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간의 자식들은 머리를 뉘어 안식할 곳조차 없도다."
Jesus said, "Foxes have their dens and birds their nests, but the child of humankind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and rest. "
- [도마복음] 86장 -
이제 벌써 10번째 이사다. 호주에 온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 10번이나 거주지를 옮겨 다녔다. 정말 노마드 삶(유목)이 따로 없다. 나에겐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음이 틀림없다.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삶의 공간은 새로운 관계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런데 누가 이런 삶을 살고 싶을 것인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런 나의 이동 생활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내가 머물고 싶다고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 나는 타인의 소유지에 이용료를 지불하고 허락된 시간만 머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용료를 올리고 그것에 불응할 땐 퇴거를 요청할 수 있으며 나는 요구를 들어주거나 혹은 퇴거할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이건 또한 우리 모두의 사회적 약속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얘기하는 집 없는 설움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를 악물고 재산을 늘려야 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짐승들도 모두 자기의 보금자리가 있건만 인간 대부분은 그들만의 집이 없다.
2,000년전 한 선지자의 말이 틀리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이 끝없는 시공간의 우주 속에서 잠시 머물다 떠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인지도...
이삿짐을 싣고서
노마드(Nomad, 유목민)의 삶
유년 시절 유난히도 이사를 많이 다녔다. 부모님을 따라 항상 이삿짐을 꾸리고 짐을 잔뜩 실은 1.5톤 트럭을 타고 부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당시 나는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삿짐을 나르느라 지친 표정의 아버지와 근심걱정 가득한 표정의 어머니와는 달리 그때 나의 모습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에 펼쳐지는 새롭고 신기한 풍경을 동그란 눈에 가득 담느라 분주했다.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보다는 기대가 더 크다. 단지 아쉬운 것이 한 가지 있었다면 그동안 사귀었던 친구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또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 거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찾아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이 느끼는 이별의 슬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금세 잊어버리고 현재의 즐거움을 찾아 다시 빠져든다. 나는 그 당시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면 가장 먼저 작은 네발 자전거를 타고 새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나의 놀이터가 될 공간들을 이리저리 구경하곤 했다.
정착
부모님의 내 집 마련은 내 기억으론 5번의 이사 끝에 이뤄졌던 것 같다. 그때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 유아기(7세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어서 아마도 더 많이 이사를 했을 거라 짐작된다. 부모님의 첫 집은 이전에 우리가 셋방 살이를 하던 단독 주택이었는데 부모님이 이곳 저곳 월세, 전셋집을 전전하며 맞벌이로 열심히 돈을 모아서 그 집을 사서 다시 이사 간 걸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그 집을 사기 위해 밤낮없이 장사를 하셨고 아버지는 밤낮없이 공장과 현장에서 일을 하셨다. 그래서 나와 동생은 어려서부터 부모님 없이 알아서 저녁을 차려먹는 날이 많았다. 어찌 보면 방과 후에도 부모의 통제 없는 자유의 시간을 만끽했지만 그 자유에는 허전함이 함께 했던 것 같다.
"이제부터 우리 이사 안 다녀도 된다."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희생한 대가로 우리 가족은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에서 개도 키우고 화단에 꽃과 채소들도 키우며 집주인의 눈치를 안 보고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그렇게 좋았던 모양이다. 그때 나는 집주인 눈치가 뭔지 모르던 시절이라 그냥 이제 이사를 가지 않는다는 말에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이삿짐을 싣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그 기분을 다시는 느낄 수 없다는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나의 이런 아쉬움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성인이 되고 부모 곁을 떠나면서 나의 노마드 생활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가족도 없이 홀로 떠도는 진정한 노마드의 삶이다. 군생활, 유학생활, 직장생활 그리고 지금의 이민생활까지... 나는 언제 정착하게 될까? 아니 정착할 수 있는 것일까?
부모님이 내 집마련의 꿈을 이뤘던 때 그들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지금 나는 40대 초반이 되었다. 하지만 난 아직도 이사 중이다. 그리고 또 이사를 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거 예수가 그러했듯이 우리는 결국 영원히 떠돌다가 떠나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긴다.
이사중
과연 자신의 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자신의 집이라고 알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중에 과연 그 집을 자신 스스로 온전히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 주택담보 대출금을 열심히 갚아가며 살고 있거나 부모 찬스를 통해 물려받은 것이 대부분 아닐까 많은 이들은 이 두 곳에 양다리를 걸치고 자신의 집을 마련한다. 과거 나의 친구나 직장 동료들도 대부분 그렇게 결혼을 위한 집을 마련했다.
이제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지만 그 대신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일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빚(부채)은 노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자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이제는 인간은 지구에서 온전히 자신 스스로 둥지를 만들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모든 자본은 부이지만 부가 곧 자본은 아니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중에서 -
산업자본주의 세상은 두 가지의 부가 존재한다. 그건 자본(資本)과 자산(資産 : 부동산, 주식 등)이다. 그리고 세상은 두 가지 부를 헷갈리게 만들어 놓았다. 자본도 자산의 한 종류로 볼 수 있지만 자본이라는 부는 부채(負債)와 합쳐져 자산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변형한다. 땅과 집과 공장 그리고 회사에 빚(부채)이 들러붙어 있지 않은 곳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자본보다는 이 자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부(大富)는 돈이 아닌 자산에 집중한다. 이제 더 이상 부자는 자본(현금성 자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과거 우리 부모 세대는 자본이 스스로 증식하는 시대(예금 이자가 높은)를 살았지만 지금은 자본은 스스로 증식이 힘든 시대가 되었다. 과거처럼 경제가 급성장하던 시대에는 노동력이 잉여생산물을 통해 자본을 창출하고 자본이 증식하며 부가 증가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불어난 자본이 자산에 모두 들러붙어버렸다. 인간이 계속 태어나는 이상 노동은 계속된다. 그 말은 자본은 끊임없이 창출됨을 의미한다.
