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두는 삶

이사를 하면서

by 글짓는 목수

이사를 했다.


벌써 7번째 이사다. 유목민이 따로 없다. 이사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점점 무거워진다는 걸 실감한다. 처음호주에 왔을 땐 캐리어 두 개였던 짐은 어느새 차 두대(승용차)에도 다 싣기 힘들 정도로 많아졌다. 전에 살던 집과 이사 갈 집을 두세 번 오고 가면서야 간신히 짐을 다 옮길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사를 갈 때마다 불필요한 한 것들을 조금씩이나마 버릴 수 있었기에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방 안에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고서야 내가 쓰지도 않는 물건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물건들은 그제서야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다. 그렇게 우리는 쓰지도 알지도 못하는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옮기는 게 끝이 아니다. 이삿짐을 옮기고 방안 가득 쌓인 짐들을 보며 한숨이 터져 나온다. 또 언제 이 짐을 풀고 정리를 할지... 짐이 많아지니 걱정거리도 많아진다. 사실 가진게 없으면 잃을게 없다. 잃을게 없으면 걱정도 줄어든다.


모으는 산타


전에 살던 집 옆집에는 정말로 모으고 쌓아두기로 유명한 할아버지가 한 명 살고 있었다. 이슬람계의 중동쪽 사람이다. 그의 아내는 항상 검은 히잡을 쓰고 다닌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집이다. 왜냐하면 그의 집 앞에 세워져 있는 희귀한 봉고차 때문이다.


그 봉고차는 명물? 아니 흉물이라고 해야 할까? 연식이 꽤 오래된 차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 차 있다. 그것도 모자라 차 지붕 위에도 수북이 쌓아 올렸다. 그 물건들이 떨어질까 밧줄 같은 것으로 떨어지거나 누가 가져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매어놓았다.

쌓여진 짐들과 정글 속 하우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집은 마치 정글을 연상케 할 정도록 숲이 우거져 있다. 온갖 식물들이 집을 뒤덮고 있어 집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 정글 속 곳곳에도 온갖 잡동사니들이 식물들과 뒤섞여 쌓여있다. 우리 집주인은 베트남 사람이었는데 가끔씩 옆집에서 넘어온 나뭇가지들과 잡동사니들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며 나에게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문제는 그 정글 때문에 여름이면 모기가 들끓는다는 것이다. 창문을 열 수가 없다. 밤에는 집 앞마당이나 뒤 뜰에는 옆집에서 넘어온 모기들의 사냥터가 되어버린다. 잠시만 나갔다 들어오면 몸 곳곳에 놈들이 습격한 흔적 때문에 온 몸이 간지럽다.


그 집 할아버지는 하얗고 긴 수염을 한 모습이 마치 산타클로스를 연상케 한다. 그는 항상 카트 같은 것을 끌고 다니며 잡동사니들을 주우러 다닌다. 가끔은 자전거에 카트를 연결해 멀리 원정 수집도 가는 모양이다.

가끔씩 밖에서 마주칠 때면 또 뭔가를 주워서 카트에 가득 담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한다. 처음에 주워서 팔려는가보다 했는데... 아니다 그냥 주워서 재워놓는다. 한 번은 집에서 쉬고 있는데 그가 나에게 우리집 앞 마당에 자신이 주워온 물건들을 잠시 보관해도 되겠냐며 물어온다. 이제 자기 집에도 공간이 부족한가 보다. 그렇게 그의 집은 쓰지 않는 물건들도 가득채워져 간다. 아마 그에겐 채워지지 않는 마음속의 결핍을 그것들로 채워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좀 더 넓은 집에 살고 싶다"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누구나 더 넓고 큰 집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건 아마도 더 많은 것을 쌓아둘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무리 큰 집을 가져도 자신이 쓰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 그 공간은 자신이 아니 물건으로 채워지고 먼지가 쌓여가는 공간이다.

물론 크고 넓은 공간은 중요하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반지하 단칸방에 사는 사람과 넓은 마당을 가진 전망좋은 주택에 사는 사람은 분명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다. 문제는 크고 넓은 공간을 계속 채워 넣는 사람들이다. 결국 좁은 곳에 살 때랑 다를 것이 없어진다. 비워진 공간은 크기에는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비워진 공간에 나를 채운다


야구장에 들어설 때의 느낌을 아는가. 탁 트인 시야와 넓은 공간이 주는 그 감흥을 잊을 수 없다. 마치 그 넓은 공간 속에 나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비워진 곳에 내가 채워진다. 처음 내가 여기 호주에 왔을 때도 그랬다. 지평선이 보이는 탁 트인 시야와 곳곳에 크고 넓은 공원, 하늘이 뚫린 넓은 야외 수영장 등, 개인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의 지대함에 매료되었다. 비록 나의 몸은 작은 방에 세 들어 살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다른 넓고 쾌적한 공간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다.


한국에서는 하늘을 보기 힘들었다. 곳곳에 솟아오른 고층빌딩들로 고개를 꺾어야만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항상 좁고 번잡한 공간만을 오고 가며 그 공간처럼 나의 생각과 행동도 그에 맞춰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답답해서였을까? 나는 주말만 되면 항상 산을 찾았다. 산 위에 올라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면 그렇게 시원하고 상쾌할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 쌓여있던 무언가가 그 넓은 공간 속으로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는 굳이 산에 올라가지 않아도 그런 공간이 주변에 많아서 행복하다.


지금은 전 보다 좀 더 넓은 방으로 이사를 왔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더 많은 비용을 감당해야 하지만 좀 더 넓은 공간이 좀 더 넓은 사유의 공간을 제공할 거라 믿는다. 불필요한 물건들은 내 다 버리고 그 빈자리를 나로 채워보려 한다. 비움이 또 다른 채움을 가져다 줌을 믿는다.


"하루하루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한 해 한 해가 알려준다"

- 랠프 월도 에머슨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할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건들로 다이내믹한 삶이 만들어진다. 한국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물론 좋은 경험 그리고 나쁜 경험도 있다. 아니 좋고 나쁘기보다는 내가 이해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에 계속 부딪치며 이제는 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 세월이 흐르고 숙성의 시간을 거치며 이 모든 기억들은 재해석되고 나에게 새로운 글감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을 쓰면서 내가 바뀐 것 중 하나도 이런 것이다. 결국 글이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나의 편협한 생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제한된 시간에 많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도 없기에 책이나 또 다른 매체 등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특히 소설을 쓸 때는 각기 다른 인물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절대로 쓸 수가 없다. 쓴다 해도 수박 겉핥기 일 뿐이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는 연습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또 다른 새로운 공간이 또 다른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제는 물건을 쌓는 것이 아닌 마음의 양식을 쌓는 삶이 이어지기 바라본다.


기대되고 감사하다. 나에게 또 다른 공간과 시간과 관계를 허락하심에...

이삿짐 옮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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