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이기적인 동물이다"
아바타2를 보고 난 후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영화는 마치 과거 대항해 시대를 떠올리게 만든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영화는 그 역사의 무대를 지구에서 가상의 행성(판도라)으로 바꾸었을 뿐 과거 인류가 저질렀던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 아마 감독(제임스 카메론)은 그 인간의 과오의 판타지 속에서 새롭게 재현하려 했을 것이다.
인간이 재앙이다
과거 신대륙을 찾아 약탈과 침략을 일삼던 인간은 이젠 무대를 옮겨 새로운 행성에서 침략과 약탈을시작한다. 인간은 과학 기술을 무기삼아 또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 한다. 자원이 고갈되고 자연이 황폐화된 지구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자신들의 소유인 것 마냥 죽이고 채굴하고 변형하고 그러다 쓸모없어지면 버린다. 인간에게 자연은 자연스럽게 쓰고 버리는 존재이다. 인간이 발 디디는 곳은 모두 황폐화된다. 인간은 신처럼 굴지만 사실 악마에 가깝다. 인간이 사라지면 모든 다른 생명들은 살아난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수많은 생명을 잃었다. 비통하고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 것이다. 다른 동식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자연은 인간이 죽어가는 동안 숨쉬는 시간을 가졌다. 인간이 찾던 자연 휴양지에는 쓰레기와 오물들이 사라지고 야생동물들을 다시 찾아들었다. 뿌연 미세먼지와 매연으로 뒤덮였던 하늘은 인간이 경제활동(생산과 소비)을 멈춘 시간동안 푸른 하늘을 되찾았다. 인간에게 팬데믹은 죽음의 시간이었지만 자연에게는 다시 숨쉬는 부활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수많은 생명을 잃었다. 비통하고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 것이다. 다른 동식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자연은 인간이 죽어가는 동안 숨쉬는 시간을 가졌다. 인간이 찾던 자연 휴양지에는 쓰레기와 오물들이 사라지고 야생동물들을 다시 찾아들었다. 뿌연 미세먼지와 매연으로 뒤덮였던 하늘은 인간이 경제활동(생산과 소비)을 멈춘 시간동안 푸른 하늘을 되찾았다. 인간에게 팬데믹은 죽음의 시간이었지만 자연에게는 다시 숨쉬는 부활의 시간이었다.
신대륙으로의 이주, 개척인가? 약탈인가?
두 가지 인류 - 자연인과 문명인
대항해 시대 서양은 좁디좁은 유럽대륙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뻗어나갔다. 그들은 화포와 화약총을 앞세워 새로운 자원과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아메리카, 호주 등지로 뻗어나갔다. 그들은 돈이 되는 것들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빼앗고 가져갔다.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제거해 나갔다. 그들에게 보이는 모든 새로운 것들은 약탈과 살육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 속 나비족(숲) 그리고 멧케이나족(바다)은 과거 지구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던 토착 원주민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다른 동식물처럼 자연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들에게 자연은 교감과 감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고 채집하며 그때 그때 자연이 주는 열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과거 우리는 그들을 야만인 혹은 미개인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무시했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우리보다는 그들이 지구와 더 어울리는 존재였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자연인인가? 야만인인가? 또 하나의 인류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였다. 이들은 자연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산업발전에 필요한 것들을 착취해 내는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들은 무한히 주는 자연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그것들이 무한할 거라 생각했다.
산업발전 통해 편리와 풍족을 맛본 인간은 더 편하고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들고 다 쓰지도 못할 것들을 만들며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켰다. 살아 숨쉬는 자연의 만물들은 인간의 손에 숨죽은 쓰레기가 되어 쌓여간다. 땅위에서 시작된 착취와 고갈은 이제 과학기술의 힘을 통해 바다로 이어진다. (과거 땅위의 거대 동물들이 멸종한 것은 모두 인간의 살육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땅 위에 덩치 큰 동물치고 보호동물이 아닌 것이 없는 이유이다. 그 살육은 다시 바다 속 해양동물에게도 이어진다.)
지구의 종말과 또 다른 지구의 운명
생명이 숨 쉬지 않으니 순환의 고리는 끊어지고 지구의 자정 작용 또한 한계를 드러낸다. 기후변화, 그 재앙이 이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한번 끊어진 자정 고리는 처음에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진행되지만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엄청난 파급효과를 발생시킨다. 오랜 시간 진행된 오염과 파괴는 복구가 불가능해진다. 자연 깊숙이 침투한 오염과 파괴는 마치 전신에 퍼진 암세포와도 같다. 이젠 살리는 건 불가능이다. 다만 그 시간을 연장하는 항암치료만 가능할 뿐이다.
