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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

by 글짓는 목수 Jan 12. 2023

글로 세상을 이롭게 하다

책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상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 Lewis -


글(쓰기)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래서 글쟁이(작가)들은 시작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창작물들은 글에서 비롯된다. 영감은 글로 옮겨지고 글이 기억과 상상을 융합해 그려지고 형상화되고 리듬화되고 영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초석인 것이다. 그래서 글은 항상 오리지널(Original, 원작)이 된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 C.S. 루이스

이곳 브런치에는 나를 비롯해 수많은 무명의 글쟁이들이 있다. 많은 분들이 금전적 대가나 상업광고 없이 글을 쓴다.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일상과 경험 혹은 상상을 표현하고 공유하기 위해 글을 쓴다. (물론 상업적 광고성 글을 쓰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상업적 광고성 글을 잘쓰는 것도 능력이다.) 그게 이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매력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자기 표현과 성찰의 좋은 수단이다.


유튜브나 인스타 같이 영상이나 이미지를 많이 올리고 조회수가 올라가면 금전적 대가(광고 효과)로 보답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계속 쓰는데는 돈보다 더 큰 가치를 있음을 알기 때문 아닐까. 서러워 말자. 이런 글쟁이들이 세상을 이롭게 바꿀 수 있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사실 요즘같이 이미지와 영상이 난무하는 세상에 글이라는 콘텐츠가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인간은 시각 정보에 정보에 너무도 취약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인간은 어찌 보면 망막에 재생되는 것만 보면서 세상의 진리와 숨겨진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눈은 우리를 홀리고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글은 우리가 스스로 시각 정보를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각본과 연출


같은 글을 이미지화 리듬화 형상화 그리고 영상화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건 같은 시나리오(원작)를 보고도 연출(표현)이 달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작을 원작자의 의도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은 원작자만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작자가 뛰어난 연출력(표현력, 여기서 말하는 표현력은 현대적 기술 혹은 기법을 이용한 표현력을 의미한다)까지 가지기는 쉽지 않다. 영상, 음악, 그 외 수많은 기교를 모두 다 갖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런 종합예술감각이 인정받는 시대이기도 하다. 봉준호, 박찬욱, 찰리채플린, 크리스토퍼 놀란, 왕가위등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각본(스토리텔링)부터 연출(예술감각), 감독(관계능력, 통솔력)까지 다 아우르는 그런 류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원작보다 더 원작 같은 (The Original beyond the Original)


사실 요즘은 원작보다 더 크리에이티브한 연출력이 더 인정받는 시대이다. 원작과 다른 연출로도 더 뛰어난 2차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  말 그대로 원작보다 뛰어난 원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원작(오리지널)은 무조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출자도 결국 원작에서 영감을 얻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성경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오래된 베스트셀러 원작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2차 3차 4차.... 창작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오리지널은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던져주고 이에 영감을 받은 수많은 작가, 연출가, 음악가, 예술가등에 의해서 더 발전된 기교와 표현방식으로 혹은 판을 뒤집는 해석(반전)으로 재현되고 또 재연되는 것이다. 그래서 원작이 많으면 창작의 세계는 더욱 넓어진다. 그래서 수많은 IT기업들이 이 오리지널 컨텐츠인 IP(Intellectual property : 지적재산권)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OTT 플랫폼

 사진과 비디오가 없던 시절에는 문자가 시각정보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이제는 영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보편화되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검색 엔진으로 구글이나 네이버가 아닌 유튜브를 활용한다고 하니 말 다했다. 글로 정보를 습득하는 시대에서 영상으로 습득하는 시대로 변했다.


특히 우리는 그림과 영상 같은 직관적인 시각 정보에 너무 쉽게 빠져든다. 특히 홍수처럼 넘쳐나는 영상 콘텐츠는 우리를 잠시도 그것에서 눈을 떼어놓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 중독성이 강하다. 빈틈을 주지 않는다. 요즘은 그런 중독성 있는 영상콘텐츠들조차 장시간 집중하지 못해 짧은 영상들로 압축 요약한 영상들이 대세를 이루어 가는 실정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뇌는 잠시도 멈춰 생각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아놔 뭐야 또 광고야? 한참 재밌으려 하니까"


이런 경험 있을 것이다. 과거 TV로 주말연속극을 볼 때면 가장 극적일 때 '다음 이 시간에 계속'이라는 문구를 남기고 일주일을 애태워야 했고 요즘은 유튜브 광고가 중간에 흐름을 끊는다. 그게 싫으면 돈을 더 내면 된다. 그럼 프리미엄 상품으로 끊김없이(생각없이) 볼 수 있다. 그 만큼 우리는 영상이 끊기는 것을 참지 못한다. 과거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 버퍼링을 기억하는가 그걸 소재로 버퍼링 개그(개그 콘서트 - 버퍼링스)도 만들어졌던 기억도 난다.

