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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pr 23. 2023

지킬게 많다는 건...

[길복순]을 보고 난 후...

"근데 뭐 어쩔 수 없지, 우리도 지켜야 할게 많은 사람들인데..."

                               - 영화 [길복순] 중에서 -


우리의 삶은 가지기 위한 것일까? 가진 게 많다는 건 과연 좋은 것일까? 가진 게 많으면 가진 만큼 걱정거리가 늘어난다. 많이 가진 자들은 잃을지도 혹은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게 된다.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가진 자는 보수 되고 못 가진 자는 진보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물질문명이자 자본주의 사회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고모두가 이것을 늘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세상은 규칙을 만들어 이를 보호한다. 우리는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자(원소)들로 만들어진 수많은 분자화합물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 더 높은 가치, 즉 우월한 존재로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힘을 쥐어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올리고 힘을 가지기 위해 부단히 도 가지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것들이 희생된다.

영화 [Kill boksoon] 중에서

"모순 뒤에 진실을 봐라"

                                - 영화 [길복순] 중에서 -

                                              

요즘 성경에 관심이 많아 자주 보게 된다. 성경을 읽다 보면 떠오르는 또 다른 책이 있다. 그건 바로 [손자병법]이다. 우린 가끔씩 '삶은 전쟁터'라고 표현하곤 한다. 틀리지 않다. 그만큼 삶이 치열하다는 뜻이다. [성경]은 사랑을 말하지만 [손자병법]은 기만(欺瞞, 속임수)을 얘기한다.


"최고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며 싸워야 한다면 속임수를 써서 쉽게 이겨야 한다"

                                                                                      - [심리학으로 읽는 손자병법] 중에서 -


이것을 예수의 삶 즉, 성경적인 관점에서 다시 말하면 '최고의 전략은 져주는 것이며, 싸워야 하더라도 진실(진리)을 말하고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가 아닐까? 물론 그 패배와 죽음 뒤에는 상대의 양심을 찌르는 의미를 남겨야 한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이렇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이 성경임에도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대로 살아가는 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진리에 다가가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불가능의 영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일까? 자본주의 세상에 속해 사는 신앙인이라면 평생을 이 고민을 안고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세상을 지혜롭게 산다는 건 과연 [성경]을 따르는 삶일까 아니면 [손자병법]을 따르는 삶일까? 세상에서 성공을 이루고 승리를 쟁취한 사람들은 성경보다는 손자병법서를 더 선호하는 듯 보인다. 더욱이 그들은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고 발전을 이뤄내는 사람들이었다.


공정한 경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끊임없는 경쟁 속에 놓여있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공익광고에서나 나오는 세상이다.


우리는 격투기 선수나 수영 선수처럼 팬티만 입고 링 위에서 혹은 물속에서 경쟁하진 않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수영을 좋아한다. 타고난 신체적 조건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 빼고 완전히 비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속임수와 장비빨, 친분(공정하지 않은 심판) 등에 당해낼 재간은 없다. 격투기나 수영은 속임수, 장비빨, 판정에 편법이 있을 수 없다. 공정하다.

Killboksoon

"우리는 진실을 원하지만, 거짓을 믿고,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

                                    - 영화 [길복순] 중에서 -


우리는 입으론 항상 진실과 평화 그리고 사랑을 말한다. 그것을 이루기 논쟁하고 전쟁하고 살인한다. 모순이다. 고귀한 단어를 입에 담으면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모습을 통해 타인을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왜 내가 왜 진실과 평화와 사랑을 외치고 있는지를 곰곰이 더 멀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대의명분'을 중시한다. 돈, 권력, 명예(인기) 같은 가치들은 대의명분이 될 수 없다. 참 모순적이지만 인간은 속으로는 이것들을 중시 여기면서 겉으로 진실, 평화 그리고 사랑을 외친다. 왜냐? 그것들만이 대의명분으로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충성과 열정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설명하기 어렵지만 신이 내린 인간만이 가진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잘못인지 아닌지는 자기가 제일 잘 알아요 남들이 정하는 게 아니라"


                                  - 영화 [길복순] 중에서 -


우리의 말과 행동은 항상 이 양심의 영향 아래 있다. 그리고 그 말과 행동들이 양심을 벗어난 것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잘 알고 있다. 다만 시선과 환경이 양심을 무시하고 짓밟을 뿐이다. 더 의미 있는 사실은 이 시선과 환경이 양심을 정의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양심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교육 혹은 뇌에 의해 형성된 것일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오랜 시간 가스라이팅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이 주신 원초적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양심을 얘기한다.


성공과 승리는 혼자 할 수 없기에...


위대한 성공과 승리는 절대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다수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중요한 건 그 대의명분에 따르는 사람들 또한 그 뒤에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욕망을 알게 되고 그것이 성취될 수 있는 가능성에 더 끌리게 된다. 과거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자신이 모시는 자가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었다. 그 기대와 희망에는 자신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었다. 우리가 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길 바라는 가는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기만을 위한 대의명분


어쩌면 우리는 고귀한 가치를 앞세워 우리의 욕망을 채우려는 기만전술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타인에게 이성적인 이유(서평참조)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로 인해 가진 것(부, 권력, 명예)을 다시 모두 내려놓고 모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과연 그럴 자가 누가 있겠는가? 더욱이 가진 것이 많아지고 권력이 높아지면 그 낙수효과를 누리는 자들 또한 많아지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내려놓을 수조차 없어지게 된다. 지켜야 할 것들에는 물질뿐만 아니라 사람들(가족, 식구, 이해관계자들)까지 함된다. 이 모든 것들이 촘촘한 그물망처럼 엮여있다. 이제는 놓고 싶어도 놓을 수도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게된다.


