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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11. 2022

죽어야 산다

[마태복음]을 읽다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마태복음 16:25] -


  몇 주째 비가 내리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 조금씩 사그라들려는가 싶더니 이번엔 물난리다. 시드니 곳곳이 물에 잠겼다. NSW 주총리는 1000년에 한 번 겪는 상황이라고 표현하며 그 상황의 심각성을 언론에 토로했다. 정말 성경 속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가 오려나 보다. 한국에서는 건조한 날씨 속에 산불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최근 몇 년 사이 정말 많은 재앙들이 닥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호주 이곳에 발을 디딘 이후부터였다. 2018년의 마지막 연말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화려한 불꽃쇼를 감상하며 시작된 이곳의 생활은 적잖은 기대와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 기대와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해 호주는 연일 이어지는 폭염 속에 대지는 바짝바짝 말라갔다. 그리고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화마(火魔)가 호주 전역을 덮쳤고 곳곳이 불지옥으로 변해갔다. 엄청난 삼림이 불에 타고 수많은 야생 동물들이 생명을 잃었다. 하늘은 잿빛으로 변해버렸고 눈처럼 재가 떨어졌다. 당시 내가 봤던 하늘은 정말 세상이 종말이 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태양빛은 연기와 잿가루에 가려져 세상은 어둠 속에 갇혀버렸다. 태양빛은 공기 중에 난반사되어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화마의 고통이 끝나갈 쯤이었다. 이젠 보이지 않은 공포가 찾아들었다.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 무서운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고 호주 또한 피해 갈 수 없었다. 바이러스의 공포는 사람들을 서로 멀어지게 만들었다. 마스크 뒤로 얼굴을 감춘 사람들의 눈에서는 서로에 대한 의심과 공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2년여에 걸친 코로나와의 전쟁이 조금씩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제 마스크를 벗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선언한 호주에 이번엔 물난리가 시작됐다. 그와 동시에 전 세계는 지금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점점 휘말려가고 있다. 정말 끊임없는 재앙의 연속이다.


  불에서 병으로 다시 물로 이제는 전쟁으로 사람들은 죽고 세상에 믿음과 신뢰는 라지고 공포와 증오가 만연해 간다.


   -------------


오랜만에 교회 예배당을 찾았다. 그간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 날 예배당에서 짚어준 첫 머리말의 성경구절이 많은 상념을 일으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 [마태복음 16:24] -


  우리는 말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를 구원했다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우러러본다. 내가 지금 여기 숨 쉬며 삶을 영위함이 그 덕분임에 감사하며... 기도하고 회개하면 되겠지 하고 예배당에 앉아서 한 주간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그 분만은 들어주시기를 바라며...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려 하지 않는다. 예수가 대신 짊어졌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삶 속에서 죄를 짓고 또 습관처럼 예배당에 앉아 기도한다.


"요즘 교회에 간증이 줄어들고 있어요, 간증이 끊이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 교회 목사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예배당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눈물 흘리며 죄를 용서받고자 한다. 그건 과거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피 흘리며 형장으로 향할 때 그의 열두 제자들(12 사도) 또한 그러했다. 아무도 그와 함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가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그를 바라보며 슬퍼하기만 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도 그렇다. 아무도 자신의 죄를 남들 앞에서 고하지 않는다. 그건 자신을 죽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말 못 할 죄를 알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간적으로 사장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마태복음 16:23] -


  예수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가야 할 길을 막는 베드로에게 말했다. 베드로는 예수를 막아서지 말고 같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를 따라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예수의 언행을 찬양하고 숭배하면서 정작 그의 길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그저 멀찌기 서서 바라보며 그 모습을 관조하며 스스로를 정죄(淨罪)하려 한다.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드려다 보았으리라. 이후 그들은 그 죄를 씻는 마음으로 글과 행동으로 옮기며 예수의 생전의 행적을 알리고 다녔다.


  나는 앞서 쓴 많은 글에서 "관조(觀照)"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다. 관조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왜냐 관조하는 삶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마음과 잠시 멀찌기 떨어져 마음을 관조하는 자세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마음과 같이 흔들려서는 무엇이 그 마음을 흔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부처도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세상과 자신을 세상을 관조하며 진리를 깨달았다.


 "부처도 되지 못하는데 어찌 예수를 바라보냐?"


  며칠 전 교회의 지인들과 함께한 모임에서였다. 다들 예수! 예수! 를 외치며 그 만을 바라볼 뿐 정작 예수가 원하고 원했던 것을 행하는 자가 어디 있는가? 한국의 기독교가 가식과 위선으로 변해간 것은 대부분이 그런 예수 코스프레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아(無我)와 무위(無爲)


  불교에서도 무아(자신의 사라짐), 무위(아무것도 되지 않음)를 강조한다. 무아는 자신을 죽이고 비우는 행위이며, 무위는 인간세상이 만든 역할, 지위, 목적 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부처(석가모니)가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 깨닫고자 함이었다. 우선 내 안의 자신을 없애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예수 또한 자신의 죽음만이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예수는 두 번 죽은 사람이다.


