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리며 발견한 것들...

[토마스 복음서]를 읽다가... -열한 번째 이야기 -

by 글짓는 목수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스럽게 일하면서도 삶을 발견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 [도마복음 58장] -


1 Jesus said, "Blessed is the person who has labored and has found life. "

- Thomas 58 -

"허억~ 허억"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혀온다. 내리쬐는 태양빛과 쏟아지는 태양열에 달궈진 철판은 다시 또 하늘로 그 열기를 내뿜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열기와 아래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몸은 어느새 후끈 달아오르고 온몸의 땀구멍에서 물을 토해낸다. 몸이 토해낸 물은 옷을 적시고 태양열은 또다시 젖은 옷에 물을 날려버린다. 그렇게 내 몸에 물은 계속 사라진다. 어지럽다.

지붕 위에서 (Cambelltown)

"벌컥벌컥"


700ml 생수 한 통을 순식간에 원샷해 버린다. 그렇게 마신 물이 벌써 몇 통째다. 이때 마시는 물맛은 세상 그 어떤 물맛과도 비교할 수 없다. 가히 생명수라 부를 만하다. 뜨거운 모래사장에 물을 부으면 순식간에 모래 속으로 스며들며 흔적 없이 사라지듯 목을 타고 내려간 시원한 물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말라가던 세포에 다시 토해낼 물을 공급한다. 그렇게 나의 몸은 새로운 물을 계속 공급하며 오랫동안 몸속에 머물렀던 물을 내보내고 새로운 물로 계속 교체된다. 순환한다.


피할 수 없는 고통


한낮의 지붕 위는 태양을 피할 곳이 없다. 간혹 지나는 구름이 태양을 가릴 때가 어찌 그리 고마운지 모를 노릇이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아니 사막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사막은 모래 바닥이지만 지붕 위는 철판이다. 태양열에 달궈진 철판은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다.


호주에 처음 왔을 때가 기억난다. 아무것도 모른 체 따라간 공사 현장은 지붕공사를 하는 곳이었다. 그때도 이랬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힘들었다. 몸도 마음도 준비되지 않았다. 지금은 몸이 그때를 기억하는지 자체 방어시스템이 가동되는 듯하다.

Roofing in Sutton forest in 2018

이제는 지붕 위의 상황을 잘 알기에 만반의 준비를 한다. 선크림은 기본이고 선글라스, 창이 넓은 모자, 팔토시, 넥워머까지 태양빛을 차단할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전날 밤 냉동실에 얼음물을 여유 있게 준비한다. 지붕 철판 패널의 열기가 올라갈수록 나의 몸속의 열기 또한 같이 올라간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몸속으로 들어온 얼음물은 몸 안의 열기를 뺏어가며 36.5도의 체액이 된다. 빛은 가릴 수 있지만 오르는 열은 내려야 하는 법이다. 뜨거우면 식혀야 한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열기와 땀 그리고 근육에 가해지는 통증은 머릿속에 모든 생각들을 사라지게 만든다. 근심, 고민, 잡념이 들어올 틈이 없다. 나의 온몸의 근육 세포와 신경에서 전달되는 감각과 통증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건 내가 글을 쓸 때 느낌과 유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글을 쓸 때는 근육이 아닌 뇌 세포와 신경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순간에 나의 뇌는 과거와 미래로 인해 받던 현재의 고통(정신적)에서 벗어난다. 하나는 육체적 고통, 또 하나는 정신적 몰입(무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내가 깨달은 바로는 이 두 과정은 인간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 두 과정의 밸런스를 맞추고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Blue & White

블루 앤 화이트 (Blue & White)


육체노동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신노동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반대로 정신노동이 길어지면 육체노동은 줄어든다. 세상이 블루컬러와 화이트컬러로 나눠진 이유이다. 화이트와 블루를 섞으면 어떻게 되는가? 스카이 블루가 된다. 화이트보다는 블루에 가깝다. 스카이 블루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정신노동은 육체노동을 꺼리고 육체노동은 정신노동을 어렵게 한다. 낮동안 장시간의 육체노동에 시달린 몸은 곳곳에 열기를 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화가 난 근육은 정신의 몰입을 힘들게 한다.


