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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Feb 26. 2023

사라지면 소중해진다

세대 간의 관계에 관한 상념

"음파~ 음파~"

 

이른 일요일 아침 수영장에 몸을 던졌다. 아침 날씨가 꽤나 선선해졌다. 수영을 하다 문득 나의 인간관계에 관한 상념들이 떠올랐다. 나는 수영을 하다가 마라토너스 하이를 넘어선 이후부터는 뇌가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팔다리는 계속 움직이며 뇌는 상념에 빠져든다. 이때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많이 떠오른다. 문제는 수영 중에는 글을 쓰거나 메모를 할 수 없기에 수영 이후 이 상념들이 날아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에 떠오른 상념은 놓치기가 싫어 수영 내내 그 생각만 하다가 샤워를 마치자마자 근처 카페를 찾아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상념의 시간 in water

  

새로운 인간관계 in Australia


내가 호주에 온 이후 맺은 수많은 인간관계를 들여다보는 동안, 문득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호주에서 맺은 인간관계의 대부분은 나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거나 아니면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동년배나 또래도 아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과의 교류의 시간보다는 어리거나 혹은 나이 많은 사람과의 관계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것이다.


또래들 (중년)


호주에 온 이후에도 또래의 사람들과도 적지 않은 만남을 가졌다. 그들은 내가 한국에서 있을 때 함께 했던 친구들과 지인들이 가졌던 고민과 걱정을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다른 세대들보다는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삶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서 그들을 이해하지만 더 이상 공감하긴 힘들어졌다.


이해와 공감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이해가 우선이고 그다음이 공감이다. 이해한다고 공감하는 건 아니다. 이해는 이성적이고 공감은 감성적이다. 이성은 항상 옳지만 차갑다. 감성은 허술하지만 따뜻하다. 이전에는 머리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삶이 주류였다면 이제는 가슴으로 느끼고 공감하는 삶이 커져가고 있다. 그래서일까 또래들의 삶을 또다시 들여다보기 싫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은 사람들 (청년)


과거 한국에서는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청년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직장에서 신입으로 들어온 직원들도 10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나를 어려워했다. 신입사원이 중견 과장급 상사와 편하게 대화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나 또한 신입일 때 그러했다. 나는 그들에겐 대화와 공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회피와 경계의 대상이었다. 나는 업무를 지시하고 명령하며 그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었다. 회사 밖에서는 술을 사주고 밥도 사주며 내가 회사에서 걸어온 과거를 그들에게 주입시켜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중요치 않다. 나는 빨리 그들을 가르쳐 위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업무를 분산시키고 쳐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그들은 월급을 받는 이상 나의 지시를 따를 의무가 있었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일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야 10살 안쪽의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부장급이나 임원급이 아니라면) 회사 이외의 관계 또한 편안한 동년배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소중한 여가 시간까지 세대 차이를 극복하려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왜 굳이 내가 관심 없는 그들의 관심사를 들어주고 공감해줘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 어떤 이해관계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은 상하노소(上下老少)를 불문하고 그 누구도 나의 말과 생각을 들어줄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나 또한 그 어떤 것도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이나 명분이 없다. 더욱이 호주라는 한국과는 다른 환경 또한 한몫을 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완전히 평등한 대등 관계를 형성했다.(물론 다행히 존칭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불편했다. 내가 그래도 연장자인데라는 생각이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과 너무도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를 '꼰대'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나와 동년배들이 같이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는 요즘 제멋대로인 그들을 '어린 꼰대'로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 '꼰대'는 기성세대를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 단어그들에게도 역습을 가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나와 다른 상대를 이해하려기 보다는 비난하는 것이 더 익숙하다. 이해는 어렵지만 비난은 쉽다. 쉬운 길을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과거 수십 년간 몸에 베인 습관이 한순간에 변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내가 인생을 더 살았기에 그들보다 아는 것이 좀 더 많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너무도 다변화 다양화 되었고 각자가 보고 배우고 느끼는 것 또한 너무도 다르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계속 직장 생활을 했더라면 비록 나의 10년 전이지만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지금의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면 대등해진다


대등한 관계로 그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다 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해해야만 하는 많은 상황들과 마주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내가 지위와 권력과 부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이것들을 가졌다면 나는 그들의 생각을 굳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간과 노력보다는 그것들을 이용해 나의 생각과 의견을 그들에게 주입해서 나의 목적을 관철시키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썼을 것이다. 그러면 더 많은 지위와 권력과 부를 쌓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결국 관계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10년 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실히 느꼈다. 이해관계 속에서는 진정성 있는 관계 형성이 쉽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쉽진 않지만 받아들이는 시간이 나에게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나를 보며 그들과 다른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길 기대해 본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오래 산 사람들 (노년)


