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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r 05. 2023

관계가 힘든 이유

지식과 지성 그리고 지혜에 관한 상념

이전 글[신앙은 관계이다]에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라고 했다.

그럼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사랑과 행복 그리고 기쁨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속에서 또 미워하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관계는 마치 행복과 기쁨의 대가로 상처와 슬픔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관계 속에 머물면서도 항상 관계에서 벗어나려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며 살아간다.


그럼 왜 우리는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는 것일까?


세상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향해간다. 나와 나의 가족이 우선이다. 나와 나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웃이 어찌 되건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빼앗고 지키기에 급급하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 [마태복음 22:39] -


이 성경 속 말씀이 무색하게 과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이런 구절은 글로 읽을 땐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글은 그냥 글일 뿐 일상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해도 공감하지 못하며 공감해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읽는 것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그 뒤에 더 힘든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읽을 때만 감동받고 눈물 흘리며 돌아서면 다시 짜증 내고 화를 낸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힌 베스트셀러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구절들은 그저 읽기에서 끝났을 뿐이다. 세계에 수많은 기독교인(약 20억, 세계 인구의 1/4)들이 있지만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은 이유이다.


그럼 왜 우리의 관계는 시간을 먹고 긍정에서 부정, 기대에서 실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의 개인적인 견해들로 이것에 대해 설명해 볼까 한다.

 

관계 이전에 생략된 것들...


이전 글에서 기독교와 불교에 대해서 언급했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내려와 항상 관계 속에 머물며 진리를 전하고 여행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싯다르타라는 한 왕자 인간이 수행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거치고 다시 인간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두 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그래서 불교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뉜다. 소승(동남아의 주류)은 개인의 해탈, 대승(동북아의 주류)은 중생 구제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고 언급했다. 붓다는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고 진리를 구하는 수행의 과정으로 들어가 진리를 깨닫고 난 후 그 진리를 알리고 또 속세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구제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럼 이 과정을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서 설명해 보자.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는 예수처럼 신의 아들이 아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가 될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이 내린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닮아갈 수는 있다. 그럼 인간은 신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한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다.


지식 (知識, Knowledge) = 정보


그런데 우리의 삶은 들여다보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보살핌 속에 똥오줌 가리는 인간으로 크자마자 학교라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는 참 많은 것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그 가르침의 대부분이 지식 습득이다. 수많은 교과서와 전공서적들은 지식을 배우고 익히고 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아는 것들이 많아지고 머리가 굵어진다. 아는 것들이 많아지면 아는 것을 뽐내고 싶어 지기 마련이다.


지성 (知性, Intelligence) = 논리


지식들이 뭉쳐서 복합적인 반응을 일으키면 지성이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성인이 된다. 그럼 남들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게 된다. 그럼 사람들이 그를 전문가로 칭해준다. 전문가가 되면 인기가 높아지고 인기가 높으면 부와 명예가 따라온다. 우리의 교육과정은 대부분 이 지식 습득을 통해 지성인이 되는데 집중되어 있다. 너나 나나 전문가가 되어 출세하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렇게도 자녀들에게 다른 자녀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집어넣으려 발버둥 친 것이다. 지식 우위를 통한 전문 지성인으로 키우기 위해 집안이 거덜 날지언정 자식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지식정보사회는 저물어 가고 있다. 지식은 AI가 더 많다.


지식은 암기와 논리의 영역이다. 이건 누구도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옳은 말이다. 하지만 옳은 말은 더 옳은 말을 찾게 한다. 논리는 논리로 반박하며 끝이 없는 논쟁으로 이어질 뿐이다. 지성인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어지러운 이유이다.


