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는 전도 여행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동행자로 받아들였나 하는 것이다. 그것도 남자 사도들만 득실거리는 무리에 결혼도 하지 않은 어린 처녀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중세 기독교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묘사하기도 했다) 뭐 막달라 마리아가 이성적으로 전혀 끌리지 않는 외모나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영화 [올드보이] 중에서
군대를 가본 남자라면 경험해 봤겠지만 남자만 득실대는 공간 속에 갇혀 몇 년을 있다 보면 지나가는 여자만 봐도 성욕이 끌어 오를 정도이다. (여자들은 짐승이라고 얘기하겠지만 이건 신이 내린 본능이고 유전자 번식을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좋고 나쁨을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오랜 감금에서 탈출하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처음으로 여자를 보고 했던 표정과 행동이 기억나는가.
"여자 사람이다!"
남성은 기본적으로 이 성욕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남성들로 이루어진 제자 그룹에 만약 아리따운 여성이 한 명 끼어 있다? 어떤 상황들이 연출될 수 있을까?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 여성의 확실한 임자 혹은 보호자가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리고 그 보호자의 영향력이나 파워가 웬만큼 강하지 않다면 남자들 무리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 : 부활의 증인] 중에서
어느 곳에서 보아도 막달라 마리아는 아름답고 선한 여성성을 지닌 여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면 예수는 과연 눈앞에서 24시간을 함께 지내야 하는 그 여성에서 이성적인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 하물며 마리아는 이미 예수의 모습에 반해 있었다. 그랬기에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를 따라나섰던 것이다. 당시 미혼 여성이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들의 무리와 여행을 떠난다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이건 예수의 말과 행동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모습에서 기존의 삶과 가족 그 모든 것을 버릴 만큼의 강력한 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건 마리아가 선지자에 대한 존엄과 경배의 감정뿐만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느낀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 않을까?
St. John (성 요한)
사도 요한, 그는 과연 남자인가?
예수의 제자 중에 베드로 다음으로 총애받았던 제자를 꼽으라면 사도 요한을 들 수 있다. 그는 요한복음, 세 편지(요한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묵시록)을 저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예수의 제자 중에 가장 어렸고(회화에서 요한은 대부분 수염도 없는 곱상한 미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예수의 가장 측근에서 예수의 수많은 일을 거들었던 집사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회사로 치면 최고경영자의 비서실장, 동양의 역사 속에서 찾으라면 왕을 옆에서 24시간 보좌하는 내관(內官), 내시)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존(John)이라는 흔한 이름
요한을 뜻하는 존(John)이라는 영문 이름은 정말 흔하다. 여기 호주에서도 지인 중에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존이 있을 정도로 많다. 그 말은 그만큼 인기가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지만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성경(신약)에서 예수의 궁극적 계명인 ‘사랑’에 대해서 가장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남녀 간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누구나 남녀 간의 사랑을 먼저 떠올리는 건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속 미스터리
그럼 이제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그림 [최후의 만찬]을 다시 한번 드려다 보자. 레오나르다 다빈치의 3대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예수가 죽기 전 열 두 제자와의 마지막 식사 자리의 모습을 그렸다. 다빈치는 이 그림 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은 그의 가장 말년의 작품으로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느끼고 깨달은 기독교와 성경에 대한 모든 지식과 생각들을 총망라하여 회화 속에 녹여낸 작품이다. 그래서 이 회화 작품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속에 수많은 미스터리를 품고 있다. 그 미스터리가 세간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인물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천재 중의 천재였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썼던 서평[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다]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정말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두각을 드러낸 천재 중에 천재였다. 마치 신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예수의 우편에 앉은 자
[최후의 만찬] 그림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다. 예수의 최측근이자 오른팔의 상징인 사도 요한이 보인다. 그런데 이 사도 요한의 모습이 다른 사도들과는 다르게 아주 앳되고 여성스럽다고 생각되는 건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 듯하다. 실제로도 사도요한은 남성 제자들 중 가장 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핏 보면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상당히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그시 감은 듯한 두 눈과 가지런히 모은 두 손, 그리고 가냘프게 떨어지는 어깨선이 다른 사도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만약 봉긋한 가슴 라인만 그려 넣었다면… 여자라고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나는 왜 이 모습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떠올랐을까? 만약 이 그림이 성경이라는 배경지식을 완전히 배제하고 보게 된다면 어떤가? 마치 한 남녀커플을 중심으로 남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 같지 않은가? 예를 들면 왕과 왕비가 가운데 앉아 있고 주변에 관료 대신들이 앉아서 나라의 대소사를 논하는 듯한 모습이다.
