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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02. 2023

신앙은 관계이다

삶을 공부하면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어느 날 저녁 사람들과 모여 앉아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독교에서는 신앙에서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관계라는 것이 신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신과의 관계는 상당히 개인적인 부분이라 제쳐 두고라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기독교에서는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요즘 시대의 흐름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은가? 개인주의가 만연해가고 있는 사회에서 사람들과 많 관계를 맺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산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시대가 흘러갈수록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수와 붓다


관계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의 특성 때문에 과거 기독교가 부흥하고 성행하는 시기를 겪었지만 지금 기독교가 외면받고 쇠퇴해진 것 또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수와 붓다의 삶을 들여다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두 성인의 삶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석가모니(붓다)와 예수

 붓다(석가모니)는 왕족 출신으로 이미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진 왕자였다. 그는 백성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출가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오랜 시간 수행(명상, 사색, 몰입)의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 얻고 다시 속세로 내려와 대중들에게 설법을 전달하며 중생을 구제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만들고 불교를 창시했다.


붓다의 이 두 가지 과정에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나눠진다. 개인의 해탈이 우선되는 소승불교와 중생의 구제가 우선되는 대승불교, 전자는 홀로 되는 시간이고 후자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절(사찰)이 대부분 산(수행을 위해)에 있고 교회는 대부분 마을(관계를 위해)에 위치한 이유이다. 인간이 수행의 과정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유혹이다. 불교는 유혹에서 벗어나려 했고 기독교는 유혹을 극복하는 것을 선택했다. 붓다는 관계에서 벗어나 있었고 예수는 관계 속에 머물러 있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표현하면 전자는 신과 자신과의 관계(수직적)이고 후자는 이웃과의 관계(수평적)를 의미한다. 붓다는 소승을 거쳐서 대승으로 나아가는 이 두 가지 과정을 모두 거친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선종(禪宗)으로 대승불교가 주류를 이룬다, 이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수행 없이 관계 속에서만


예수에게는 붓다의 이런 수행 과정이 없다. 이점이 내가 가장 의아해하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신의 아들, 성자(聖者)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의 수행 과정이 가려진 것이 아니라면...)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 속에서 머물다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니까 예수는 인간 세상의 그 모든 관계 속 스트레스를 모두 겪었다는 얘기다. 이웃과 함께 몸으로 부대끼며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그들과 함께 했다. 사랑과 인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를 땅으로 보내어 수직관계의 자신을 인간들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예수를 다시 수직관계로 끌어올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그를 예수님, 성자, 그리스도, 빛등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관계 = 스트레스


관계를 유지하고 늘려가는 것은 일종의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우리 인간은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쪽으로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 잘 생각해 보면 인류의 발전은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제거하는 편리와 풍족으로 향해감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더 고차원적인 스트레스를 찾고 그것들을 계속 해결해 나가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엮여있는 혈연 혹은 지연 그리고 사회적(생계)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제외하고는 불필요한 관계를 만들어 생겨나는 스트레스를 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은 관계 속에서 행복과 자존감을 얻는 존재이기에 이 관계를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필요한 관계만 유지하는 성향을 보인다.


필요한 관계라는 것이 바로 이해관계(利害關係)이다. 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우리는 관계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며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손절된다. 안타까운 건 의미 없는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만들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빠른 것을 좋아한다. 의미 없고 돈이 안되면 빠르게 손절하는 자본주의 경제학 논리에 가장 빠르게 응한다. 초고속 경제성장에는 밑바탕에는 한국인의 빨리빨리 근성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나는 호주에 온 이후 한국에서는 가져보지 못한 이해관계가 없는 관계를 경험했다. 처음에는 의미 없는 관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관계 속에서 의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해득실만 따졌다면 절대 지속할 수 없다. 신이 왜 인간을 시간의 틀에 가둬두었는지 이제 좀 이해가 될 듯하다. 시공간을 초월한 신은 다 알지만 인간은 시간이 지나야만 알게 된다. 그것도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그래서 인간관계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관계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동행


1970년 시작된 새마을 운동을 기억하는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노래가 되어 울려 퍼졌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대한민국의 발버둥이 전국 방방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같이 담도 쌓고 다리도 놓고 같이 품을 나누며 마을의 발전을 위해 공동체를 형성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던 시기였다. 밤낮없이 국가의 경제 발전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기였다.


그 시기와 맞물려 한국의 기독교도 빠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에 예배당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고 신에게 한 주간의 고단함을 위로받는 시간이었다. 교회가 마치 공동체 활동의 베이스캠프처럼 되어갔다. 이때부터 교회 오빠, 교회 누나와의 러브 스토리들이 탄생하며 가정의 구성원이 늘어나고 공동체는 커져가고 커진 공동체는 또 다시 사회와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산업자본주의와 기독교는 궁합이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기독교의 부흥과 경제 발전이 톱니바퀴처럼 같이 맞물려 돌아갔다. 밤에 산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야경에 붉은 십자가가 유난히도 많아 보이는 이유이다.  

새마을 운동

이때 불교는 상대적인 침체기를 겪었다. 바쁜 산업화 시대에 산속의 절에 올라 다닐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절이 조금씩 산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주요 사찰은 산속에 있어도 요즘 지어지는 절이나 법당은 도시 주변에 위치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특히 개인의 수행과 해탈에 중점을 둔 소승불교는 산업자본주의 노선으로 갈아탄 대한민국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의 불교는 대승불교 계열로 발전해 나간다. 기독교의 영혼구원처럼 중생구제라는 명분이 사람들을 세상 속에 어울려 살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고 공장을 돌려야 할 시간에 산속에 들어가 명상과 사색이나 하고 있는 국민을 국가와 정부가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다. 이건 산업 경제 발전 저해하는 반역행위인 것이다.