이전에 읽은 책 (슬로우 싱킹)[서평참조]에서도 언급했지만 몰입(무의식)은 긴장이 풀리고 근육이 이완된 상태에서 가능하다. 해마 속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위해 뇌의 시냅스(신경)들 간에 빠르게 신호를 주고받으며 몰입을 해야 하는 순간에 근육 신경들에서 찌릿하고 화끈한 통증들이 남아있다면 뇌신경의 정보전달에 집중할 수 없다.


나 또한 목수일을 할 때는 정신적으로 몰입하며 글을 쓰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낮에 장시간의 육체노동은 근육에 젖산이 쌓이게 하고 그로 인한 근육의 피로는 정신의 집중을 방해한다. 그래서 일과 이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다. 책상에 앉아 가만히 집중을 하려 하면 근육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들과 밀려오는 피로감에 뇌가 멍해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몸이 몰입보다 휴식을 필요로 한다. 몸이 정신을 지배하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 일을 마치고 집에 오신 아버지가 저녁만 드시고 나면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Writing in Quiet time


그래서 목수일을 할 때는 새벽 일찍 일어나 글을 쓴다. 하지만 건축 쪽 일은 대부분 이른 아침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만약 아침에 읽고 쓰려하면 짙은 어둠이 깔린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과거 소설을 쓸 때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씩 글을 쓰곤 했다. 그래서 일찍 잘 수밖에 없다.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뇌는 작동하지 않는다. 잠과 뇌활동이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여러 권의 뇌과학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숙면으로 인해 근육의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고 맑은 정신으로 집중이 가능해진다. 문제는 몰입이 한참 진행될 때 집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아쉬움을 남긴 채 몰입에서 강제 로그아웃을 해야 한다. 그렇게 블루컬러는 정신 집중(몰입)의 시간을 온전히 가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 다른 일을 하게 되면서 한동안 오전 시간을 온전히 읽고 쓰는데 할애할 수 있었다. 그때가 너무 감사하고 그립다.


주경야독(晝耕夜讀)


과거 우리나라는 유학(儒學, 유교)의 영향을 받아 아직도 선비정신이 몸에 배어있다. 그래서 우리네 부모들은 어떻게든 자식들을 공부시켜 몸으로 일을 하며 먹고살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건 아마 우리 조상들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밸런스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몸을 쓰며 일을 하는 자들이 글과 생각의 세계에 머물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경야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해내는 자들은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과 노동


하루에 1~2시간 정도은 숨이 찰 정도로 뛰거나 걸으며 유산소 운동을 하고 적당한 근력 운동을 하는 것은 뇌의 활동을 촉진시킨다. 운동이 뇌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미 뇌과학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나 또한 운동을 하고 나면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에 몰입이 잘 되는 경험을 자주 하곤 했다. 그래서 항상 이른 아침 혹은 저녁에 운동 후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이 운동이 7~8시간 지속되면 이건 운동이 아닌 노동이 되어 버린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뭐든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한 법이다. 땀 흘리는 노동이 절대 운동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장시간의 육체노동은 뇌활동을 저하시킨다. 뇌는 몰입이 아닌 휴식을 요구한다.


웃긴 건 과도한 육체노동 뒤에도 운동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육체노동은 보통 불안정한 자세와 반복적인 패턴으로 몸의 패턴을 망가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 후 운동(스트레칭, 유산소)으로 몸을 교정하고 바로 잡아주는 운동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의 유효기간이 줄어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말한 [도마복음] 속 말씀이 와닿는 이유는 이 고생스러운 노동과 함께 하는 삶이 생동감 있는 글과 생각의 원천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을 통해 삶을 재발견하는 과정이다.