KBS 개그콘서트 [버퍼링스] 중에서

이건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는 시간의 통제권을 빼앗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글은 읽다가 멈출 수도 있고 행간에서 떠오르는 상념으로 잠시 사색에 잠길 수도 있으며 밑줄도 그을 수 있다.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나 문학을 읽을 때는 감동적인 장면을 머릿 속에 영상화(상상)하는 작업을 뇌가 수행하기도 한다.


영상은 시간에 흐름에 따라 긴박하게 흘러가는 줄거리를 따라가기 바쁘다.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정보성 영상 또한 따라하면 정확하고 틀림없고 오차도 없이 그대로 똑같은 결과물을 가져온다. 하지만 글은 그럴 수가 없다. 사람마다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이 말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획일화와 다양성


 우리가 영상으로 정보 습득에 익숙해지면 우리의 뇌는 획일화 또는 일관화 되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되어 온 산업화의 과정을 형태만 바뀐 채 재현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기계 앞에서 매뉴얼대로 획일화된 동작과 패턴을 반복하는 노동, 그것을 우리는 지난 200년간 지속해 오지 않았던가.


얼마 전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글로벌 빅 테크 기업(테슬라, 트위터, 스냅, 메타등)들이 대량으로 사람들을 해고했다. 내가 생각건대 이건 획일화된 IT노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즘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코딩을 배우느라 난리다. 코딩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이건 코딩을 모르는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ㄱㄴㄷㄹ, ㅏㅑㅓㅕㅜㅠㅡ, 가나다라마바사.... 하"라는 모음 자음 그리고 그 조합을 익히는 것이다.


이건 문자 체계를 습득하는 것이지, 문자에 포함된 의미 즉, 배움을 얻고 지식을 쌓으며 지혜를 얻는 과정이 아니다. 정보 인식 능력을 가진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가지고 태어났다. 다만 그 정보 인식 체계가 지역과 문화 그리고 언어(발성 방식과 시각화 방식=문자)에 따라 좀 다르다는 것 뿐이다.

빅테크 기업 대량 해고 [출처 :블룸버그]

나의 견해로는 그 글로벌 IT 기업 내에서 대량 해고의 희생자들은 단순 반복 코딩을 통한 머신러닝(AI) 코딩을 만드는 Raw(기초, 가공되지 않은)데이터를 구축 노동자(Labor)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머신러닝 시스템이 완성되는 순간 그 사람들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자리를 없애는 일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 또한 과거 기계들 사이에서 단순 반복 노동을 하던 사람들이 인권과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며 더 많은 급여와 더 적은 노동시간을 외치는 바람에 이제는 저비용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로봇팔과 다리들로 대체되어 버린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진 자들은 끊임없이 다양성과 창의성을 추구하며 가지지 못한 자들이 획일화와 숙련화 속에 갇혀 있길 원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계급을 유지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수단인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의 부재


요즘 같은 시대에 독서와 글쓰기는 쉽지 않다. 너무도 다양한 볼거리와 놀이가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하는 시간, 관계의 시간, 유흥의 시간, 잠자는 시간등으로 우리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서 새로운 생각과 창작의 시간을 반납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Reading and Writing

"사람은 바꿔 쓸 수 없다'는 말이 왜 우리에게 진리처럼 보편화된 것인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벌고 쓰고 노는데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리고 세상의 시스템은 인간이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얘기한다. 그게 바로 인생이라면서...


어쩌면 사회화된다는 것은 인간화 자연화 되는 것과 멀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문득 들기 시작했다. 결국 생각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만다.


벗을 수 없는 마스크


미세먼지로 마스크를 썼고 그 마스크는 이제 바이러스 때문에 다시 쓰고 마스크로 닫힌 입은 대화와 소통을 막고 감정을 들키기 싫어 피하는 눈빛은 더 이상 상대방을 이해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오해와 갈등 그리고 논쟁과 전쟁으로 서로에게 상처 주고 있지 않은가. 인간과 자연의 황폐화가 이렇게 진행되어 오는 과정의 시작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던 우리의 삶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읽고(습득과 사유) 쓰고(리마인드와 실천) 멀리 생각하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빼앗겼다. 그 잃어버렸던 시간들이 이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이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한 번 쓰기 시작한 마스크는 이제 벗을 수 없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의 얼굴(획일화된, 가면, 페르소나)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Mask

경제발전은 좋은 말?!


