 시기에 맞춰 쇼핑센터의 레스토랑 음식을 통합한 딜리버리 사업을 시작했다. 웹사이트와 딜리버리 시스템을 만들고 한국음식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다른 나라의 음식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시드니 곳곳을 누비며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다. 한 번은 시드니에서 1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달려서 산속의 숨겨진 한 호수에 음식을 배달 간 적이 있었다. 산을 돌고 돌아 도착한 호에는 각종 화려한 요트들이 떠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요트에서 선상 파티를 이렇게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음식 카트를 끌고 요트에 들어가 파티 중인 호주인들에게 음식을 세팅해 주었다. 말로만 듣던 선상파티가 이런 거구나 하며 가진 자들의 호화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신선하고도 흥미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딜리버리

주중에는 목수일을 하면서도 주말에는 딜리버리를 하며 투잡의 생활을 이어갔다. 시드니 곳곳을 드라이빙하며 돈도 벌고 새로운 구경도 많이 했다. 드라이빙 역량도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항상 나의 발이 되어주는 올드 하캠(하얀 캠리)은 오래된 연식 때문에 적잖은 우려가 했지만 별 탈 없이 시드니 곳곳으로 나를 실어다 주었다.   감사하다.


클리너가 되다.


  교회에 아는 지인의 소개로 홈 청소를 하시는 한 어머니를 도와드리게 되었다. 작년 연말 샵 피팅(인테리어) 공사를 마무리하고 잠시 공백기에 찾아든 일이었다. 청소 파트너가 없어 힘들게 홈 청소를 이어가던 어머니를 좀 도와주면 어떻겠냐는 지인의 부탁에 시작한 청소일은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일 어머니를 태우고 시드니 곳곳의 홈 청소를 다녔다. 대부분 오지(호주인)인들 집이었다. 특히 혼자 사는 할머니 집 청소 일이 많았는데... 독거노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과는 다른 여유 있는 호주 노년의 삶을 볼 수 있었다. 넓은 하우스에 애완견과 함께 노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그들의 모습은 한국의 팍팍하고 고단한 노년의 삶과는 확히 달라 보였다.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함 없 노후를 보낸다. 거동만 크게 불편하지 않다면 일주일에 한 번 씩 우리 같은 홈 청소가 와서 큰 청소들은 해결해주니 생활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다. 그들은 가끔씩 주말마다 찾아오는 자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호호 할머니

  헝가리에서 이민을 온 한 할머니가 인상에 남는다. 백발에 넉넉한 체구를 가진 그녀는 두 마리의 개와 함께 넓은 하우스에서 지내며 우리가 홈 청소를 오는 날이면 항상 맛있는 브런치를 준비해 우리가 청소를 끝내면 항상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호호 할머니'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어찌나 흥이 많은지 항상 집안에는 음악이 흐르고 노래를 부르거나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는 모습이 어린 시절 봤던 만화 호호 할머니를 연상케 했다. 비록 개들과 함께 있지만 혼자 지내는 게 적적하신지 우리가 오는 날이면 항상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집안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빛바랜 과거 사진과 가족사진들을 보여주며 그 사진 속에 엮인 사연들을 나에게 들려준다. 영어가 짧아 모두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할머니의 얘기를 들어주며 리스닝 연습이 많이 되었다. 여러 가지 헝가리 음식도 맛볼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왓슨 베이에 럭셔리 하우스 홈 청소를 얻어서 한 적이 있었다. 태평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하우스였는데 내 평생 그렇게 뷰가 멋있는 집은 처음이었다. 넓은 차고에는 람보르기니부터 포르셰까지 여러 대의 럭셔리 자동차가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3층짜리 집이었는데 집안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커다란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녀석은 항상 3층에 뷰가 가장 좋은 자리에 누워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곤 했다. 왠지 개한테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3층 청소를 마치고 2층으로 내려가 계단 아래에서 녀석에게 손짓하니 녀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다. 정말 웃긴다. 사람들은 계단으로 오르내리는데 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닌다. 정말 이곳은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것 같다.

클리너 되다

  홈 청소를 시작으로 무빙 청소(이사), 이니셜 청소(새집), 학교 청소 등등 여러 가지 청소를 다 해봤다. 청소의 세계가 이렇게 광범위 한지 몰랐다. 이곳 호주에서 한인 중에 최고 부자는 대부분 청소로 돈을 번 사람이라 할 정도로 청소일은 돈이 된다. 한국인의 꼼꼼하고 깔끔한 성향이 청소와 잘 맞기도 하고 한국인처럼 청소를 잘하는 민족이 없는 것 같다. 일이 때론 더럽고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대가를 받는 일이기에 많은 한인들이 청소일에 종사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특히 청소(소독이나 방역 포함)는 코로나 이후에도 일이 끊기기는커녕 더 바쁜 직종이 되었다. 먼지는 계속 쌓이기에 청소는 끊임없다.


목수 아니 철수


 새로운 건축일에 도전했다. 기존에 샵 피팅(인테리어)나 하우스 공사만 접하다가 타운하우스(연립주택단지) 공사를 시작했다. 기존에는 팀버(목재)를 많이 쓰는 일을 하다가 스틸 프레임 공사에 발을 들였다. 목수는 톱(Saw)을 가장 많이 쓰는데 톱 쓸 일이 없다.