과거 예수는 어땠는가? 사람들이 가장 우러러볼 때 가장 낮은 죄인이 되었고 스스로 죽음을 자처했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죽음이라는 것이 생명이 끊어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문명사회에서는 물질을 가지지 못한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울 때가 많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육체의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정신의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유일한 존재이다.


"돈을 주는 자가 아닌 시간을 내어주는 자와 함께 해라"

                                                 - 글 짓는 목수 -


사랑의 언어에는 5가지가 있다. 대화, 관심, 서비스(봉사), 스킨십 그리고 시간이다. 나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은 무한대로 불어나는 가치이지만 시간은 제한된 가치이다. 인간은 희소한 것에 가치를 둔다는 기본적인 경제 논리는 이해하면서 왜 돈을 위해 시간을 내어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 또한 모순이다. 덕분에 산업자본주의라는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밥 사주세요 형님!!"

"싫은데 돈 없어, 그 대신 밥을 만들어 줄게"


밥을 사는 것은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지만,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내어주는 행위는 시간과 봉사를 내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집에서 조촐한 가정식 밥상을 내어주는 것보다 가치가 높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아니던가. 돈은 보상의 언어일지 모르지만 사랑의 언어는 될 수 없다. 돈을 주는 자보다 시간을 내어주는 자가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돈을 쥐어주는 자에게 시간과 몸(노동)을 헌납한다.


가난이 싫은 본질적인 이유


가난이 야속한 것은 없어서가 아니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베풀 수 있는 기쁨을 빼앗아 가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 베풂이 함께하는 시간과 봉사헌신이었지만 지금은 돈과 물질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수많은 종교는 과거 함께하는 시간과 서로 봉사 헌신하며 신을 찬양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헌금을 더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도 결국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난은 인간을 관계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베풀 수 없기에 만남이 부담스럽고 불편해지는 것이다. 호주머니가 가벼우면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지는 것은 물질문명이 만들어낸 현상 중 하나이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만연해지는 현상 중의 하나가 개인주의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Kill boksoon

"힘 있는 자를 더 힘 있게 만들어 주니까"


                              - 영화 [길복순] 중에서 -


또한 이 개인주의는 기존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개인주의 시대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기에 전체와 시스템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인다. 그 사이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은 그들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건 그들이 새로운 규칙(법, 제도, 시스템)을 손쉽게 만들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규칙들은 그들에게 더 큰 힘을 쥐어준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마태복음 13:12] -


이건 성경에 있는 구절과도 흡사하다. 물론 이 구절이 부와 권력만을 뜻하지는 않지만 이것 또한 이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가난한 처지로 떨어질 사람을 교육시키는 것은 곧 그를 반항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중에서 -


개중에 이런 세상을 이상하게 여기는 자들이 생겨난다. 다만 그들은 가지지 못한 부류에 속해 있는 자들이다. 그 자본주의 세상의 이치를 늦게 깨우친 자들이다. 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은 그런 자들을 좋하하지 않는다. 지킬게 많은 자들은 차라리 똑똑하진 않아도 충성스러운 자들을 더 선호한다. (물론 똑똑하며 충성스러운 심복을 원한다) 그들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보다는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하지만 못 가지고 똑똑하며 과도한 공정과 정의감에 차 있는 자들을 혐오한다.

Kill boksoon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문제를 없애는 거잖아, 안 그래?"

                                     - 영화 [길복순] 중에서 -


그래서 힘을 가진 자들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 문제를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을 선호하는 것 같다. 여론과 군중 심리를 조금씩 뒤흔드는 존재는 분명 사리분별이 뛰어나고 대의명분을 갖추었을 것이다. 거기에 선한 양심까지 겸비했다면 그들에겐 가장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 가진 자들의 논리와 명분이 힘을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불리해진다. 그럴 땐 무력과 폭력이 동원된다.


토론과 협의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의사결정 과정이지만 사실 현실은 힘의 논리에 의해 빠르게 속결된다. 그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태풍의 눈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고 우두머리를 먼저 쓰러뜨리는 것이다.


과거 예수도 그러했다. 대제사장들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논쟁으로는 그를 설득하고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신이 내린 자에게 신을 모독한 죄를 씌울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세상의 규칙을 만드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Kill boksoon

"저는 규칙을 어길 수 없습니다. 왜냐 제가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 영화 [길복순] 중에서 -

                                                            

규칙은 변한다. 5년마다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가 바뀌면, 회사의 CEO가 바뀌면, 학교의 교장이 바뀌면, 가정의 부양자가 바뀌면 그 국가와 회사와 학교와 가정의 규칙은 바뀐다. 규칙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그건 부와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들이 그들을 위해 누리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은 때와 상황에 따라 규칙을 만들고 또 바꾼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권한을 가지지 않은 자들에게 구속력과 강제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가진 자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도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갈라디아서] 3:11 -


우리는 세상에 속해 규칙과 시스템을 지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만약 이것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정신적 자유까지도 박탈당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었다면... 강한 규칙과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은 표현의 자유까지도 박탈당한다. 언젠가는 뇌과학이 발달해 그런 상상의 자유조차도 허락되지 않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왜 우리가 끊임없이 평화롭고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외치면서도 항상 전쟁과 불의와 불신이 만연하는 세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지킬게 많다는 건...


서두에 첫 문장이 그 답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가진 게 많아지면 지킬게 많아지고 지킬게 많아지면 지키고 더 가지기 위해 다수를 기만하고 기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강제력이 있는 규칙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며 그 규칙과 시스템도 자신들이 만들 수 있는 자리에 올라야 하는 것이다.


가진 게 없다면...

이 모든 게 의미가 없다.



[글짓는 목수 유튜브 계정]

https://youtu.be/_Ip155-Od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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