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소리쳤다. 순간 주변은 시간이 멈춘 듯 적막이 흘렀고 수 많은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멤돌았다. 둘 사이의 냉랭한 공기를 가르며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그 사이로 분노를 찬뜩 머금은 그의 눈빛이 이글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에 또 다른 녀석이 꿈틀거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턱을 당기며 노려보는 눈과 천천히 하지만 한치에 밀림 없이 서로를 밀어내는 어금니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며 움켜진 주먹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자아와 억누르는 자아가 대립한다. 너무 오랜만에 존재감을 드러낸 또 다른 나의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순간 엘리베이터 안 뒤에 서 있던 동료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나는 마주한 시선을 내렸고 어금니에 힘이 풀렸고 움켜진 손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만약 그 동료가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지 않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또 다른 내가 여태껏 지켜왔던 지금의 나를 다시 삼켜버렸을 지도 모른다.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복되도다 사자여! 사람이 그대를 먹어삼키기에 그대는 사람이 되는도다. 2 저주 있을진저 사람이여! 사자가 그대를 먹어삼킬 것이니, 사자가 사람이 될 것이로다"
[도마복음 7장]
1 Jesus said, "Blessed is the lion that the human will eat, so that the lion becomes human. 2 And cursed is the human that the lion will eat, and the lion will become human."
- Thomas 7 -
누구나 자신 안에 사자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는 오랜 시간 뙤약볕 아래 뜨거운 모래 위를 걷고 있는 낙타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누군가의 핍박 속에서 분노를 키워왔다. 그 분노가 어느 순간 자신을 삼켜버리고 사자로 돌변하며 포효한다.
그도 나도 아마 낙타로 살아왔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낙타는 주인 앞에서 사자로 돌변하지 않는다. 낙타는 고되게 일만 시키는 주인에게 불만이지만 주인을 떠나 살 수 없음을 알기에 절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사자로 변모하지 않는다. 쌓여온 분노의 화살은 다른 곳으로 향하고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낙타를 분노케 하여 사자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니 또 다른 낙타였다. 사실 그 분노는 주인 혹은 강자가 만든 세상에서 온 것이지만 진정한 강자는 약자와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링 위에 무대를 만들어 약자와 약자가 싸우게 만든다. 약자 사이에 서열을 만들고 서로를 갈아먹게 하며 강자에게 상납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경쟁 사회이고 능력주의 사회이다. 강자는 그 링 위에 서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모른다.
"형님도 교회 다니시군요. 사실 요즘 제자 훈련을 받고 있거든요. 참~ 예수님을 따른다는게 쉬운 일이 아닌거 같아요"
그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였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와 신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험상궃은 외모와는 달리 상냥한 말투와 교양있는 태도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를 상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와 나의 동행은 같은 곳을 향한 믿음으로 시작되는듯 보였다. 하지만 그 나중은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해 미움으로 번져나갔다. 이해관계가 상충하면 인격적 배려는 어느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마련이다. 그는 나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를 자신의 아래로만 여겼다.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존댓말만 썼을 뿐 그의 머릿 속에 나는 일개 데모도일 뿐이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내가 얄밉고 불편했을 것이다.
"야! 이 새꺄! 내 말이 우습냐? 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그거 오늘까지 다 해놓으라고 했지? 근데 뭐 퇴근하겠다고?! 아놔! 개념을 밥 말아 쳐 먹었나?"
나도 그랬다. 신입사원을 앞에 세워놓고 소리 쳤다. 그가 나에게 했던 언행은 나의 과거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인과응보라고 해야하나? 나는 그렇게 사회 생활을 하지 않았다. 상사가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라면 하라는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직장을 내 집 같이 생각하며 살았다. 내가 살아온 시공간이 정답이라고 믿었고 지나온 시간만큼 정답은 마치 나만의 진리처럼 견고해 졌다. 그 진리를 후임들에게도 가르쳐야 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맹신하고 따라왔던 모든 것이 누군가에겐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부인해야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나 또한 그러했다. 내가 회사에 처음 몸 담았을 때 모습을 기억한다.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무엇보다 힘든건 왜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왜 그래야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직장생활은 마치 부당하고 불합리한 것을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과정 같아 보였다. 그것이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이고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까 세상은 급격하게 변모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좀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변하지 않던 것이 환경이 바뀌고 위치가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우물 안에서 스스로 변하는 개구리가 있을까? 없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없다.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10년 넘게 했다는 사람이... 참 알만 합니다]
그는 또 한 번 훅을 날렸다. 이번에 문자 메시지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순간 과거 10여년의 직장생활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을 지나갔다. 시작하는 자가 일을 잘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을 못해서 욕 먹는 것은 어쩔 수 없고 감수해야만 일이지만 사람의 존재를 깎아내리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나쁘다. 오랜 세월 직장 생활 동안 내공을 다져서 견디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쓰라림은 여전히 가슴 속에 오래도록 여운을 남겨 놓는다는 것을 알기에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야! 씨발! 너도 이제 대리 달았으면, 의전도 좀 해야하는 거 아니가? 교회 다니는게 벼슬이냐? 나는 뭐 좋아서 이러나? 누가 보면 니가 과장 인줄 알겠다."