경제(經濟), 우리는 이 단어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임말이다. '다스릴 경 + 인간 세 + 도울 제 + 백성 민'의 합성어이다.  말 그대로 '인간을 다스려 백성을 돕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경제 발전의 결과는 '인간을 다스려 백성을 죽인다'로 바뀌고 있다. 인간을 획일화시키고 물질과 문명을 발전(많이 만들고 많이 쓰고 많이 버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씀)시킴으로써 자연과 인간성을 파괴하고 결국은 우리가 사는 지구를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얼마 전에 쓴 글(아바타2 리뷰 - 자연스러운 인간)에서도 얘기했지만 경제발전은 부국강병(富國強兵)의 또 다른 말이다. 나라를 부유케 하여 군사를 강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럼 군사를 강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군사는 전쟁을 위한 것이다. 타인을 죽이기 위한 물리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다. 서로가 파멸로 가는 길인 것이다.

War

우리는 왜 인간이 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이젠 신이 인간을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어 놓았고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는데 어느 정도 수긍을 한다. 이것이 내가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세상 만물 중에 이 복잡한 욕망이라는 것을 가진 유일한 존재를 신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경세제민)에서 인간을 다스린다는 말은 아마도 만물을 만든 신이 인간을 다스려 주어진 자연과 인간의 능력이 서로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일 거라 생각된다. 그러면 제민, 백성(일반인, 부와 권력을 가지지 않은 자들)이 온전히 인간답게 잘 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다.


내 글이 글(문자)에서 시작해 인간과 자연까지 너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잘 생각해 보자. 인간이 수억년(약 46억년)의 나이를 가진 지구를 이렇게까지 황폐화하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200~300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표현했을때 단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1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지구를 파멸로 몰아 넣고 있다. 나의 이 짧은 글에 비하면 훨씬 더 비약적인 과정이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내가 서두에 쓴 이 한 문장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모든 것은 글에서 시작한다. 생각도 행동도 예술도 그 모든 다양성과 변화도 모두 글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쓰면 쓸수록 더 깊고 넓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4년 전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고 지금까지 변해온 나의 생각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읽고 쓰지 않았다면 이런 변화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잃은 것이 있다면 그 시간 좀 덜 소유(소비) 한 것이고 좀 덜 먹은 것이고 좀 덜 만들어(물질) 낸 것뿐이다.


"틀린 '가격'이 우리에게 비싼 값으로 돌아오고 있다"

      - 타일러 라쉬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중에서 -


자연을 황폐화하며 더 먹우리들이 남긴 것은  피하지방과 내장지방이고 더 만들어서 늘어난 건 쓰레기이고 더 가져서 늘어난 건 탐욕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 많은 물질(쓰레기)과 지방(죽음으로)이 더 이상 쓸모 없어지면 부피와 질량(땅을 차지함으로)을 없애기 위해 태워질 것임은 자명하다. 아니면 묻힌다.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운동을 해서 지방이 안 쌓이게 하면 되지 않은가? 당신이 운동을 많이 하면 할수록 당신의 입과 코에서 나오는 것 또한 이산화탄소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 당신이 더 많은 칼로리를 소모하며 운동으로 태우는 지방은 나중에 한 번에 태울 양과 그 총합은 같다.)

Pollution

질량보존과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따라 모든 질량을 가진 물질은 형태가 바뀐 질량(고체, 액체, 기체)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열, 바람등)의 형태로 변화될 뿐 절대 사리지지 않는다. 그것들이 태워져서 지구에 남기는 것은 더 많은 온실가스(이산화탄소, 메탄등)가 될 뿐이다. 그것들이 모두가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앞당긴다. 우리 모두는 합당한 가격(돈)을 지불하고 모든 것을 쓰고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아닐 것이다. 왜냐 덜 지불한 대가가 더 비싼 값으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빌린 것을 되돌려주지 않으면 어디로 쫓겨날 곳이 없어 목숨으로 갚게 되는 것이다"


      - 타일러 라쉬 [두 번째 지구는 없다] 중에서 -


만들고(생산) 쓰고(소비) 버리는(폐기) 시간을 읽고 생각하고 쓰는 시간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과거 세종대왕님께서도 모든 백성들을 굽이 살피시어 모두가 읽고 쓸 수 있도록 하여 세상을 이롭게 만들고자 했다.


그 글들이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다.

The King Se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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