호주 산불 - 기후 변화 살릴 수 없다면 대체제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것이다. 인간을 잘 아는 인간은 인간들이 스스로 욕망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걸 일찌감치 깨달은 자들은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발이 닿는 곳은 또 다시 지구와 같은 절차를 밟고 황폐해짐을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근본적인 변화(인간의 본성)가 불가능하기에 능력(과학)과 환경(또 다른 행성)의 변화로서만 그 인류의 존속을 이어간다.
영화 속 인류는 황폐화된 지구의 결말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다.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 또 다른 지구를 만드려 한다. 그리고 또 그 행성이 지구와 같은 결말을 맞이할 때쯤 또 다른 곳을 옮겨가며 똑같은 짓을 반복할 것이다.
종말의 근원은 어디서...
그럼 이 지구가 또 다른 행성이 종말로 향해 가는 시나리오의 근원은 무엇일까? 문명인이라 불리는 우리와 아바타 속 나비족 혹은 과거 토착 원주민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나는 단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건 물질에 대한 욕망이다. 파괴와 착취를 통해 더 가질 수 있고 그것이 더 우월해지는 것이라 믿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농경의 시작 = 잉여생산물 탄생 나비족이나 원주민들은 식량을 쌓아놓고 먹지 않는다. 그때 그때 필요한 것을 얻고 그것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잉여생산물이라는 개념이 없다.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낸 농경사회에서 부터 인간의 물질에 대한 이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농경지를 만들기 위해 숲을 불태우고 산을 깍으면서 자연은 일부 식물(지구에게 필요하지 않은, 불필요하게 과다한)들의 생육을 위해 지구의 대기의 순환과 온도를 책임지는 숲의 울창함을 희생해야 했다.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 브라이언 클라스 [권력의 심리학] 중에서 -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상대적 빈부라는 비교 개념을 만들내었고 더 가지는 것이 부러움을 대상이 되고 부러움은 더 가진 자에게 힘(권력)을 쥐어줬다. 권력은 시스템(법과 체제)을 만들고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럼 자신이 더 가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무소불위의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권력은 시간을 먹고 부패하는 존재이다.
과학은 권력을 유지한다
권력,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과학기술이다.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과학기술은 생산성 향상이라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과학기술은 어떻게 하면 자연을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활용(소모)할 수 있는지를 고심한다. 생산성의 개념이 바로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임으로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자원을 자연으로 부터 분리하고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원의 소모 속도가 바로 재화의 생산 속도와 비례하게 되어 있다.
과학 기술, [아바타 2] 중에서 결국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잉여생산물의 개념을 알게 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잉여생산물은 비교 욕망을 만들고 물질에 대한 욕망은 발전을 더욱 부추긴다. 부는 권력을 안겨주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발전을 거듭해야한다. 그렇기에 과학기술발전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새로운 상품을 개발을 통해 지속적인 경제성장(GDP 성장)을 이끌어 내야한다. 먹고 사는 것이 예전같이 못하면 국민은 권력을 탓하며 권력을 뒤집어 엎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역사적으로도 권력은 그런식으로 무너졌다. 잘먹고 잘살면 즉 물질적 풍요는 권력을 유지시켜준다. 결국 욕망의 굴레는 계속 자연을 파괴하는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쓰기 위해 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시시각각 발전하는 제품들과 서비스들 속에서 눈만 감았다 뜨면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어느새 구식이 되어버린다. 지금 쓰고 있는 것도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 새 것을 원한다. 새것인데도 더 새것이 생김으로 구식이 되어버린다.
더 빠르고 더 예쁘고 더 효율적인 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소비한다. 우리는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 빨리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서 자본(돈)을 벌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제는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더 많은 소득을 벌기 위한 노동의 굴레를 이용한다. 이것이 산업자본주의가 존속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왜 인생의 대부분을 노동에 시간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혁신(기술)의 딜레마
기업은 대중의 소비심리를 자극하려 끊임없이 기술혁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인류는 기업의 혁신을 통해 수많은 발전과 성장을 이룩했다. 기업은 혁신을 위해 노동자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더 많은 인센티브와 프로모션으로 노동의 시간과 강도를 높이고 혁신을 이뤄낸다.
"혁신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특별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것 일뿐이다."
- 시라이 사토시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에서 -
기업들은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앞다투어 기술혁신을 반복하며 쳇바퀴에서 낙오되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그 쳇바퀴 위에는 뛰고 있는 것은 다람쥐가 아니고 바로 우리다. 혁신의 질량은 행복의 질량에 비례하지 않는다. 어쩌면 반비례 일지도 모르겠다. 왜냐 그동안 산업과 과학은 수많은 혁신을 일궈냈지만 인간이 그 만큼 더 행복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 졌다.