재작년쯤이었다. 코로나19가 한참이던 때 들어간 어느 복층 하우스(단독주택)에는 할아버지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나 또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그들이 바라본 나는 아기였다. 요즘은 경로당에서는 환갑은 아기 대접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럼 난 신생아인가? 60대 70대 80대 할아버지들과 이제 갓 마흔의 신생아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시작부터가 난관이었다.


"야! 이 자식아! 밥을 했으면 밥솥에 밥을 뒤집어 놓아야지 안 그러면... 설거지를 했으면 물기를 다 닦아놔야지... 냉장고에 소주는 왜 여기로 옮겨놨어?"

"제가 음식을 보관할 곳이..."

"야~ 새끼야~! 여긴 원래 다 내가 쓰던 데야!"

"그럼 저는... 어디에.."

"어디서 말대꾸야! 꽝!~"


거실이나 부엌에서 마주치면 항상 잔소리를 하는 60대의 할아버지는 정말 말 안 통하는 아이와 같았다. 우락부락한 생김새만큼이나 성격도 우락부락했다. 나에게 잔소리를 퍼붓다가 본인이 더 화가 나서 폭발하는 그런 류의 아이어른이었다. 그 화못 이겨 결국에는 손에 집어든 무언가를 냅다 바닥에 집어던지며 잔소리에서 폭언과 폭력으로 이어질 연결 고리를 찾는 듯했다. 그럼 나는 마주하던 시선을 내리깔고 연신 '죄송하다'는 말로 그 상황을 모면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그분이 계실 때는 웬만해선 거실이나 부엌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 할아버지는 용접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돈은 꽤나 버시는지 항상 나에게 자신이 한주에 얼마를 벌고 어디에 집이 몇 채 있고 자식들은 의사 잘 나간다고 하며 자랑을 하시는데 왜 이런 셰어하우스에서 홀로 사시는지는 얘기하지 않으셨다.

 

70대의 할아버지는 타일일을 하시는 조용조용하신 분이었는데... 항상 저녁식사로 살몬(연어)과 삶은 수육을 즐겨드시는 분이었다. 항상 4인용 식탁에 홀로 앉아 소주나 와인을 한잔씩 하시며 저녁을 드셨다.  간혹 그 분과 시간이 맞아 식탁에 앉아 그분이 드시는 살몬과 수육을 얻어먹을 때면 나에게 '망할 놈의 좌빨' 이야기를 하시면서 본인 즐겨보는 정치성향 유튜브를 보여 주시며 한국이 엉망이라며 나에게 끊임없이 알고 싶지도 않은 정치 얘기를 하셨다. 그 조용하신 분도 정치 얘기만 하면 얼굴 가득 흥분과 분노가 일어나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렇게 한국 정치에 관심이 많으시면 한국에서 살면서 투표도 하시고 정당활동도 하시면 될 텐데 왜 여기서 홀로 처자식과 떨어져 사시는지 참 모를 일이다.


80대의 할아버지는 나보다 한 달쯤 늦게 들어오신 분이었는데... 80대라고 보기에는 겉으로는 상당히 정정해 보이셨다. 그분은 태즈메이니아에서 살다가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내시고 자식들이 살고 있는 시드니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펜션(연금)을 받으며 그 돈으로 생활비와 셰어비를 충당하시는 모양이다. 그분은 건망증이 심하셨다. 가스불을 얹혀 놓고 이층 방에 올라가셔서 깜빡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내가 가스불을 끄곤 했다. 그는 밖에서 뽕나무 가지였나... 하여튼 무슨 가지들을 꺾어와서 자주 물에 삶곤 하셨다. 그 삶은 물이 몸에 좋다며 나 보고도 마셔보라고 했다. 매주 그것들을 삶다가 집을 홀라당 태우지나 않을지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셰어하우스에 들어온 이후로 밤이면 종종 그의 방에서는 알 수 없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의 방이 나의 바로 윗방이라 나는 밤에 그 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곤 했다.