2003년에 출간된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이런 미스터리를 소설로 엮어서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내부적으로 상당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소설은 영화화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기독교 음모론까지 대두되었던 적이 있다.
[모나리자] & [성요한]
다빈치가 남긴 또 다른 두 개의 걸작에서도 이런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 얼굴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힘들다. 신기한 건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헷갈린다는 것이다. 얼굴 아래 가슴라인 때문에 여자에 가깝다고 보는 게 중론이다. 그리고 그가 그린 [성 요한] 또한 얼굴만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얼굴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성 요한] 이 세 그림의 인물이 닮아있다는 점이 주목할 점이다. 그는 왜 유독 이렇게 남녀의 성별이 애매모호한 인물을 그렸을까?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도마복음]의 가장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그녀 스스로를 남성으로 만드는 모든 여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니라. "
- [도마복음 114:3] -
뭔가 의문점이 피어오르지 않는가? 예수의 어록을 담은 이 복음서의 말이 정말 예수가 남긴 말이라면, 예수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나의 엉뚱한 상상이긴 하지만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가 동일 인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과연 사도 요한이라는 인물이 존재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실제로 [요한복음서]에는 제자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 '주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인물이 베드로와 함께 자주 등장한다. 글을 맥락 상으로 요한일 가능성이 높지만 자신 스스로를 높이는 듯한 표현을 썼다는 점과 '사랑하는 제자'라는 문구가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 제자가 혹시 막달라 마리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그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자 중에 과연 남성 제자가 있었던 것일까? 혹시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이 둘은 하나에서 둘로 쪼개진 인물이 아닐까? 요한이라는 인물은 기독교에서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요한이 남긴 많은 복음서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막달라 마리아가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일까? 수많은 의혹의 질문들이 피어오른다.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것이 아니라 500년 전 누군가도 이런 엉뚱하고 황당한 생각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만의 상상으로 그림 속에 표현해 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 당시에 이런 상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표현해야만 하는 예술가
예술가는 표현하지 않으면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그 표현에는 반드시 의미와 생각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는 예술이 꽃 피우기 힘들다. 그래서 독재국가 혹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진정한 예술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독재와 사회주의는 체제의 안정을 위해 개인의 상상(언론을 포함)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 의미와 생각이 없는 표현은 그건 그냥 아이들이 하는 장난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안중근 그리고 윤동주
나라의 독립, 더 나아가 동양과 세계의 평화를 꿈꾸던 어느 군인에게는 총칼로 싸우며 적 수장의 심장에 총을 겨누는 것만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또 누군가는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함축적이고 절제된 언어와 운율로 대중의 마음속에 나라의 독립 염원을 불어넣은 시인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또한 당시(중세말기) 부패가 극에 달한 기독교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의 말년에 그린 ‘최후의 만찬’ 속에는 분명 오랜 세월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과 상상의 정수가 담겼을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지금은 접할 수 없었던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많은 복음서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런 복음서들을 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당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이 알아챌 수도 없고 의심한다 해도 피해 갈 수 있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아리송한 예술로 표현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는 도대체 왜 남녀의 구분이 어려운 인물을 그렸던 것일까. 그게 만약 중세 부패한 기독교가 감추고자 했던 무언가를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였을까. 그렇다면 남녀로 대변되는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 두 인물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만약 예수의 우편에 있었던 것이 막달라 마리아였다면, 왜 예수에겐 여자가 있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무엇이 예수가 한 남성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한 것이었을까? 그걸 왜 부인해야만 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