노동 [이삭줍는 여인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 [창세기 3:17~19] -
성경 속 창세기에도 노동을 얘기한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 땀 흘려 일해야만 하는 노동이라는 굴레를 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과거 수렵시대에는 하루 3~4시간의 노동(사냥, 채집)으로 삶을 영위했다. 왜냐 자급할 수 있는 식량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먹거리와 의식주 생활을 영위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비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또한 비만이 초래하는 수많은 질병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나머지(한가로운) 시간 그들은 서로 간의 유대와 신과 자연과의 영적인 교감(아바타 속 에이와[Eywa] 신과의 교감) 혹 그들만의 예술 세계 속에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자연과 신과의 교감, [아바타] 중에서 하지만 농경사회로 옮겨 오면서 인간의 삶은 변했다. 한 곳에 머물며 논과 밭에 얽매혀 살기 시작한 것이다. 씨를 뿌리고 때 되면 잡초를 뽑아야 하고 물을 대고 벌레들을 없애기 위해 농약도 살포하며 해마다 농사 걱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식물에게 얽매여 사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농작물의 생육을 위해 인간이 구속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대가로 인간이 얻은 것이 바로 잉여생산물이었다. 다 먹지도 못하는 잉여 식량이 생겨난 것이다. 보관이라는 개념이 없던 인간에게 곡간이 생겨나고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품 가공기술이 발전한다. 김치나 치즈 같은 발효식품이 바로 그런 것이다.
"돈을 많이 벌고 싶으세요? 그럼 더 많이 일하셔야죠!"
얼마 전 목수일을 할 때였다. 인테리어 회사 입사 전 인터뷰를 했다. 사장과 근로계약서에 하루 10시간 주 5일을 근무라는 것에 확답을 받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듯이,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행동하는 것이 사람 아니냐는 십몇년간 들어왔던 말을 또 다시 들어야 했다. 융통성이라는 말은 참 듣기 좋은 말이다. 하지만 융통성은 원칙에 반하고 원칙은 융통성을 허용할 수 없다. 자신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느냐이다.
물론 융통성을 요구할 순 있다. 하지만 먼저 양해를 구하고 거기에 따른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당연하게 요구하고 그것이 당연시되고 스리슬쩍 어느새 그것이 의무화 되는 것이 꼴보기 싫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해왔던 내게 또다시 맞이한 그런 상황이 나의 신념과 의지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바쁘면 더 일하고 더 생산해야 한다는 논리는 언제나 옳은 것이고 정당한 요구였다.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인간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위배되는 인간으로 낙인 찍히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려면 더 많은 시간 일하는 게 아니고 시간당 단가를 올리던지 아니면 다수의 사람이 내 일을 대신 하게 만드는 거 아닌가요?"
"...."
일은 효율적으로 하라고 하면서 나는 왜 비효율에 머물길 바라는 걸까? 나는 돈을 벌어서 시간을 산다. 가장 어리석은 방법으로 돈을 번다. 그것도 단가가 낮은 임율(Labor cost)로 말이다.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맞지 않고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소명)이 아닐 뿐이다. 하지만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단 한가지 이유는 내가 온전히 나를 위해 혹은 다른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함이다. 세상 속에 살되 세상에 구속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가 내게 했던 말은 나를 언짢게 했다. 이상하게도 인간는 자신보다 시간당 임율이 낮은 직업 혹은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업신여긴다. 경제적 금전적 능력을 인간 가치의 높고 낮음으로 오인하며 살아간다. 그렇지 않다면 욕설 섞인 무례한 언행을 함부로 일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급여를 주고 자신보다 임율이 높은 자에게는 무례함을 견디면서 말이다.
가격이 없다는 건 가치가 없다는 것
우리는 타인보다 시간당 단가가 높거나 혹은 나의 돈을 받고 노동력을 공급하는 사람에게는 왠지 모를 우월감을 가지게 된다. 그 우월감이 자신이 지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도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세상 모든 것을 화폐(돈)와 교환가능한 상품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산하려 한다. 심지어 생명도 상품이 되어 한 명당 2억원 사망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처럼 가격이 매겨져 있다. 가격이 없는 것은 없는것이나 다름없다.
포기된 가치의 가치
우리는 돈을 많이 버는 연예인, 유명인들을 우러러본다. 그들이 인성이 바르고 선하기 때문에 그들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가진 한 가지 혹은 몇 가지 특출난 능력에 의해 남들보다 시간당 단가가 엄청 높다는 이유 뿐이다. 하지만 물론 그 전문화된 능력을 위해 들인 노력과 인내에 대해서는 높이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위해 포기한 대가에 대해서는 왜 간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를 위해 다른 여러가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왜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일까.