어느 날 그 할아버지가 내가 목수 일을 한다는 걸 알고는 석고 보드랑 빠데 도구가 있냐며 물으셨다. 그리곤 나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가서 부서진 벽을 보여주고는 벽을 고쳐주면 안 되겠냐고 했다. 도대체 밤마다 뭘 하시길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일까? 아직도 의문이다.


그는 종종 냉장고 안에 있는 갖은 식자재로 요리를 하시고는 나를 불러내어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그 식자재를 아직도 자신이 사 온 걸로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는 베트남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계셨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고 한다. 전투병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군대에서 각종 식자재와 현지 물품을 조달하는 일들을 했었다고 한다. 거기서 아리따운 베트남 여성과의 러브스토리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호주에 정착하시고 난 후로도 자주 베트남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베트남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 하필 마지막으로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 코로나가 터져 국경이 닫히는 바람에 오랫동안 베트남에 발이 묶여 간신히 호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월남전이 끝나고 뱃사람이 되어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의 삶은 너무도 다이내믹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할아버지들과는 달리 얘기를 들어준다기보다 듣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지곤 했다. 자세한 속사정을 알 순 없었지만 그는 아내가 떠난 뒤 시드니에 와서 변호사를 만나며 자식들과의 재산 문제로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때는 잘 나가는 아들 자랑을 하다가도 때론 서운함 마음을 토로하곤 했다. 참 부모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부모가 되보질 않아서...) 그 할아버지는 가스불을 켜놓고 깜빡하시는 일이 집주인아주머니에게 몇 번 발각되고 난 후 결국 나중에 셰어하우스에서 쫓겨나셨다.   


그들은 나이가 들고 친구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가족도 멀어지고 떠나가면서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홀로 방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들의 몸과 마음도 조금씩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나 또한 코로나로 일이 끊겨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 또한 스스로를 격리시켜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일과 사람과 멀어지며 자신만의 시공간에 갇혀 사는 느낌이랄까,


"똑똑똑! 어르신, 자장면 좀 만들었는데 같이 드시죠"


그럼 갇힌 사람들끼리라도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가끔 내가 음식을 만드면 어르신들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또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이제는 서로 얘기하시려고 다투신다. 60대의 아이어른이 말발이 젤 세다. 목소리 크면 장땡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할아버지들끼리도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데 하물며 내가 그들을 이해한다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해와 공감이라는 말은 그냥 '듣다' 혹은 '받아들임'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귀찮고 힘든 시간이었다. 입은 닫고 귀는 열어야 한다는 그 단순한 말이 행동으로 실천되기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까 그때 그분들과 함께한 시간이 잊히질 않고 계속 되뇌어지는 건 왤까? 나도 언젠간 그들처럼 늙고 병들고 가족과 친구들과도 멀어질 것이다. 그땐 나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물론 미래를 알 수 없지만 그때엔 나처럼 얘기를 들어줄 청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반년 남짓한 시간 그들과 함께한 셰어 하우스는 노년의 삶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뭐 해? 금요일인데 술 한잔 사 줄 테니 나와!"

"잘 지내? 네가 설치해 준 컴퓨터 화면이 안 나와!"


사정이 생겨 그 셰어하우스를 나온 뒤에도 가끔씩 그 할아버지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60대 할아버지는 잔소리와 푸념을 들어줄 술친구가 필요하셨고 70대 할아버지는 핸드폰 화면에서 즐기던 '좌빨 유튜브'영상을 대형 LCD 화면 감상하시다 간혹 HDMI 단자의 접속이 끊기거나 혹은 공항 가실 일(택시일을 했던 걸 아셔서)이 생기면 연락을 하셨다. 80대 할아버지는 연락이 없으셨다. 아마도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신 모양이다. 그분은 나에게 가장 잊히질 않을 이야기들을 남겨 주었지만 정작 그는 나와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잊히질 않을 추억을 남기면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 [마태복음] 5:38~42 -

                                                                                                   

어느 날 교회 예배당에서 눈에 들어온 구절이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를 가르치려 들고, 명령하고, 억압했던 자들과의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영원히 잊을 수 없지만 그들과 다시 재회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 악함, 추함을 모두 받아준 존재에게는 비록 그때는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계속 떠오르며 그리워진다. 우리가 아기로 태어나 연약함과 악함 추함을 다 드러낸 부모의 존재가 곁에서 사라지고 나면 그리워지고 눈물 나는 이유이다.


가장 소중한 존재는 사라져야만 그때 비로소 다시 찾고 간절해진다. 하지만 그 시절은 다시 올 수 없다. 예수는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하고 영원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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