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는 자 그리고 의심하는 자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 여덟 번째 이야기 -

by 글짓는 목수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 찾았을 때 그는 괴로워할 것이다. 3 괴로워할 때 그는 경이로워할 것이니. 4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리라."

[도마복음 2장]


1 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2 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3 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4 and he will rule over all." - Thomas 2-



도마복음을 읽다 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말들로 읽는 자로 하여금 행간에서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일까 [도마복음]은 기독교 내부적으로 그리고 수많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복음서이다.


두 개의 치료약


'우리의 마음이 병들어 갈 때 필요한 두 가지 치료약은 무엇일까요?' 언제인가 교회 캠프에서 성경 관련 난센스 퀴즈에서 나온 문제였다. 성경은 그 두 가지 약을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구약과 신약이다. 구약(舊約)은 말 그대로 옛 구자로 써서 옛날 약속, 즉 예수라는 메시아가 이 땅에 오기 전에 신과 다른 인간들 사이에 약속을 적어놓은 것이다. 구약은 기독교를 비롯해 유대교, 이슬람교 또한 상당 부분이 공유되고 있는 경전이다.


신약(新約)은 새로운 약속으로 기독교만이 인정하는 예수 탄생 이후의 새로운 약속을 의미한다. 예수가 죽고 난 후 그의 가르침과 영향 아래 있었던 많은 이들이 예수의 행적과 말씀들을 기록했고 그것들 중에 27서만이 정경으로 인정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수 사후 그가 미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뭐든 죽고 사라지고 나면 그 소중함과 절실함이 드러나는 법이다. 곁에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던 가족과 연인도 그러하지 않은가. 어쨌든 우리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 기원후(AD)로 인간의 역사를 나눌 정도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죽어야 산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성인들을 비롯해서 예술가, 철학자들은 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공통점이 있다. 예수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간을 구원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만수무강하다 돌아가셨다면 이토록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성인이 되었을까? 만약 누군가가 현세에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면 역사는 그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악행의 끝판왕 정도면 기억은 되겠지만 회자(膾炙)되진 않을 것이다.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스토리는 우리에게 그 어떤 감동이나 공감을 남기지 않는다.

왼쪽 상단부터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성인(聖人)은 쓰지 않는다


예수를 비롯해 석가모니(부처), 소크라테스, 공자 등 다른 모든 성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행적과 생각을 직접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예수를 포함한 4대 성인들의 행적과 말은 모두 그들의 생전 혹은 죽은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 남겨진 것들이다. 그러니까 자서전은 없고 대부분 타인의 의해 기록물인 전기(傳記)인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써도 덧붙여지고 줄여지는 것이 글이다. 더욱이 타인이 기록한 것이라면 그 정도는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 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예수의 최측근에서 있었던 제자(12 사도)들의 기록은 허구나 와전이 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모든 글이 그렇듯 필자의 생각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사실 누구의 글이 더 진실에 가깝고 예수의 행적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경전과 복음들은 모두 필자의 뇌를 거쳐서 나온 기록물인 것이다. 정작 그 기록 속 주인공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어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뇌리 속에 잊히지 않는 기억을 남겼을 뿐이다. 그 기억들은 저마다의 방식과 생각에 따라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란 시간을 먹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기록이 전승되는 과정(구전이나 다른 언어로의 번역 등)에서 부풀려지거나 생략되고 또 다른 허구가 가미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은 번역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로지 아랍어로만 된 꾸란만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경전의 단어와 문구의 변형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한다고 한다. 성경처럼 수많은 언어로 번역된 경전도 드물 것이다. 한국에서도 여러 번의 개역개정을 거치면서 성경 문구들이 계속 변형되었다. 우리말에 '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그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느낌은 다를 수 있다.


경전을 비롯한 고문서나 역사서는 그 기록 연대를 매우 중요시한다. 예수 사후 가장 빠른 시기에 작성되었을수록 그 기록의 신빙성은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변형이 가장 덜 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만약 예수 생전에 기록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예수 생전에 기록된 복음서나 관련 고문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대에 잘 나가던 유명인사의 말과 행적을 남기고 싶었던 사람은 분명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 거의 없다면 의도적으로 없애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발견된 [도마복음]의 추정 연대는 기원후 4세기 초쯤이나 일부 문구들은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에서 기존의 경전 내용에 없으면서 기존의 경전 내용과도 겹치는 [도마복음] 속의 예수의 말씀은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감춰져 있었던 예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을 낳게 한다.