왜 시간은 24시간 동일한데 한 가지에 올인해서 시간당 단가가 높은 인간만이 우월해지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왜 의구심을 가지지 않는 것인가? 그 결과를 이 [아바타]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들이 일컫는 우월함이 황폐함을 가속화시킨다. 이제는 세상에 평범함이란 없다. 하지만 온전함은 필요하다. 치우치지 않는 인간이 자연과 어우러지고 인간과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왜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뭔가 더 뛰어나야만 성공이라고 얘기하는 것인가. 그렇게 자연과 인간을 황폐하게 함으로서 늘어나는 부유함과 탁월함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더 황폐하게 만들어 가고 있음은 왜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전쟁과 살육 "사람들의 간담이 녹고, 많은 사람이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내가 성문마다 살육하는 칼을 세워 놓았다. 번개처럼 번쩍이는 칼, 사람을 죽이려고 날카롭게 간 칼이다."
- [에스겔 21:15] -
자연을 소비하고 버리고 소비하고 버리는 인간이 더 이상 소비할 자원이 부족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때는 타인이 가진 자원과 식량을 빼앗아야만 한다. 자연을 죽이던 인간의 칼날은 이제 서로에게 향할 것이다. 그 전운의 조짐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인간은 그동안 누렸던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됨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불황이 계속되면 위험한 이유이다. 역사적으로 불황을 타개하는 인간의 유일한 방법은 전쟁과 침략이었다. 경제발전으로 부국이 되어 강병(富國強兵)을 이루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무너져야 재건된다. 과거 대항해 시대 또한 그 맥락의 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다.
영화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기후위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발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인간은 발전을 위해 자연의 희생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결과는 인간이 생각하는 발전이 결국 가져오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공멸이다. 자연이 파멸되고 인간에게 더 이상 파멸할 대상이 사라지면 서로를 파멸시키려 들 것이고 그 대상마저 사라지면 스스로의 존재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그럼 자멸한다.
이스터 섬의 역사
그 좋은 예로, 이스터섬의 역사를 들 수 있다. 이스터섬에는 인간의 두상을 한 수많은 고대 석상들이 발견된다. 또한 그곳에는 식인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과거 그곳에 살던 인간들은 비교 우월에 도취해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수많은 석상은 자신의 부족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상징이다. 당시 부족장들 사이에서 석상의 개수는 그 큰 돌을 나를 수 있도록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과 그 만큼 많은 자원을 가졌음 의미하는 것이었다. 권력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섬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서 그 석상을 해안가로 운반하는 운송수단으로 활용해야 했을 것이고 나무가 사라진 숲은 그들이 사냥할 동물과 채집할 식물을 사라지게 만들었을 것이고 식량이 떨어진 그들은 아마 바다를 통해 육지로의 탈출을 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모든 나무를 베어버렸고 배를 만들 나무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굶주림에 서로를 노려봤을 것이다.
모하이 석상 작은 섬에서 일어난 미개인들의 역사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좁은 공간 속에 짧게 압축시켜놓은 것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인간은 느린 변화에 둔감하다. 화상에는 바로 반응하지만 암세포에는 느리게 반응하듯이 말이다. 화상 입어 죽는 사람은 드물지만 전 세계 인간의 대부분은 암으로 죽는다.
3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동안 한글 자막도 없는 영화를 그렇게 집중해서 본 건 처음이다. 물론 화려한 3D 그래픽과 많은 신비한 볼거리도 인상적이었지만 감독과 연출자들이 영화 속에 담아내려 했던 메시지가 너무도 공감 갔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과거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판타지라는 비현실 속에 너무도 현실감 있게 그려낸 듯하다. 판타지도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판타지를 통해 현실과 한 발 떨어져 현실을 더욱 냉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자연스러운 인간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것은 발전하고 풍족할 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사랑할 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눈과 마음을 가지게 되면 비록 인간은 초라하고 원시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어쩌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인간다움의 정의는 자연스러움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자연과 인간의 분리가 결국 인간의 파멸을 가져왔다. 이제 자연스러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인위적인 것들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인간이란 원시적인 인간의 다른 표현 일 수도 있겠다. 원시적인 것을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은 계속 인간다움에서 멀어져 간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창세기 3:19] -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면 자연을 찾게 되는 인간의 본성은 결국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평생을 자연을 소모하고 파괴하며 살지만(무의식적으로 시스템 속에서 죄책감없이) 결국 자신도 자연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는 순간 돌아갈 자연도 사라진 세상을 보면서 후회할 날이 맞이할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자연에 감사하고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
인간만이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다.
만물은 생명이고 만물은 연결되어 있다.
사랑하자.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도 자연도...
자연 속에서... Blue Mountains
*특별 잉여가치 : 높아진 생산력으로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함으로써 얻는, 즉 혁신에 의해 획득되는 기한이 정해진 잉여가치이며 어느 상품이 가진 현재의 사회적 가치와 미래의 사회적 가치 차이에서 만들어진다.
-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중에서 발췌 -
Avata 2 인증샷 (half pr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