관계(오프라인) 없이도 가능한 삶


한국은 군부 독재 속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다.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이 화두로 등장한다. 국가는 법과 질서 그리고 시스템을 바꾸고 강화해 나가며 집단주의(공동체)에서 이제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 그것이 국가가 할 일이고 국민은 그런 국가를 원했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자유로워 졌다.


원시 수렵 혹은 농경사회에서는 국가의 영향력이 지금처럼 강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개개인은 마을이나 집단에 귀속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소외되거나 집단에서 벗어나면 살아남기 힘든 사회 구조였다. 싫어도 미워도 어울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관계에서의 '손절'이라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면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디지털 노마드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디지털 노마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세계 어디를 가도 마음만 먹으면 그곳에서 살 수 있다. 물론 경제적 환경적으로 어느 정도의 제약이 따르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노마드(유목민)의 삶이 가능해진 것이다. 치안과 사회 안전망이 갖추어진 국가는 개개인의 기본적이 안전과 인권을 법으로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손안에 든 컴퓨터와 작은 노트북(혹은 태블릿)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그 속에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제거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온라인 공간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온라인 공간은 서로 눈을 바라보지 않고도 손쉽게 관계를 형성하고 끊어버릴 수 있다. 이 말은 관계를 형성하고 끊어내는데 받는 스트레스가 적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싶다.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공간으로 삶의 영역을 이동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대면(對面)하면 데면데면하다

 

눈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창이라고 한다. 요즘 청년들은 얼굴과 눈빛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을 힘들어한다고 한다.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일까. 눈빛을 마주하면 뇌가 작동을 멈춘다. 시선을 처리하는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다. 시선을 마주하면 뇌가 부자연스러워지는 현상을 경험한다. 왤까?


우리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다. 이건 여성들이 화장을 하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는 것과도 비슷한 것이다. 또한 자동차의 짙은 선팅도 같은 맥락이다. 짙은 선팅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는다. 선팅은 햇볕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나의 시선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감추는 역할도 한다. 이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관음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성격을 드려다 보려면 운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그건 자신 만의 밀폐된 공간에서 밖을 내다보며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본성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습관은 무의식에서 잘 드러난다.

voyeurism

이건 온라인 공간에서 우리의 모습과 같다. 다만 온라인 공간은 나도 타인도 둘 다 선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선팅의 짙고 옅음이 다를 뿐이다. 서로는 그 안에서 자신은 감추고 타인은 들여다보려 싶어 한다. 자신은 비공개로 가리고 SNS로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의 계정을 오고 가며 타인의 생각과 생활을 비교하고 관찰한다.


이런 모습은 페르소나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만들어진 모습 혹은 보이고 싶은 모습으로만 타인에게 비치고 싶은 것이다. 아름답게, 착하게, 똑똑하게, 침착하게 보이고 싶은 것이다. 만약 당신의 실제 모습이 추하고, 악하고, 멍청하고, 불안하다면 더욱더 아름다움과 착함과 똑똑함과 침착함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가리워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도 없느니라."

                                                                                          - [누가복음 12:2] -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옛날에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처음 보는 여자가 옆에 누워 있어 놀랐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다. 요즘은 원판을 바꾸는 성형과 시술로 그런 일은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가리고 포장하는 어설픈 화장 기술로만 아름다움을 만들려다 보니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그렇다고 내면까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다 드러난다. 내면의 추함을 알고 나면 외면의 아름다움은 이제 약발이 끝난다. 적잖은 남성들이 거기에 속아서 비참한 여생을 보내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중요한 것은 드러날 것을 숨기면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변화의 시작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부터이다. 상처는 드러내야 치료할 수 있고 또 아물 수 있다. 드러나면 그걸 가만 둘수 없고 스스로 바꿔갈 수 있는 것이다.


관계는 어렵기에 더욱 중요한


희소가치는 수요와 공급을 일으키는 경제학의 핵심이다. 희소한 재화와 서비스는 가치가 올라간다. 관계가 힘들기에 관계능력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


옛날에는 비즈니스에서 관계를 중요시했다. 관계를 잘하는 사람이 돈을 잘 버는 시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옛날 부자는 어느 정도 인성은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뭐 한 가지만 특출 나게 잘하는 사람, 좋게 얘기하면 고도화 전문화된 나쁘게 얘기하면 편중된 스킬과 능력만 있으면 돈은 따라온다.인성이 뭐 같아도 돈만 잘 번다.


그래서일까 시중 서점에는 이 관계에 관한 책들이 넘쳐난다. 혼자서 하는 건 열심히 엉덩이 붙이고 연구하고 집중하면 되지만 관계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심리학, 철학, 인문학 등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나 또한 일은 힘들어도 견디지만 관계가 힘든 것은 참기 힘들다. 아직은 정신의 내력보다는 육체의 외력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읽고 쓰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신앙은 관계이다


우리의 삶은 롤모델이 필요하다. 아기가 부모를 흉내 내듯이 우리의 삶도 롤모델이 필요하다. 나는 예수도 붓다도 모두 존경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수많은 유혹과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때로는 붓다처럼 유혹과 욕망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예수처럼 유혹과 욕망을 이겨내며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성직자가 아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국가와 사회와 가정에 소속되어 그 일원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으로 기회가 된다면 일정기간 일상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신을 제대로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과거 예수는 항상 대중 속에서 함께하며 관계에 집중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가 이런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가장 오래된 인간관계론 교본인 것이다.


신앙은 단순히 신을 믿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신앙은 신이라는 롤모델을 통해 인간관계를 배워가는 과정인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 [마태복음 22:39] -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구절이라 생각한다. 이 구절이 이제는 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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