중요한 것은 기록물은 그 시대의 모든 상황과 사실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이상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실시간 영상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글은 뇌(전두엽)가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기독교의 공인 그리고 그 배경


AD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핍박받던 예수의 추종자들은 꿈을 이루게 된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당시 5명의 황제와 권력 싸움 중이었던 그가 꺼낸 히든카드였다. 그 심한 탄압 속에서도 커져만 가던 기독교인들의 민심을 등에 업을 수 있는 기회로 삼은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272~337), 밀라노 칙령 (313)

종교가 존립하기 위해선 3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교주(창시자), 교리(경전), 교단(신도)이 있어야 한다. 우선 예수라는 엄청난 행적을 남긴 창시자가 존재한다. 그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늘어나는 신도들이 세계 곳곳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당시만 해도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수많은 복음서들이 지하세계를 통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통일된 하나의 복음서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공식적인 경전의 재정립이 필요했다.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복음서들이 사라졌다. 27개의 정경 이외의 복음서들은 위경과 외경으로 분류하고 당시 수많은 복음서들이 불타 없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숨겨져서 전해지는 것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예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지며 떠돌던 복음서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분의 복음서는 예수 사후 1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신약 정경이 확립된 건 4세기(367년)가 되어서였다. 보통 오리지널이 하나 있으면 수많은 짝퉁들이 생겨나게 되는 법이다. 개중에 오리지널보다 더 오리지널 같은 짝퉁이 생겨날 수도 있다. 나중에는 뭐가 진품이고 짝퉁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된다. 모든 문학이나 예술도 모방에서 시작해 더 나은 결과물로 진화하는 법이라는 점에서 과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전이 오리지널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마태, 누가, 요한복음 등의 복음서들도 실제 그들이 직접 기록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쓰고 뽑은 것 모두 인간이다.


성경을 기록한 것도 인간이고 그것을 선정한 것도 인간이다. 그 과정 속에 그 시대의 필요와 목적에 따른 인간의 의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신약 27 서가 선정되고 공인되는 과정 또한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배경을 배제할 수 없다. 정치와 종교는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왕권과 신권은 역사적으로 항상 대립과 상생을 이어온 관계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이건 신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부분이 아니다. 신앙(현실을 초월한)과 종교(현실에 얽매인)는 다른 개념이다. 정경을 지목하고 결정한 자들 또한 분명 당시의 정치적 이해관계나 외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 분열되어 가던 국가를 바로 세울 목적, 즉 백성들을 통합하고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종교만큼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주는 수단은 드물다. 그렇기에 당시 시대적 상황과 필요에 부합하기 힘든 혹은 의구심이나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복음서 혹은 경전들은 모두 배제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기록들이 불타 사라졌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분명 예수의 실제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문헌이 있었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비밀 (Secret)


[도마복음]도 그중 하나가 아녔을까 생각된다. 이 고문헌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라는 시골 마을의 어느 동굴 안에서 밀봉된 항아리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살아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토마스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도마복음 서문]


"Thes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Judas Thomas the Twin recorded."


- Thomas preface -


[도마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서문에 기록자가 누구인지 명시를 해놓았다. 다른 4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는 내용과 정황상으로 저자를 추정할 뿐이다. 서문에 은밀(Secret)하다는 말에서도 느껴지듯이 누군가에게 절대 발견되면 안 될 것 같은 뉘앙스와 꽁꽁 봉인된 채 숨겨진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문헌의 존재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특이한 점은 그동안 보아왔던 정경 속의 4 복음서 내용이란 상당히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들과 또 다른 내용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이해하기 좀 난해하며 모호한 표현들이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도마복음에 관심이 증폭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도마복음]의 말씀 중에는 동양의 다른 종교들(불교, 힌두교, 도교)에서 나타나는 교리를 아우르고 있는 듯한 구절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부분은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며 나에게 적잖은 흥미를 끌어낸다.


호기심은 열정을 부른다


본디 인간은 호기심(의문)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가는 법이 아니던가. 개인적으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파고드는 성격이라 최근 도마복음을 읽으며 떠오르는 상념들과 곳곳에서 찾아보는 자료들 그리고 과거 읽었던 책들 속에서 연관성들을 찾아서 글을 적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매 구절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상념들이 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책을 읽을 때도 공감을 느끼긴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와는 달리 또 다른 상상력이 가미될 여지가 많은 점이 나를 더 집중하게 만드는 것 같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씀 위주의 복음 구절의 특성상 읽는 자로 하여금 깊이 생각을 해야만 답을 얻을 수 있는 형태의 글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같이 적어놓아 상상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지만 [도마복음] 계속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도마복음


1 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도마복음 1장]


1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 Thomas 1 -



서문에 이어서 시작되는 1장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준비를 필요케 한다. 필자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작가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1장의 내용처럼 필자는 이 복음서를 읽고 자신과 같이 뭔가 깨달음을 얻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글을 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2 찾았을 때 그는 괴로워할 것이다. 3 괴로워할 때 그는 경이로워할 것이니. 4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리라.


