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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17. 2023

맹세하지 말라

예배당에서 떠오른 상념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 [마태복음 5:34] -


맹세(盟誓)란 일정한 약속이나 목표를 꼭 실천하겠다고 다짐함을 뜻한다. 비슷한 단어로는 약속이나 다짐을 들 수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나는 이 맹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린 시절 즐겨했던 게임 그리고 그 게임 때문에 읽게 된 [삼국지] 그 속의 주요 인물 유비, 관우, 장비 세 인물이 복숭아 밭에서 피로 나눈 도원결의가 생각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비록 우리가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을 때는 반드시 같이 죽겠다"던 그들의 형제의 굳은 맹세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도원결의(桃園結義)




오랜만에 주일 교회 예배당에서 들은 목사의 말씀이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성경구절에 이런 말이 있을 거라 전혀 생각지 못했다. 왜냐 항상 앞으로 나와 결단하고 맹세하라던 평소의 교회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 앞에서 맹세나 다짐을 잘하지 않는다. 그것이 만약 장기간 뒤 혹은 삶의 큰 변화가 필요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런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맹세나 다짐은 말보다 행동으로 조용히 실천하려 한다.


"결단하고 맹세하십시오 그래야 합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맹세하고 결단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약속하고 다짐하는 것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 수많은 맹세와 약속이 그대로 지켜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는 상대방이 나에게 약속이나 다짐 혹은 맹세를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지켜본다. 그런 맹세나 약속들은 왠지 모르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마 당시 당사자의 이기에 찬 표정과 분위기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여운을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그 약속과 다짐 혹은 맹세의 만기가 도래한다. 나는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도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상대방은 내가 그것을 까먹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 기억한다. 다만 구차한 핑계나 변명을 이상 듣고 싶지 않을 뿐이다. 세상에 이유 없는 변명이란 없다.


"올해 새로운 결심이 있습니까?"


새해가 밝았다. 다 같이 함께한 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이 없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결심과 약속은 내 안에 있다. 다만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다. 올해는 새로운 계획이나 다짐에 대해 글을 올리지 않았다. 며칠 전 그 새해가 밝고 올해의 결심을 글로 쓰다가 그냥 고이 접어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해마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계획을 글로 적고 올렸다. 그 말은 나의 계획과 결심들을 온라인상의 게시판에 불특정 다수에게 공표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는 의도치 않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The first sunrise 2023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예요"


아이들의 말은 어른들에게 울림을 준다. 한 아이의 말이 나에게도 울림을 줬다. 우리는 모두가 거짓말쟁이이다. 우리는 너무도 가볍게 말을 던지고 약속을 한다. 그리고 약속을 이행해야 할 때의 변화된 상황과 여건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이 거짓말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변화된 상황에 혹은 타인의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속 좁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었다는' 애처로운 표정 앞에서 화를 낼 순 없지 않은가. 맹세하고 다짐할 때 그 당당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어찌 보면 참과 거짓은 우리의 컨트롤 영역 안에 있지 않은 듯하다.  수많은 맹세와 다짐 그리고 약속들, 그것들을 참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닌 불가항력적인 무언가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맹세와 다짐 그리고 그 약속들로 아름다워지고 살기 좋아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야고보서] 4:14 -


 물론 새해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진행해 나간다는 것은 중요하다. 계획 있는 삶, 이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고 인간이 발전해 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계획이나 다짐 혹은 맹세가 없지 않다. 다만 남들 앞에서 쉽게 떠벌리지 않는 것뿐이다. 지켜질지 그렇지 않을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야! 네가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네가 확고한 의지가 있으면 당당하게 얘기해야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틀리지 않다. 다수에게 공표하고 결단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왜냐? 그 이후로 자신 스스로가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감과 그걸 알고 있는 자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시의 굳은 의지와 신념이 그때처럼 계속 지속되길 바란다면 오늘만 산다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게 쉽지 않다. 인간은 하루살이가 아니고 여러해살이 동물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였던 욕망은 여러 가지로 분화하면서 나를 채워가기 때문이다.


다수 앞에서 했던 그 다짐과 약속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다짐과 약속은 자신을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얽매이게 만들어 자신이 억지로라고 끌고가는 동력을 얻고자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겠습니다!"


올해도 많은 이들이 했을 맹세가 아닐까? 며칠이 지나고 금단현상이 찾아온다. 견디기 힘들다. 자신이 한 말이 자신을 찌른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찌르던 따가움이 아닌 힘든 삶에 대한 위로와 보상을 찾게 된다. 하지만 다수에게 한 말들 때문에 대놓고 위로와 보상을 찾을 수 없기에 음지로 숨어든다.


한국인들은 이런 것에는 특화되어 있다. 낮과 밤이 많이 다른 삶을 사는 종족이기도 하다. 한국의 밤(불야성, 不夜城)이 유난히 긴 이유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자신 안에 음과 양의 조화를 참 잘 이루고 사는 존재인가 하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선한 말과 행동들로 양지의 삶을 영위하고 밤이 찾아들면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쾌락과 유흥을 즐긴다.

 

"올해는... 사업이 잘 되게, 시험에 합격하게, 승진이 되게,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게...."


2023년의 새해 아침 혹은 2022년 마지막 밤의 끝자락을 잡고 수많은 이들이 기도하고 기원했을 것이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는 해마다 바다나 산을 찾아 새해 첫 일출을 바라보며 저런 다짐과 소원을 빌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햇살이 나의 시야를 환하게 밝히며 동공 안으로 쏟아지는 빛이 마치 올해는 그 모든 바람들이 이루어질 것 같은 설렘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한 해를 시작하곤 했다. 그 모든 바람과 소원은 모두 자신의 복을 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그 많은 기도가 그냥 기도에서 끝나버리곤 했다. 그리곤 내 노력이 부족했고 혹은 재수가 없었다는 핑계로 한 해가 끝나가곤 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곳에 내가 쓰이게 하세요, 전 그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같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나의 기도는 바뀌었다. 이런 기도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그래서 하는 일이 계속 잘 되지 않고 계속 막다른 곳에 부딪치게 되면 생각한다. '아~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구나'하고... 안 되는 일로 계속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것보다 이게 속 편하다. 노력해서 되는 일이 있고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일도 많다. 노력은 하되 그 결과에 수긍하고 그 결과가 계속 나의 의도와 다르다면 불가항력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소명(召命)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세상은 천편일률적인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을 보편화 평준화 시켜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을 찾는 것이 그만큼 힘든 것이다. 물론 그 길을 찾았다 해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만약 가야 할 그 길이 세상과 사회가 원하고 수많은 시선들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면 말이다. 먹고사는 일과 자아실현의 길이 동행한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의 삶은 고달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시대가 변했잖아, 그땐 그랬었지..."

"그땐 다들 그랬잖아, 이젠 상황이 달라졌지"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절대'라는 말은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인간은 항상 상대(相對)의 영역에 머물며 절대(絕對)적인 영역을 바라보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항상 입버릇처럼 '절대로 절대로'라는 말을 떠들며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신인 것 마냥 말하고 행동한다. 어제 했던 맹세와 약속은 절대였지만 나중에 벌어진 어그러진 상황에서는 상대적인 이유를 찾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누구 앞에서 쉽게 맹세하지 않는다. 왜냐 그 맹세가 내가 가야 할 길인지 아직 나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오로지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만이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존재에게 끊임없이 물어보고 또 물어보는 것이다. 답을 줄 때까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마태복음] 7:7 -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 Matthew 7:7 -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

Sw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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