파란 나라

파란 스틸 프레임이 그물망처럼 엮여 마치 파란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다. 나무가 아닌 철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톱밥과 먼지 날리는 일에서 불꽃 튀는 일로 바뀌었다. 철재를 자르고 스크루를 박고 제법 거칠고 힘든 일이었다. 특히 철을 다룰 때 나는 귀를 찢는듯한 소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정말 귀마개를 없이는 금방 귀가 멀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귀마개를 하고 다녀야 했다. 보목수들은 항상 소음에 노출되어 오랜 기간 목수일을 한 사람들이 귀가 좋지 않다. 오랜 갈려면 항상 안전장구는 스스로가 항상 챙겨야 한다.


 호주에서 외장공사는 항상 태양볕과의 싸움이다. 다행히 공사 시기가 가을이라 큰 더위는 없었지만 외장 일이라 또다시 따가운 태양볕 아래에서 일을 해야 했다. 오지인 현장이었는데... 오지인들은 태양이 강해지는 오후가 되면 다들 웃옷을 벗고 일을 했다. 우리 팀도 나를 제외하고 다들 윗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일을 하곤 했다. 다들 하루가 다르게 까맣게 변해갔다. 


 일이 거칠다 보니 같이 일하던 기술자들도 다들 구릿빛 피부에 몸과 인상이 모두 우락부락한 느낌이었다. 처음에 공사현장에 들어서는 나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도 내가 별 탈 없이 적응해 일하다 보니 나름 즐겁게 일을 했던 것 같다. 기술자형과 동생 사이에서 나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한 것 같다. 3개월가량을 목수가 아닌 철수가 되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일이 다소 위험하고 힘들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했다. 안전장구 없이 철제 프레임 위를 걸어 다니는 그들의 모습에 놀랐다가도 나중에 나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현장이었다. 정말 목수일은 그 분야가 너무 방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경험을 했다.

철수되다

  오래간만에 다시 접한 외장 목수일은 태양과 바람 속에서 땀 흘리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확실히 내장일 보다 거칠고 힘들지만 외장 일은 뭔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아마도 원시 인류가 그랬듯이 남성은 사냥과 수렵으로 밖에서 땀 흘리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을 하던 유전자가 남아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공사를 하는 동안 다치지 않고 무사히 일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새로운 현장에서 새로운 인연과 경험에 또 한 번 감사하다


여행 가다


  올해는 코로나로 여행을 갈 수 있을까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여행이 성사되었다. 친구 가족과 함께한 4박 5일간의 골드코스트 여행은 정말 잊지 못할 또 다른 추억을 남겨었다.

친구 가족들과

 호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본 것 같다. 비성수기에 맞춰 간 여행이라 비용도 저렴하면서 나름 럭셔리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퀸즐랜드 주를 넘어서고 나서 NSW가 락다운이 된 건 정말 천운이었다. 하루만 늦었어도 여행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골드코스트가 아이들의 천국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가족여행으로는 최고의 여행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 또한 놀이공원에서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아이가 된 기분이다.  중년의 나이에 놀이기구를 가장 많이 타는 날을 맞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성수기에 보더(border:국경)도 막히고 코로나 락다운까지 겹쳐 놀이동산에는 인파가 많지 않아 긴 대기시간 없이 쉬지 않고 놀이기구를 탔다. 정말 아이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같이 간 친구의 아이보다 내가 더 아이 같다.

골드 코스트 (Gold Coast)

  아름다운 수많은 경치들 또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줬다. 어디서 찍어도 작품 사진이 되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고 즐기는 여행이었다. 특히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Surfer's Paradise beach)에서 봤던 석양과 일출은 너무 아름다웠다. 특히 이른 새벽 해변에 앉아 맞이했던 일출은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일출이 아녔나 싶다. 여행 중 내가 해변에 나간 그날 아침만이 구름 없이 맑은 일출을 볼 수 있었다. 혼자 앉아 멍 때리며 바라본 일출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 순간을 혼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같이 했다면 더 의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골드코스트 일출 (Surfer's Paradise Beach)

줄을 넘다.


  골드코스트 여행 후 시작된 거의 3개월에 걸친 락다운은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다. 어디도 갈 수 없다. 주정부는 일상을 멈추고 통행을 제한했다. 일도 끊기고 지겨운 격리의 시간을 버텨야 했다. 하루에 1~2시간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것 이외에 모든 시간을 방 안에서 보내야 했다. 좋아하는 수영도 갈 수 없어 너무 힘들었다. 방안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운동 부족과 답답함으로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몸에 활력을 불어넣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땀 흘리는 유산소 운동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줄넘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그냥 넘던 줄넘기는 나중에 음악에 맞춰 영상까지 찍으며 나름 줄넘기에 재미를 붙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음악과 줄넘기를 융합한 영상들이 하나둘씩 쌓여가며 락다운의 지겨운 시간들을 나름 재미있는 시간으로 바꿔가고 있었다.

