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면 알 거야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 열 번째 이야기 -

by 글짓는 목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 의사는 그 의사를 아는 자들을 고치지 아니한다."

- [도마복음 31장] -


1 Jesus said, "A prophet is not acceptable in the prophet's own town; 2 a doctor does not heal those who know the doctor. "

- Thomas 31 -


책을 읽다가 [도마복음]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간의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이 안주하는 것이다. 한 곳에 머물고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고이고 썩은 물에 흘러가는 맑은 물 또한 같이 썩는다. 썩지 않으려면 흘러야 한다. 인간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성장하는 자는 고향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은 시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에 좋고 나쁨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지만 인간에게 있어 변화란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혹은 자연적인 변화 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적인 변화


튀르키예와 시리아에 발생한 강진이 피해가 또 한 번 전 세계에게 슬픔과 불안 그리고 앞으로 닥칠 또 다른 공포를 안겨주고 있다. 사실 이 자연적인 지구의 움직임을 그 자체로는 좋다 나쁘다를 얘기할 수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건 누구를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지진 발생 후 조치와 대처 혹은 사전 예방에 관한 일이라면 좋고 나쁘고를 논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지진이라는 자연의 재앙을 막을 수는 없다. 그 피해와 고통으로부터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튀르키예 강진.jpg 튀르키예 강진

자연의 변화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해가 뜨고 밤이 찾아오고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고 깨끗하던 방은 먼지가 쌓이고 더러워지며 세포는 시간을 먹고 노화되어 죽음으로 향해가는 이 모든 일련의 변화는 우리의 통제 영역 밖이다. 여기에는 좋고(긍정) 나쁨(부정)을 얘기할 수 없다.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적인 변화 때문에 인간은 신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까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자연적인 변화까지 통제하려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부정적인 변화


부정적인 변화는 어찌 보면 자연적인 변화에 가속도가 추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연적인 변화에 쾌락과 중독과 나태함 등이 더해지면 그 자연적인 변화의 속도가 훨씬 빨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쾌락을 위해 찾는 것들은 대부분 인간의 신체와 정신의 노화 속도를 가속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만약 노화가 아니라면 변이를 일으킨다. 변이도 일종의 노화의 한 종류라 볼 수 있다. 암세포는 정상세포의 변이가 가져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빠르고 강력하게 찾아드는 쾌락은 중독을 부르고 중독은 나태한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삶이 무너진다. 후회가 밀려올 때는 이미 나의 의지는 망가진 몸과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

중독.jpg 중독

긍정적인 변화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내가 본격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자연과 부정이 아닌 긍정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세상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온 예수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예수는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에는 신분 또한 짊어져야 할 유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선지자, 예언자 그리고 신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자신의 희생으로 인류를 구원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 그의 고향 사람들에겐 그저 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프레임에 못 박혀 있었다. 한 번 새겨진 프레임이라는 게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지금은 그나마 나을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신분과 출신의 벽을 넘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예수가 만약 고향이 베들레헴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는 세상의 시간을 둘로 나눌만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 속의 그의 수많은 행적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요한복음 4:44]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4:24]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3:57]


성경(신약)에는 서두의 [도마복음]의 내용들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 예수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떠돌아다닌 것은 한 곳에 머물면 그곳은 고향이 되어버리고, 일상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반복되는 생각은 결국 삶을 안주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는 이곳 저곳을 떠돌며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예상치 못한 상황들과 사건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깨닫고 또 그것을 다른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공유하면서 같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그 작던 움직임은 거대한 물결로 퍼져나가고 새로운 왕의 등극을 기대하는 수많은 군중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체...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상대를 옛 날모습으로만 기억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 최인철 [아주 보통의 행복] 중에서 -


사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되는 굴레 속에 살고 있다. 과거 세상을 호령했던 칭기즈칸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다. 빠르게 이동하고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을 지닌 민족의 특성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그 제국은 눈에 보이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뭐 유전자는 많이 퍼뜨렸을 것이다 (몽고반점에 세계로 퍼져나간 건 우연이 아니겠죠?) 이 말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인간은 문명과 도시의 발전을 이룩할 수 없음을 뜻한다. 농경과 산업은 토지와 공장을 기본으로 한다. 토지와 공장을 말에 싣고 돌아다닐 순 없다. 그들은 세계 각지를 정복하며 그들의 정신세계는 다른 어느 민족이 가졌던 것보다 넓고 깊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의 세상은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건물과 공장과 토지를 가진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다. 그래서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정신세계도 따라가야 하지만 오히려 피폐해지는 이유이다. 계속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칭기즈칸 (1162~1227)

"자신을 발견하고 사유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 여행이다. 여행은 새로운 자기를 잉태한다."


- 최인철 [아주 보통의 행복] 중에서 -


그래서 인간은 계속 여행하고 일상을 떠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하지만 돈을 버느라 일상에 발이 묶인 인간들은 시간에 쫓기며 살아간다. 수많은 역할과 계획들에 얽매여 떠날 수가 없다. 설사 몸이 떠나도 정신은 몸이 있는 곳이 아닌 곳에 묶여있는 경우도 많다. 몸이 떠날 수 없으면? 정신이라도 떠나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정신 여행이 책을 읽는 것이다. 돈도 없고 몸도 묶여 있다면 여행 갈 수 있는 방법은 책 밖에 없다.


또 다른 여행


나 또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할 순 없지만 책을 읽다 보니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 읽고 또 읽다보면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조금씩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과 행동도 조금씩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읽으면 써야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누구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나중에 문득 깨닫는 사실이 내가 썼던 글을 입에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과 말 그리고 행동이 조금씩 서로의 궤도를 좁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글과 말 그리고 행동은 서로를 배신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것들을 어긋나게 하려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 우리가 왜 초등학교 때부터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교과서를 그렇게 닳도록 봤는지 이제 좀 이해가 된다. 안타깝지만 성인이 되면 가장 신경 쓰지 않는 과목들이다.

국민학교 교과서

Movement


예수가 살던 시기는 책이 없던 시대이다. 독서의 개념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왕이나 귀족들은 뭐 기록물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는 읽을 수 있는 것이 전무했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여행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 무리들도 칭기즈칸(몽골) 유목민처럼 오랜 세월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다. 우리는 그것을 또 다른 말로 Jesus movement라고 칭하기도 한다. 변화하려면 움직임(Movement)이 있어야 한다. 머무는 자는 변화할 수 없다. 몸이든 정신이든 어딘가 다른 곳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과거 칭기즈칸은 칼을 차고 말을 달리며 빠르게 드넓은 땅을 정복했지만 예수와 그 무리들은 말과 발로 느리지만 가장 오래도록 사람들의 정신을 정복했다. 그래서 칼보다 말이 더 위대하다.


당신도 지금 어딘가에 묶여 있는가?

변화되지 않는 자신을 탓하고 있는가?

그럼 여행을 떠나라~ 멀리 혹은 깊이(책)...


갑자기 떠오른다. 어느 노래의 가삿말이...


♩ ♬ 왜 가야만 하니 왜 가야만 하니 왜 가니?

수많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 잊었니

떠나보면 알 거야 아마 알 거야 ♪♫

- 이남이 [울고 싶어라] 중에서 -

떠나보면 알거야.jpg 여행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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