우리들이 유소년과 청소년기 대부분의 시간을 이 지식을 쌓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부은 결과이다. 그 결과 지금 관계가 너무도 힘든 성인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성 (理性, Reason) = 이해


'이성'은 내가 쓴 글들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쓴 칼럼 중에서 [이성과 감성사이]은 거의 매일 가장 많은 조회수를 찍고 있다. 갈등과 분열이 만연한 사회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생각한다. 왜 우리는 이렇게 싸우는 것일까? 공부만 시켰더니 인성이 어찌 되었건 생각지 못했다. 지만 잘난 인간이 되어가다 보니 관계 속에서 계속 힘들어한다. 서로 지(자기 and 知)만 잘났으니 잘난 놈 끼리 만나면 싸울 일 밖에 없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성공을 하려면 타인을 잘 이해해야 잘 이용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고력과 판단력을 올리는 것에 관심이 집중된다. 이성적인 인간 되려 노력한다. 지식만 주입하던 부모들은 이제 아이들에게 역사와 철학이나 심리학등 인간을 이해하는 공부를 시키기 시작한다. 좀 번거롭고 시간이 다소 걸리지만 분쟁과 다툼을 피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이성적인 말과 행동으로 무장한다.


머리로 타인을 이해하는 인간이 되어 간다. 과거 내가 썼던 서평[당신이 타인에게 이성적인 이유]에서 이것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던 적이 있다. 문제는 시작(어려서)부터 이성적인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에 내면과 외면이 따로 논다. 외면은 이성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있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다. 단지 자신의 목표와 성공을 위해 내외(內外)가 다른 삶을 살며 그것이 이성적인 삶이라 얘기한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런 사람을 인성과 지성을 두루 갖춘 훌륭한 사람으로 여긴다. 하지만 내외가 같지 않기에 겉으로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관계로 당사자는 힘들 수밖에 없다.


감성 (感性, Emotion) = 공감


우리는 옳은 말만 하는 사람과는 잘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청개구리 같은 심보는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이다. 인간은 몸에 필요한 것을 먹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 동물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신선식품과 채식위주의 소식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렇게 살지 않는 것처럼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과(인지) 옳은 행동을 하는 것(실천)은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좀 허술하고 어눌해도 따뜻하고 편안한 사람 곁에 머물고 싶다. 가끔씩은 서로 옳지 않은 것도 같이 경험하며 그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그런 사람이 우리가 말하는 공감하는 인간인 것이다.


아이는 옆에 다른 아이가 다쳐서 울면 금세 같이 따라 운다. 자신이 아픈 것도 아닌데 친구가 우니까 지신도 슬퍼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감이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다치지도 않았는데 왜 우냐며 아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따져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고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자동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인 것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마음보다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연습으로 인해 마음이 점점 굳어져 간다.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 엮여서 손해와 피해를 줄이고 이윤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지식과 지성과 이성을 총동원한다. 하지만 감성은 빠져 있다. 왜냐 감성은 이 세 가지랑 잘 친해지기가 힘들다. 물론 어울릴 수 있다. 만약 이 세 가지에 감성이 플러스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할 수 있겠다. 자연 속에서 사색하며 예술(미술, 음악)을 감상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문학)를 읽으며 타인의 삶을 이해하며 감성이 메말라가지 않게 해야 한다.


"지식은 밋밋하고, 지성은 날카로우며, 지혜는 부드럽다."


                                 - [강원국의 글쓰기] 중에서 -


내가 이해하기론 여기서 지혜란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상태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으며 그 속에 감성적인 그림들 속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배우며 지혜를 얻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밋밋하고 날카롭기만 하니 그 속에서 항상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교육이 바뀌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많이 배우기만 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지금 이렇게 논쟁과 분쟁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로가 자신이 더 많이 알고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식과 지성이 아닌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룬 지혜의 씨앗을 심어줘야 한다. 지식과 지성은 나중에 배워도 늦지 않다. (사실 배울 필요도 없다. 미래에는 알고자 하면 다 알 수 있다. 찾을 수 있는 것을 배우는 시대는 끝이 나고 있다) 지식과 지성으로 인간의 등급을 나누는 시대는 언젠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건 이제 인간의 영역이 아닌 AI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우리 세상은 이제 전문가보다 온전한 인간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제 좀 정리가 되는 듯하다. 신앙이 바로 서려면 관계가 바로 서야 하고 관계가 바로 서려면 내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 내가 바로 선다는 것은 지식과 지성이 아닌 진리를 깨닫고 지혜(이성과 감성)를 습득(체화)하는 것이다. 신앙과 관계를 얘기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관계가 힘든가?  


당신은 지금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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