  첫 번째는 예수도 부처처럼 내적으로 자신을 죽이는 과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며 예수 또한 부처와 같이 무아와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성경에서는 예수의 내적 수행과정에 대해 나타나 있지 않다. 그 부분이 생략된 것인지 아니면 예수는 정말 내적으로 완전한 모습 즉, 신의 내면을 이미 가지고 탄생한 것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부분이다. 기독교에서는 당연히 후자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예수를 성자(聖子: 신의 아들)라고 한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 아무 죄가 없다. 이 일은 너희가 책임을 져야 한다."


                                       - [마태복음 27:24] -

               

  두 번째, 예수는 만인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두 번째 죽음을 행한다. 만인은 그의 죽음을 목도하며 마음속에 피어나는 죄의식과 마주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본디오 빌라도 또한 그 찝찝함과 책임에서 벗어나려 손을 씻었다고 한다. 이 말은 그 또한 자신이 행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 또한 로마제국이 한 통치자로서 자신의 자리와 기득권자들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벽돌이 아닌 첫 번째 벽돌을 쌓는 자


  우리는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고 또한 살아서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변화와 행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 말은 자신이 살아서 변화와 승리를 체감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고 안되면 짓밟고 그것도 안되면 서로를 죽이고 올라서며 자신의 옳았음을 증명하려 한다.


"형! 마지막 벽돌을 쌓는 게 중요한 게 아녜요, 지금 벽돌을 쌓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그 모임에서 누군가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 말이 가슴속에 남아 계속 머릿속을 되뇐다. 우리는 모두가 마지막 벽돌을 쌓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상대방을 설득하고 이기려 한다. 설득해서 그에게 내가 알고 있는 행복을 안겨주고 그를 이겨서 변화시키려 한다. 그럼 얼마나 좋겠는가? 너와 내가 마주 보며 둘 다 행복하고 변화되는 삶 그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스스로 변했다고 믿고 싶다. 누군가에 의해 변화되었다기보다 자신의 자유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되었음을 믿고 싶다. 사실 그건 변화라기 보단 노력에 의한 금전적 혹은 지위적 성과 혹은 성취감을 얻은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자유의지는 강해지고 굳어진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틀리지 않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더욱이 나이가 들고 세상에 때가 많이 묻을수록 그 현상은 더 심해진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기존 신자(다른 교회를 다녀본)들 보다는 새로운 신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백지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백지는 그리는 데로 그려진다. 그만큼 상대를 변화시키기 용이하다는 말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 그림이 그려진 종이는 지우고 다시 그려야 한다. 쉽지 않다. 조금은 안타깝다. 왜 쉬운 길만 가려하는 건지에 대해서... 어쩌면 우리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핑계 삼아 타인에게 다가가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자신의 변화는 이 노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부정하고 부정하라 부정할 수 없을 때까지


  과거 사도 바울은 예수를 부정하는 자였다. 그는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했다. 그렇게 예수를 의심하고 핍박하던 자였다.  그 지독했던 부정의 시간들은 어떤 계기로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저 꿈속 혹은 환상 속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는...) 그는 예수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건을 겪거나 혹은 새로운 발견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그는 남은 평생을 예수의 길을 따라갔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예수의 말을 전했다. 그는 예수와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음에도 이후 기독교에서 그에게 예수 살아생전의 열두 제자에게 부여한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수많은 서신은 성경의 신약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

믿음이 생기는 방식


  기독교에서는 믿음을 강조한다. 어떨 때 그 믿음을 강요받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믿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는 무지 속에 믿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분명 예수를 부인할 수 있는 많은 근거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의심은 나쁘지만 일종의 관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호감을 가지고 무언가에 임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의심을 가지고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간혹 의심 속에서 의외의 모습, 예상치 못한 상황 보게 된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자신에게 차가운 모습으로 일관하던 사람이 남모르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모습 혹은 아픈 동물들을 돌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 순간 의심과 반감은 사라지고 더 큰 호감을 가져오며 절대적인 믿음 같은 것이 생겨난다. 의심에서 시작된 호감은 견고한 믿음이 된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성경책을 들춰보고 관련 자료들을 찾는 시간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믿음을 가지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맹목적으로 믿고 누군가는 누군가 때문에 믿고 누군가는 간절해서 믿고, 누군가는 의심하며 믿는 것이다.


  예수는 먼저 다가갔고 사람들을 믿음으로 바꿔나갔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건 자신이 죽어야만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두 제자와 최후의 만찬 후에 밤에 홀로 시나위 산에 올랐다. 거기서 아마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 음성은 그가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다시 아버지(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당대의 신박한 예언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예수는 첫 벽돌을 쌓아 올린 자이다. 마지막 벽돌을 쌓은 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마지막 벽돌을 쌓고자 한다.


"어차피 바뀌지도 않을 사람 뭐할라고 신경 쓰냐? 그냥 냅둬!"