예수쟁이 후임 덕분에 나만 개고생이다. 팀장과 부장의 시다바리는 여전히 내 차지였다. 그가 얄미웠다. 누구는 좋아서 위에 빵구날 때가지 술을 마시겠는가? 다음날 모니터가 2개로 보이고 속쓰림과 두통으로 하루종일 보낼 걸 알면서도 마시고 또 마시며 그들의 비위를 맞춘다. 멀쩡하게 밥만 먹고 먼저 자리를 뜨는 후임의 모습이 원망스럽다. 주말에도 그들을 따라 골프장을 따라다니며 나중에 더 나은 내 삶을 위한 희생이라 여겼다. 과거 예수도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지 않았던가? 누구를 위한 희생이냐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이것 또한 고귀하진 않더라도 희생이었다. 주말엔 교회간다고 회사 모임에 빠지고 술자리에선 신앙인이라 술을 빼는 그의 행동에 그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온 듯 했다. 그 상황이 오히려 내가 핍박받는 예수처럼 여겨졌다.
첫 번째 벽돌을 쌓는 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대부분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모두가 피해자 코스프레에 익숙하다. '내가 그래왔기 때문에 너도 그러해야 한다'는 몸에 배인 논리는 이젠 '나는 비록 그래 왔지만 너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로 바뀌어야 한다는 옳은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적어도 너 까지만은 그래야 한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자신이 믿어온 것이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신념은 더욱 견고해지고 그것을 무너뜨리려는 자를 경계하고 미워한다. 과거 예수 또한 그렇게 희생되지 않았던가. 제사장들의 모함 속에 결국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았던가? 옳고 그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밥그릇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마지막 벽돌을 쌓고 싶어 한다. 첫 번째 벽돌은 아무도 쌓고 싶지 않다. 처음이 가장 어렵다. 어디서 부터 어떻게 쌓아올려야 할지 무엇으로 쌓아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많은 고민과 준비가 있은 후에 비로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운데 쌓는 자는 그냥 관성에 법칙만 이용해 앞에 쌓던데로 쌓아가면 된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쌓으면 좋겠지만 앞의 노고 없이 마지막만 쌓고 싶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기꺼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요행의 유혹을 거부하기 어렵다.
누구나 쌓아올린 벽돌 위에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싶다. 그 영광과 이득을 나까지는 누려야만 한다. 앞에서도 그렇게 해왔고 나 또한 그렇게 해왔다. 그렇게 마지막을 향해 가려는데 그것을 허물고 다시 쌓으려는 놈이 나타났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렇게 쌓아올린 벽돌이 처음부터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을 살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자신이 두려워서 이기도 하다.
양질전환(量質轉換)의 법칙은 언제쯤...
세월이 흐르면 부가 쌓이고 경력이 쌓이고 지위도 올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아집도 쌓여가고 견고해진다. 세월이 가도 쌓인 것이 없으면 불안하고 두렵다. 나의 가치를 증명할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모두가 자신의 길만 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그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상이 다른 곳에 한 눈 팔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 쓰지도 못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일에 소모한다. 모두가 양적인 팽창(외면)에 질적인 성장(내면)을 포기한 대가일지도 모른다. 이제 양질전환이 이루어져야 할때이다.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세상을 금식하지 아니한다면, 너희는 나라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2 너희가 안식일을 안식일으로서 지켜내지 아니한다면, 너희는 아버지를 볼 수 없으리라."
[도마복음 27장]
1 (Jesus said,) "If you do not fast from the world, you will not find the kingdom. 2 If you do not observe the Sabbath as a Sabbath, you will not see the Father."
- Thomas 27 -
모든 갈등은 이해관계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그를 따르지 않음으로 나는 그가 원하는 성과를 달성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그는 나의 시간을 통제함으로서 내가 생각하는 더 중요한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앗아갔다. 그는 일이 더 중요했고 나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그는 과거의 나의 모습이었고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이 갈등은 해결될 수 없다. 그를 이해하지만 이제 더이상 공감할 수 없다.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형제 눈 속에 있는 티는 잘 보건만,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도다. 2 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낼 때에야 비로소 너는 밝게 보리니, 그제서야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줄 수 있으리라. "
[도마복음 26장]
1 Jesus said, "You(sg.) see the speck that is in your brother's eye, but you do not see the beam that is in your own eye. 2 When you take the beam out of your own eye,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take the speck out of your brother's eye."
-Thomas 26 -
그는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좀 다른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옳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옳지 않을 수도 있을 뿐이다. 그건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이 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건 시간이 증명할 뿐이다. 더 살아봐야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 때가 오는 것도 아니며 오래 산다고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구하고자 하는 이와 그 구함을 멈추지 않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도마복음 2장)이다.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택하리라. 천 명 가운데서 하나를, 만 명 가운데서 둘을. 2 그리고 그들은 하나된 자로서 서있게 되리라."
[도마복음 23장]
1 Jesus said, "I shall choose you, one out of a thousand, and two out of ten thousand, 2 and they will stand as a single one."
- Thomas 23 -
당신이 천 명 중 한명 아니 만 명 중 두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럼 바로 당신이 예수이며 또 다른 천명 가운데 한 명 만 명 가운데 두 명이 당신을 통해 또 다른 예수로 거듭날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따르고자 했던 것을 믿음으로서 우리는 예수와 하나된 자로 서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러러보지 말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1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이 존재함을 믿기 위해서니, 당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말하여 주소서. " 2 그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표정을 읽으면서도, 너희 존재 안에 있는 자를 알아보지 못하였구나.
[도마복음 91]
1 They said to him, "Tell us who you are so that we may believe in you. "2 He said to them, "You read the face of heaven and earth, but you have not come to recognize the one who is in your pres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