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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09. 2023

사랑한다는 흔한 말처럼...

사랑과 믿음에 관한 상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 [고린도전서 13:4~5] -


사랑(愛, LOVE) 이란, 사전적으로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 얘기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사전적 정의로는 사랑을 표현하기에 뭔가 허전함을 감출 수가 없다. 서두에 이 구절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디테일하게 표현한 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


사랑이라는 단어는 보고 듣는 것(대중매체)이 너무 친숙하다. 성경을 비롯해 수많은 책을 보면서 느꼈지만 여느 책을 펼쳐봐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책이 없을 정도로 사랑은 곳곳에 너무도 많다. 하지만 이상한 건 내 입으로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본 기억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건 비단 한국인뿐만이 아니다.


난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에서도 좀 살아봤지만 중국인도 '워아이니(我爱你)'라는 말을 실생활에서 쓰는 경우를 보긴 힘들다. 이건 일본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이시떼루(愛してる)‘라는 말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대놓고 쓰는 경우는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한국인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인이나 일본인 모두 '좋아한다'(중국 : 시환, 喜欢,일본: 스키데스, 好きです )는 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사랑한다'는 말이 어쩌다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이 되어버렸는지 안타깝다. 진짜 입에 담아야 할 말을 자주 하지 않고 담지 말아야 할 말들로 우리 입은 항상 바쁘다.


사랑 없는 인생 = 고해


불교에선 인생을 고해(海 : 고통의 바다)라고 표현한다. 그건 사랑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이 자리를 비우면 고통이 스며든다. 고통이 아니라면 권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인생고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인생의 대부분을 사랑 아닌 것들에 더 많은 관심과 시간을 쏟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시간을 떠올려 보라. 사랑에 빠지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그냥 입꼬리가 올라간다. 말 그대로 살맛 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해야만 하는 것다.


시련이 없이는...


얼마 전 교회에서 한 여성의 간증을 들었다. 그 간증이 사랑과 믿음에 관한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교회에 갈 때마다 나에게 가장 쏠쏠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 간증이다. 기독교에서 교인들이 사람들 앞에서 하는 일종의 신앙 고백 같은 것인데, 간증을 듣다 보면 사람들 마다 참 다양한 계기를 통해서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정말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많다. 인생극장이 따로 없다. 뭐 간증마다 경중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간증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시련 없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모태 신앙은 제외다. 뭐 그렇다고 부모가 신앙을 가졌다고 자동적으로 자녀도 신앙을 가지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어린 시절 내가 보아왔던 모태 신앙을 가진 친구들은 지금 대부분 신앙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신앙적으로 신실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시련이란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에 다가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신과 종교 그리고 신앙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믿음과 신앙도 사랑에서부터


누가 봐도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이제 갓 결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신혼의 깨가 쏟아지는 여성이었다. '뭐가 저리도 좋을까?' 처음 그녀를 봤을 때였다. 항상 눈과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특히 눈웃음이 매력적인 그녀는 이름은 몰라도 그녀의 밝고 환한 인상 때문에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교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존재감은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들 없이 표정만으로도 가능하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이건 어찌 보면 가장 하이클래스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월이 가면 얼굴에는 자신의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얼굴만 봐도 삶을 드려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웃어야 하는 건지도...


그녀와 이렇다 할 대화를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인상을 가졌다. 초승달 뒤에 숨겨진 그녀의 눈동자는 모습을 잘 드려내지 않는다. 입은 눈과 반대로 누운 초승달 모양으로 눈꼬리와 입꼬리가 언젠간 만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교회에서 적지 않은 남자들이 그녀의 관심을 얻기 위해 고배의 잔을 마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오래 참고 자신을 내어주네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주 보네

사랑은 절대 지지 않네♩♬

                                                                                

                              - Love Never fails 중에서 -


그녀는 오랜 시간 목자의 길을 걸으며 신앙을 지켜온 듯하다. 나도 옆에 지켜보지만 목자로 누군가를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하는 어려운 길이다. 그녀도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을 떠나보내며 적잖이 힘든 시간을 보낸 듯하다. 그만큼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녀의 사랑을 가져간 주인공은 그녀가 인내하는 시간을 옆에서 같이 인내하며 견뎌준 남자였다. 한국인과는 다른 피부색과 생김새의 홍콩계 아시아인 남자였다. 지금의 남편은 그녀의 목원(팀원)으로 시작해서 그녀의 반려자가 되었다.  그는 종교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인내를 가르쳤고 그 인내가 믿음을 만들어준 모양이다. 지금은 서로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아간다. 가야 할 곳이 같으면 동반자가 되지만 목적지(종착지)가 상대방이었다면 또 다른 목적지를 찾아야 한다. 사랑은 서로 오래 참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믿음 안에서 더욱 굳건해진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사랑은 홀로 서기엔 너무 순수하고 연약하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방패가 필요하다.