그리고 서두에 적은 2장의 내용은 우리가 깨닫게 될 그 무엇이 가져올 결과를 추상적으로 암시한다. 여기서 명시된 괴로움은 아마 오랜 시간의 인내와 탐구 끝에 깨우쳤지만 그 깨우침이 너무나도 단순하거나 아니면 예상치 못하게 너무 가까이 있었던 무엇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이치와 섭리에 경이로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경의로움 뒤에 보이는 세상은 이전에 보이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지며,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처럼 [도마복음]의 도입부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고 읽어가면 갈수록 빠져든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요한복음에는 도마를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모습 때문에 의심의 상징(A douting Thomas)으로 묘사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도마는 지극히 이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이건 마치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과학기술을 맹신하며 세상 모든 것을 숫자와 공식 그리고 논리로 증명해 내고자 하는 과학자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의심(Doubting)인가? 이성(Reason)인가?


도마는 모든 이가 예수의 부활에 감탄과 경이로움을 금치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직접 손으로 예수의 구멍 난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확인한다. 이건 마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찬물을 끼얹는 상황과도 같다. 도마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대중이 모두 '예스'를 외칠 때 당당히 '노'라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이다.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모습과도 같다. 다른 이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고자 했다. 만약 내가 당시 도마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다른 제자들이 없는 자리에서 예수에게 따로 확인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한다. 난 다른 이들의 차가운 시선과 비난까지 감수하며 들이댈 용기는 없는 거 같다. 우리는 대부분 현실에서 다수가 가는 길이 맞겠지 하고 확인도 없이 휩쓸려 간다. 그것이 안전한 길이고 확률적(수치적)으로도 맞는 길이다. 나중에 틀려도 나만 틀린 게 아니니 크게 부끄러울 일도 없다.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산다. 도마는 적어도 그런 인물은 아닌 것이다.


누군가가 볼 때는 의심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볼 때는 이성이다. 모든 상황은 상대적이다. 그저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단하는 것일뿐. 사람은 모두가 다르다. 믿음이 생겨나는 방식 또한 다르다. 누군가는 감동을 통해, 누군가는 의심을 통해 믿음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고 또 다른 감동이 필요하지만 의심은 풀리면 그 믿음은 견고해진다.


이성과 감성 사이


감성적인 사람은 그 상황과 분위기에 휩쓸리고 심취하는 경향이 크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감성이 풍부한 자는 자연 속에 들어가면 자연 속에 감화되고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의 선율에 심취하고 감동적인 소설을 읽을 땐 그 장면을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다. 반면 이성적인 사람은 처한 혹은 휩쓸리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과 냉정함으로 돌다리를 다시 한번 두드려 보는 자이다. 현상에 집중하기보다 그 이면에 가려진 것 혹은 그 과정과 원인에 집중한다. 그렇기에 감성과 이성 중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삶이 피폐해지기 마련이다. 둘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감성과 이성이 제대로 작동해야 할 이유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올바른 믿음이라면, 아니 만약 진리라는 전제하에서 그것을 증명과 재확인의 과정 없이 믿게 되었다면 정말 축복받은 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교회에서 알게 된 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겐 그들이 말하는 영적인 순간 혹은 사건들이 있다고 한다. (성령이 임한다는) 성경에도 그런 장면들이 자주 묘사되곤 한다. 사도 요한 또한 그런 자의 대표 주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요한은 예수의 수제자였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까지 그 옆을 지켰던 자이기도 하다.


도마복음을 읽다 보면 도마가 요한(St. John)과 대조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건 아마 도마가 가지지 못한 믿음을 요한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정경 속 4 복음서 중에서 도마를 가장 많이 언급한 것 또한 요한복음인 것으로 보아 도마와 요한은 제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깊고 의미 있는 관계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도마가 이성의 상징이라면 요한은 감성의 상징 닐까? 서로는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본받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때...


도마는 부활한 예수가 다시 떠난 후 예수와 같은 길을 걸었다. 어부였던 그가 생뚱맞게 목수(예수의 직업)가 되었고 예수가 가라고 한 미지의 세계인 동방의 땅으로 떠나 남은 평생을 복음을 알리며 살다가 순교했다. 결국, 의심하고 의심하다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어진 도마에게 남은 것은 더 이상 변치 않는 믿음 뿐이었다.


구하고자 하는 자는 의문(의심)을 멈추지 않는다.





표지 그림 출처 : <의심하는 도마>, 카라바조, 1601~1602, 상수시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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