우리 대부분은 매일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노동 속에서 고통받기도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그만큼 노동은 인간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은 보통 관계를 포함한다. 사회와 직장 그리고 조직에서 다른 이들과 이해관계에 얽혀 노동을 하다 보면 인간의 천태만상(千態萬象)을 경험할 수 있다. 노동을 통해 삶을 배우는 과정이다. 여기에 배움을 통한 생각의 확장과 표현력이 더해지면 깊이 있고 감동적인 것들이 탄생할 수 있다. 삶 속에서 우러나온 생각의 표현은 많은 이가 공감하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 또한 땀 흘리며 힘들게 일하던 시기에는 비록 읽고 쓰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그때의 글은 삶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감성적인 글이 써지는 것을 경험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몸이 편안한 시간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글이 몸이 고된 시간에는 감성적이고 감동적인 글이 잘 써진다.


벌고 쓰고 아니 읽고 쓰고


노동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노동은 생각이 피어날 여유를 주지 않음을 이곳에서 블루컬러로 살면서 여실히 경험했다. 그래서일까 블루컬러의 삶이 몸에 끌려가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고된 노동의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휴식이 아니면 물질 혹은 정신적 유흥과 쾌락을 찾게 된다. 자본주의 세상은 그렇게 인간이 벌고(소득) 쓰는(소비) 것을 반복하며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그런 분들을 적잖이 보아왔다. 이곳 호주는 블루컬러들의 벌이가 좋다. 돈은 써야 제맛이다. 벌고 쓰고 즐기는데 쓰는 시간은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간과 멀어지게 한다. 나 또한 한국에 있을 때는 주중에 받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 주말이면 불나방처럼 오락거리와 유흥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매주 주말만을 기다리며 살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이런 많은 유혹 속에서 생각하고 표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은 놀거리도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다. 유혹이 너무 많다.


"일이 많아서 저녁에도 주말에도 일해야 되겠는데..."


한국에서의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삶은 일하는 시간 이외에는 읽고 쓰는 시간들로 채워졌다. 돈이 좀 생기면 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에게 더 많은 시간 일을 하길 요구했다. 하루종일 일을 했는데 밤에도 주말에도 일할 수 없냐고 물었다. 한국이었다면 또 군말 없이 입 닫고 일을 했을 것이다. 그게 배려이며 타인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손에 무엇이라도 가진 자는 더욱 받게 될 것이요, 2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는 그가 조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

- [도마복음 41장] -


1 Jesus said, "Whoever has something in hand will be given more, 2 and whoever has nothing will be deprived of even the little that person has. "

- Thomas 41 -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배려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돈을 주고 타인의 모든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능하다. 그게 자본주의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을 바꾸는 것이 바로 노동 아니던가? 산업자본주의는 노동에 기초한다. 하지만 이걸 제한하지 않으면 가진 자들은 못 가진 자의 모든 시간을 가져갈 것이다.


돈에 대한 욕망에 끌려 시간을 헌납하고 부자가 되려 하지만 부는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헌납한 시간은 헌납받은 사람의 부를 더욱 늘리는 형세다. 자신의 노동만으로 부를 늘리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임을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부는 축적이 아니라 증식이다.


이젠 일(노동)로 인해 읽고 쓰고 생각하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에 분노한다. 일도 계속 증식한다. 그렇게 노동이 삶을 잠식해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돈으로 그것을 보상받는다 생각하며 자신의 시간을 돈과 바꾸는 삶이 당연하다 생각하며 살아간다. '돈 벌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시간당 30불 40불 50불 60불로 올라가는 쾌감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럼 결국 돈으로만 자신의 가치를 매길 수밖에 없다.


단순한 삶 그리고 다양한 생각


이곳에서의 땀 흘리고 일하며 공부(읽고 쓰는)하는 단순한 삶이 나의 생각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복잡 다양한 세상에 살 때는 나의 생각은 오히려 단순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삶 속에서 다양함을 발견하고 다양함 속에서는 단순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은 삶을 질식시킨다."

- 알베르 카뮈 -


이제 창 밖 하늘에 점점 붉은 기운이 감돌며 동이 트려 한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고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할 시간이다. 고요한 새벽에 글을 쓰며 몰입할 수 있는 시간에 감사한다. 이 시간을 통해 내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루하루가 기대되고 현재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삶을 발견할 것인가...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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