"어차피 지금 네가 시작해 봐야 될 일도 아냐! 그냥 접어!"


   우리는 변화와 성과를 직접 경험하거나 얻지 못할 거라 생각되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다. 그만큼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계산적으로 따져보고 일과 관계를 도모한다. 내가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면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했던 말 "너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는 먼저 시작해야 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7] -


 당신이 지금 보지 못하는 나중은 심히 창대해질 수 있다. 당신이 창대함을 보지 못할지언정 그 창대함의 시작은 당신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당신이 시작했기 때문이고 당신이 씨를 뿌렸기 때문이며 당신이 먼저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게 예수가 했던 변화의 시작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즉 자신을 죽이는 행동이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한다.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우리가 상대방을 변화시키고자 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의 변화를 내가 목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변화에 시발점을 만들고 떠나야 하는 것 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호주에 온 이후 여기서 그런 이들을 몇몇 만났다. 그들은 나를 지켜봐 주었다. 스쳐지나온 자들이었지만 지나고 나서 나에게 많은 여운과 깨달음을 준 분들이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들은 나의 변화에 첫 벽돌을 쌓아준 분들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대부분이 그랬다. 대부분이 마지막 벽돌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어떻게든 당장 바꿔야 하고 변화되어야 한다며 윽박지르고 강요했다. 물론 그 상황이 당장 눈에 보이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순 있었다. 하지만 생각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강요된 행동은 결국 마음에 상처와 더 큰 반감만을 만들 뿐이었다.  


"내가 중요해"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타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내가 중요한 만큼 타인도 중요하다. 는 두 가지 관점이다. 안타까운 건 우리가 주어진 틀 안에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시중에는 관계에서 상처받은 영혼이 소중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들을 설명하는 수많은 에세이 서적과 심리학 관련 책들이 넘쳐난다. 그 어디에도 상대방을 지켜주라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네가 중요해"


  점 하나의 위치만 바꾸면 내가 타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예상치 않은 관계의 반전을 가져올 수 있다.


자유의지로 인한 타락 = 루시퍼의 탄생


 내가 서두에서 푸념처럼 늘어놓은 호주 생활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주변 환경의 변화는 내가 의도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재앙과 질병 그리고 전쟁 이 모든 건 그 누구도 원하던 것이 아니었음이 자명하다. 내가 호주에 처음 올 때의 계획 또한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변해갔다. 어찌 보면 호주에 오게 된 것부터가 나의 의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루시퍼의 추락> - 귀스타프 도레

"어찌하다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빛나는 별, 여명의 아들인 네가! 민족들을 쳐부수던 네가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나니. 너는 네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지.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리라.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져야지.' 그런데 너는 저승으로, 구렁의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

                                                    

                                  - [이사야 14:12~15] -


  성경 속에서는 천사의 자유의지로 인한 타락이 악마를 탄생시켰다고 본다. 하나님과 함께 있던 천사가 지상으로 쫓겨 나와 악마인 루시퍼(Lucifer)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유의지 즉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욕망이 결국 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그 기본적인 욕구(식욕, 수면욕, 성욕, 배설욕)는 성장하고 사회화되면서 더 많고 다양한 욕망(물욕, 명예욕, 지배욕, 자기실현 욕 등)들로 변해 간다.


  인간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산업자본주의의 온갖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무대에서 자유의지를 통해 원하는 욕망을 실현시켜나가는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문명의 발전을 위해 자유의지를 이용해야만 하고 그 발전은 결국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다. 기독교 신앙인들이 그토록 회개하라, 금욕하라 그리고 전도하라를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나의 자유의지를 믿고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려 했지만 그것들이 엎어지고 좌절되는 것은 아마도 나의 자유의지를 꺾고자 하려는 신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 [요한계시록 22:13] -


 성경의 마지막 요한 계시록에는 하나님이 시작한 세상을 하나님이 마무리하러 올 거라 얘기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앙, 질병, 전쟁이 성경 속에도 명시되어 있다. 그 마무리를 하러 내려올 메시아가 누구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두 번째 찾아올 메시아는 구원이 아닌 종말이라 얘기한다. 사실 이 성경의 마지막은 재난 공포 판타지 영화의 종합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론 강력한 두려움이 강한 믿음을 만들기도 한다. 자유의지와 욕망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쓸어버리고 다시 태초의 선악과 죄의식이 존재하지 않던 에덴동산으로 되돌려 버릴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불교의 윤회(輪廻) 사상 그리고 니체의 영원회귀(永遠回歸) 사상과도 흡사해 보인다.


이순신 장군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순신 장군 또한 같은 말을 남겼다. 인류의 더 잘 살고자 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유의지를 믿고 욕망을 쫓으며 살아왔다.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더 큰 발전을 향해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회 현상 및 재앙들이 인간의 자유의지가 나아가는 방향이 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시점이다.


 정말 과거 예수가 행했던 나를 죽이는 것 그리고 부처가 행했던 나를 비우는 길이 모두가 사는 길이 아닐까? 예수와 부처는 죽었기에 지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내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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