오 나의 여신님

오! 나의 여신님!


모태신앙인 친구들이 일요일이면 부모를 따라 교회로 끌려가는 바람에 그들과 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간 교회였다. 하지만 주일마다 교회를 계속 찾아가게 된 건 친구나 주님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자매님 때문이었다. 등 뒤에 반짝이는 십자가를 배경으로 서서 무언가에 심취한 듯 온유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한 여성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배경과 음향 효과 때문이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건 마치 IMAX 3D 영화를 보는 것처럼 경건한 분위기와 감성적인 음악이 시각적 효과를 더욱 부각해 몰입의 효과를 가져온 것과 같다.


 그래서였을까 과거 왜 그렇게 교회 오빠와 교회 누나 스토리가 많이 떠돌았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어쨌든 어린 마음에 생겨난 영화 같은 짝사랑은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주님 곁으로 인도하는 것은 예수 말씀도 목사 설교도 아닌 여신님의 미소였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당시 [오! 나의 여신님]이라는 만화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여신님을 보기 위해 매주 예배당을 찾았다.


"모든 남자는 아담의 한 부분이고 모든 여자는 이브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 박찬국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중에서 -


남녀가 사랑할 땐 콩깍지가 씌어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사랑 전과 후는 다르다. 그때의 남녀의 모습은 이기적으로 변한다. 아담과 이브가 사랑을 나눌 때는 아름다웠지만 그 이후에 둘의 모습은 서로를 탓하고 비난하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에리히 프롬은 '남녀사이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기만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잖은 시간 교회라는 공간에 있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교회 안에 미혼 남녀는 서로가 신앙을 가진 상대 혹은 배우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먼저인가 믿음(신앙)이 먼저인가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인다.


남녀 간의 사랑은 믿음 없이도 생겨난다. 남녀 간의 사랑은 다른 종류의 사랑과는 좀 다르다. 남녀 간에는 본능적인 끌림, 즉 성욕(Sex appeal)이라는 것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끌림이 없으면 남녀 간의 사랑은 좀처럼 시작되기 쉽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나도 믿음과 신앙이 없으면 주저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랑은 있는데 믿음이 없어서 혹은 사랑은 없는데 믿음만 있어서라는 웃지 못할 말들을 한다. 이건 뭐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둘 사이의 장벽을 극복하는 기적이 매일 새롭게 일어날 것이다."

                                                  - 박찬국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중에서 -


 사랑은 마치 원석과 같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원석이 없으면 보석을 만들 수 없다. 믿음과 신앙은 사랑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한 것이지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석을 보석으로 만드는 도구인 것이다.

원석과 보석

사랑이 우선이다. 과거 예수도 사랑하고 믿으라고 했지 믿고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다. 믿음 위에 사랑이 있는 것이지 사랑 위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종교와 신앙을 넘어선 범인간적인 가치이다. 이건 종교를 가리지 않는 불문의 진리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는 이것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세상 사람들은 쇼윈도 안에 놓인 완성된 상품을 고르듯 자신에 맞는 사람을 고르려 한다. 사랑과 믿음과 신앙을 고루 갖춘 그런 완벽한 상품을...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인인지 다시 한번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상대방을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사랑이 싹트면 사랑하고 미움과 시기가 싹트면 믿음으로 사랑을 지켜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사랑의 기적이 탄생하는 것이다. 과정 없이 사랑과 믿음을 모두 패키지로 한 번에 싸가지고 가고 싶은 것은 욕심일 뿐이다. 간편 맞춤식 사랑은 잠시 허기만 달래줄 뿐이다.

영화 [사랑을 놓치다] 중에서...

사랑한다는 흔한 말


사랑+사람=삶, 나는 삶의 공식을 믿는다. 사람이 사랑과 떨어져 살 수 없다. 그래서일까 두 글자는 마치 쌍둥이처럼 너무도 닮아있다. 그런데 사람은 있는데 사랑은 없는 삶이 많아진다. 그래서 삶(인생)은 고해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을 하지 못해서 사랑을 놓치며 살아간다. 사랑을 흔하게 말하고 실천해야 삶은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한다. 가족을 사랑하기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가족을 믿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무엇이 우선인지 확실하지 않은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13] -


사랑이 믿음을 만든다.

사랑한다는 흔한 말처럼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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