줄넘기

  영어공부를 병행하기 위해 항상 신나는 팝송을 따라 들으며 줄을 넘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가사에서 떠오르는 시상을 덧붙여 SNS에 올렸다. 그 영상이 수십 개가 넘어간다. 지금에 와서 보면 줄넘기 실력이 계속 올라가는 역사를 볼 수 있다. 어려움 속에서 소소한 것에서 삶의 의미와 활력을 찾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


소설을 쓰다


  락다운 기간 비록 몸은 방 안에 갇혀있었지만 마음은 상상의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의 매일 새로 소설의 초고를 써내려 갔다. 그와 동시에 기존에 썼던 소설의 퇴고 작업도 병행하며 웹소설 공모전에 응모했다. 예상치 못하게 공모전(네이버 지상 최대 공모전)에 올린 소설이 최종 결선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나에게 큰 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예상치 못한 선전에 웹 소설가로 등단할 희망찬 에 젖어들었다. 비록 최종 결선에서 떨어져 기대했던 만큼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래도 나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자기만족으로 써내려 가던 소설이 그래도 가능성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앞으로도 계속 읽고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확고한 마음이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웹소설 공모전


잡부가 되어


 연말친구의 가게 오픈을 도와주려 샵 피팅(인테리어) 공사부터 청소, 주방일까지 하며 바쁜 연말을 보냈다. 그런 노력이 가상했던 것일까? 친구의 가게가 오픈하기도 전에 호주 유명 방송(9시 뉴스)을 타며 시드니의 명물이 되었다. 친구와 동업하는 사장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큰 이슈가 되어 가게 홍보를 따로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유명해져 버렸다. 말 그대로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가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실력 있는 메인 주방장의 음식 솜씨 또한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대박 조짐이다. 친구의 사업을 옆에서 도와주며 잘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 기쁘고 감사하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된다는 것에 감사하다.

CHINEL 오픈

*CHINEL 뉴스  https://fb.watch/ahU0 fNsoZ9/


한해의 글을 돌아보며


  2021년 1월 4일, [2021년을 맞이하며]를 시작으로 총 79편의 글을 브런치에 게재했다. (칼럼/감상평 11편, 에세이 5편, 서평 27편, 소설 12편, 감사일기 24편). 브런치에 게재한 글은 내가 쓴 글의 일부일 뿐이다.  다른 플랫폼과 나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공개되지 않은 새로운 소설 원고까지 합하면 브런치에 게재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썼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19의 격리의 시간 동안 많은 글을 쓰면서 몰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것 같다. 현실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특히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말처럼 소설을 쓰며 스스로가 치유되는 기분을 느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사(Thanks) 2021, 행복(Happy) 2022!~


  2022년이 새해가 밝았다. 2021년 되돌아 보면 나에게 너무 감사한 한 해였다. 많은 경험과 관계 속에서 많은 것을 얻고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목장 식구들과 감사일기도 쓰며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이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2022년 세가지 소망


  나에게 새해 소망이 있다면 아마도 올해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것이다. 오랜 무명작가 생활을 마감하고 등단해서 정식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호주라는 머나먼 타향에서의 삶을 살아내며 나의 소망까지 이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과한 욕심일 수도 있다. 언제 일진 알 수 없지만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를 안다. 소망이 없는 삶은 지속하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인간이 고통의 삶을 견디는 건 소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웹소설 공모전을 통해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뭐 사실 나도 글을 쓰게 될 줄 몰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 글을 쓴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냐마는 쓰다 보니 욕심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클수록 그것에 대한 애정 또한 커져가기 마련이다. 글 쓰는 것이 마치 연애와 같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 만큼 애정이 커져간다. 글도 그러하다.

식구들

  작년 한 해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관계 맺고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내가 만약 아직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편협한 관계 속에 갇혀 나만 바라보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 호주라는 특별한 환경이 비록 물질적 풍요는 얻지 못했지만 다양한 일과 관계 속에서 얻은 경험은 언젠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올해에 또 다른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내 삶에도 사랑이 찾아들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곳에 온 이후 나에겐 삶을 견뎌내고 지속하는 소망은 있었지만 삶은 좀 더 아름답게 해주는 사랑이 빠져있었던 것 같다. 인생의 중반부를 지나도록 반려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사랑이 빠진 삶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고 척박하다. '사람+사랑=삶' 이 공식은 시공간을 변화와 상관없이 적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메마른 가슴을 적셔줄 사랑이 찾아드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 소망은 호주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곳 호주에서 영주권없이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민자들의 소망이겠지만 나 또한 이곳의 삶이 지속되면서 안정을 찾고자 하는 욕심이 생긴다. 쉽지 않은 길이다. 쉽지 않기에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결과가 어떻든 도전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의미있다.  


  쓰다 보니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내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지 못하더라도 좌절하거나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 분명 또 다른 계획 하심이 있으리라 믿는다. 강도보다는 빈도의 중요성을 안다. 항상 과정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올해는 감사함으로 보내온 한 해가 행복함을 가져다주는 한 해를 선사하길 바라본다.

샐리 비치에서 (Shelly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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