노동의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높지 않다. 물가 상승률에 비례(상응)해서만 올라가는 수준이다. (물가에 자산가치 상승률은 포함되지 않는다, 자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동산이다. (특히 한국은) 그렇기에 자산의 가치는 계속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자산을 가진 자와 자산을 가지지 못한 자의 괴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괴리가 커질수록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질 수 없는 자가 되어버린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갈수록 노동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현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보금자리가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었다. 있더라도 법적 권리만 있고 은행이 실질 소유주인 집, 대출 만기가 20년 30년인 노예 계약과 함께. 당장 5년 뒤를 전혀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 20년 30년 뒤에 세상이 어떻게 될지... 이런 장기간의 대출 상환 시스템은 결국 우리가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기간을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이 말이 바로 노동이 없으면 자본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임금이 자본에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임금은 우리의 노동이 창출한 가치에서 잉여자본과 이익자본을 빼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선불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우리는 선 노동 후 임금이라는 시스템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살아간다. 하지만 사업(비즈니스)은 다르다. 선수금, 착수금, 중도금, 잔금등으로 나누어져 나의 돈이 없어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노동이 있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노동이 없다면 이 시스템은 돌아갈 수 없다. 지금 세계 각국이 왜 이 지속가능한 노동 인력(청장년)과 아이(미래 노동력)에 혈안이 되는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전에 쓴 칼럼[노동을 거부하다]에서 설명했듯이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은 노동력이 상실되면 시스템이 붕괴된다. 그렇기에 이 노동력을 어떻게든 지속시켜야만 한다. 우리는 빚을 갚아야 하는 시간 동안까지는 어떻게든 일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빚을 천천히 갚게 하는 이유이다. 빚은 자신(원금)을 갚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은혜는 갚아야 하지만 빚은 계속 지길 바란다. 빚은 갚아버리면 이자(빚)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증식이 멈춘다. 빚의 증식이 바로 경제 성장의 또 다른 표현이다.
"토지 독점권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그 토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소유한 것이었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중에서 -
이를 일찌감치 깨달은 과거 지식인들은 서둘러 땅을 사들였고 그들은 불어난 자산으로 더 많은 땅을 사들이고 결국 부의 편중이 계속 심화되는 현상을 만들었다. 자산은 그 자체로도 그에 상응하는 부채를 창출한다. 자산이 담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산이 자산을 계속 끌어당긴다. 하지만 자본은 자산과는 다르다. 자본은 노동을 통한 잉여생산을 통해 창출되지만 자산은 노동 없이도 부채(빚, 이자)를 통해 불어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산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다. 왜냐 자산이나 자본이나 우리는 모두 숫자(가격)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숫자끼리는 빼고 더하고 나누고 곱할 수 있다. 자산과 자본은 다른 개념이지만 통화의 숫자로 표기되기에 헷갈리고 뒤섞여 버린다. 문제는 자본의 창출은 노동에서 시작되는데 노동력은 줄어드는데 자산의 규모와 가치는 계속 증대된다는 것이다.
뭔가 이상한 조짐이 느껴진다. 이게 바로 매일 우리가 뉴스에서 듣는 '가계부채, 기업부채, 국가부채 사상최고치'라는 소식이다. 이젠 들어도 아무 느낌도 없다. 부채가 많아서가 문제가 아니라 그 근본을 찾아가 들어가 보면 노동이 줄어드는데 부채가 증가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항상 자극적인 외면(매스컴)에만 노출되어 그 이면과 근원을 보지 못하게 한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가난이 심화하는 원인은 어디에서나 임금이 최소한으로 유지되는 경향과 그 원인에서 파악할 수 있다"
- 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중에서 -
더 큰 문제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노동 단축, 워라벨, 상대적 박탈감, 여러 가지 중독들)로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건 노동력이 감소함을 의미하고 이건 부풀려진 부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노동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기초가 부실하면 무너진다.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
- 아이작 뉴턴 -
인간의 욕망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서평참조] 가진 자들을 잃고 싶지 않고 못 가진 자는 계속 가지고 싶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유지하려면 못 가진 자들이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같은 욕망을 계속 심어주고 자극해야 한다. 가진 자들의 부는 결국 그들의 노동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가지되 노동은 계속되도록 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집을 계약했다. 드디어 정착했지만 이건 쉼 없이 연장될 노예 계약이기도 하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은 매달 꼬박꼬박 나가야 할 이자(부채)를 위한 것이다. 이게 바로 현대판 노예 아니겠는가.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100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자유로운 노예를 자처한다.
인간은 어쩌면 정착을 하면서부터 노예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닐까? 기억해 보면, 그 어린 시절 부모님도 처음 집을 가졌던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좀 지나자 오래된 주택에 대한 불만들이 생겨났고 이내 더 크고 좋은 새 아파트로 이사 가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하셨다. 영원히 머물 것처럼 크고 화려한 집을 원했지만 정작 그런 집은 결국 우리를 현실의 삶의 굴레 속에 가둬버린다. 어쩌면 신은 인간이 몸을 뉘어 안식할 곳을 찾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놓고 안식할 곳을 찾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