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추천으로 우연히 보게 된 영화는 우연찮은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Ost(스즈메의 문단속 ost)가 울려 퍼지며 엔딩 스크립이 올라간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한참을 멍하게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위의 첫 문장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영화는 나에게 세 가지 키워드를 떠올리게 했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그 세 가지 단어는 인연과 사랑 그리고 구원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기독교적 세계관과 많은 부분이 겹치고 있음이 느껴졌다. 감독은 분명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제 그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인연(因緣, Destiny)
신카이 마코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너의 이름은...]을 기억한다. 나는 이 영화를 5번은 본 듯하다. 영화는 남녀의 육체와 정신(영혼)이 바뀌는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이어지는 남녀의 인연을 얘기하고 있다.
[너의 이름은...] 중에서
한국에는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삼신할머니가 발목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을 묶어놓았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온다. 그 인연의 끈이 연인(戀人)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인연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인생의 동반자 혹은 솔메이트를 생각하게 되는 건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너의 이름은...] & [스즈메의 문단속]
[너의 이름은...] 영화에는 붉은색 끈이 자주 등장한다. 미츠하의 머리 끈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끈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의 교복 끈과 이어진다. 감독은 끈을 통해 인연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 내내 실낱같은 인연의 끈은 점점 좁혀지며 결국 만나게 된다. 서로는 조금씩 이 끈이 당기면서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끈을 놓지 않는 이상 만나게 되어있다. 다만 누군가는 그 끈이 길어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누군가는 짧아서 일찍 만나는 것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주친 인연은 알 수 없는 끌림을 가져온다. 표현할 순 없지만 계속 의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순간임을 무의식이 기억한다.
[스즈메의 문단속] 중에서
영화 속 스즈메와 소우타의 첫 만남 또한 그랬다. 서로가 인연임을 알아챈다. 스즈메는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인연임을 직감하고 소우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건넨다. 스즈메는 그 강력한 끌림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를 찾아 나서고 그렇게 그와의 동행이 시작된다.
이건 마치 과거 예수가 제자들을 하나둘씩 만나는 과정과도 흡사해 보인다. 제자들은 모두 알 수 없는 놀라움과 끌림으로 그와의 끊을 수 없는 인연임을 눈치채지만 예수는 이미 그들이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온화한 미소로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너의 이름은...] 중에서
"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을 잇는 것도 무스비"
- 영화 [너의 이름은...] 중에서 -
[너의 이름은...]에서는 '무스비(むすび)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무스비는 '묶다, 매듭짓다'는 의미의 일본말이다. 인연의 끈이 이어지면 서로 매듭이 되고 묶인다. 그럼 이 끈은 이제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강력한 인장력(引張力, tensile force)을 가지게 된다. 또한 매듭은 당기면 당길수록 더욱 강력하게 묶이게 되는 특징이 있다. 혼자는 쉽게 끊어지지만둘이 엮이면 혼자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동반자가 있으면 시련과 위기를 쉽게 견뎌낼 수 있는 인간의 모습과도 같다. 사람 인(人) 자가 두 개의 끈이 맞닿아 엮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신은 인간을 홀로 완전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이다.
사랑(愛, Love)
인연은 사랑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경험을 선사한다. 불교에서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있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은 모두 때가 이르러야 만나고 변하게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시기에 따라 함께하는 인연에 의해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나를 잃어가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탄생과 동시에 타인의 손에 맡겨져 자라날 수 밖에 없다. 부모를 통해 세상을 보고 배우게 된다. 어려서는 부모가 그 역할을 하지만 부모는 우리가 이 땅에 온 소명을 알게 해주는 존재가 아닐 수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를 알게 해주는 롤모델이 필요하다. 그건 우리가 사회에서 말하는 멘토일 수도 있고 종교에서 말하는 성인 같은 신적인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존재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 맞을 수 있겠다. 그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소명이 아닌 세상의 유혹과 욕망에 이끌리는 숙명을 쫓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를 나답게 만들어 줄 롤모델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롤모델은 부와 명예 혹은 권력을 가진 자들 즉 세상에 성공의 길을 가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내가 가야 하고 있어야 할 곳을 깨닫게 해 줄 존재를 얘기한다.
우리는 이 롤모델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부모가 자녀에게 베푸는 아가페 사랑을 얘기한다.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도 같다. 스즈메는 그런 사랑을 소우타에게서 느끼게 된다.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나버린 엄마의 사랑을 그에게서 확인한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어머니와의 과거 추억들을 플래시백(flashback)으로 보여준다.
[스즈메의 문단속] 중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요한복음] 13:34 -
예수의 궁극적 계명은 사랑이다. 예수의 인류애는 어머니의 모성애와 닮아 있다. 감독은 그것을 말하고자 한 듯 보인다. 소우타의 희생과 어머니의 사랑이 계속 오버랩된다. 사랑의 시작은 부모에서 연인(롤모델)의 사랑으로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짐을 얘기하고자 한 것이다.
스즈메는 소우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이 가야 할 길(소명)을 알게 된다. 이것이 내가 서두에 "You make me who I am"으로 이 글을 시작한 이유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한다.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다. 운명적인 인연, 즉 롤모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연은 수고와 인내의 사랑을 통해 소명과 진리를 일깨워주게 준다.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차가워지는 것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사랑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것을 이 영화를 통해 알리고자 했다. 사랑이 사라져 가는 세상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이하고 종말로 향해감을 보여준다. 이건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떠올리게 한다.
구원(救援, salvation)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인연과 사랑을 통해 구원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과거 작품들은 대부분 인연과 사랑을 얘기했다. 판타지적이고 운명적인 인연과 사랑을 그만의 특유하고 감성적인 연출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여태껏 그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없었다. 이전엔 사랑 그 자체를 표현하는데 그쳤다면 그는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습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줬다.
영화 [인터스텔라] 중에서
이건 크리스토퍼 놀란이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를 통해 과학을 통한 인류구원을 얘기하는 듯했지만 사실 인류의 구원은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그런 통찰을 보여준다. [인터스텔라]는 주인공인 쿠퍼의 딸에 대한 부성애를 보여줬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모성애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쿠퍼와 소우타는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처럼 둘 또한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을 따른다.
소우타는 악의 재앙이 차원의 문을 넘어오는 것을 막는 문지기(Locker)의 역할로 나온다. 그리고 스즈메 또한 그 역할을 이어받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경의 내용을 틀어버렸다는 것이다.
과거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십자가를 같이 짊어지지 않았다. 모든 제자들이 그의 죽음을 목도하고 외면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스즈메는 그와 함께 죽음을 불사한다. 이 점이 성경의 내용과 다른 점이다. 성경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었지만 영화는 사랑을 받은 제자가 다시 예수를 구원하는 완전히 새로운 결말구도로 이어진다.
이건 아마 감독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류의 종말(선택받은 자들만의 구원)이 아닌 또 다른 구원을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깨닫고 사랑으로 다시 인류를 재앙과 종말로부터 다시 한번 구원되길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영화는 시종일관 일본의 빈번한 지진을 보여준다. 과거 지진과 쓰나미로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과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여주며 그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