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마태복음 5:44]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이 있을까? 증오가 사랑으로 변하는 기적 같은 일은 아직 나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기가 막힌 스토리는 정말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 상상을 스토리로 만들었다. 시작은 분노와 증오였지만 그 마지막은 연민과 사랑이었다. 6시간(10부작)에 걸친 짧지 않은 장편의 드라마가 끝나고 머릿속에 떠오른 구절이었다. (스포일러 주의)
[BEEF, 성난 사람들] [Beef, 성난 사람들], 우연찮은 계기로 보게 된 장편 드라마였다. 한번 재생된 드라마는 쉽게 끊어낼 수 없다. 그래서 난 웬만하면 드라마는 손을 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뉴스에서 우연히 잠깐 소개된 영상이 나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결국 해가 기울어가는 주말의 늦은 오후 시작한 드라마는 결국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적지 않은 여운을 남겼다. 그 이유는 드라마가 재생되는 동안 그 스토리가 현재 내가 호주에 와서 경험한 것들과 적지 않은 부분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삶을 작품 속에 잘 그려낸 작품이다. 나 또한 백인들이 개척한 또 다른 대륙인 호주에 머물면서 드라마 속의 여러 장면들에서 적지 않은 공감을 받았다.
영화 [미나리] 중에서 스티븐 연, 한국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제 미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대세 한국계 배우가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1.5세대이다. 외모나 한국어는 완벽한 한국인이지만 그의 정신은 한국과 미국이 반반 섞여 있다. 그래서인지 [미나리]를 비롯해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는 그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그의 삶이 영화에 고스란히 스며든 것이 아닐까. 드라마의 제작을 맡은 이성진 작가와 스티븐 연이 대화 중에 난폭운전(Road rage)을 경험을 얘기하다가 이 스토리를 구상해냈다고 한다.
영화는 정말 사소한 시비(로드레이지)로 인해 벌어지는 한국계와 중국계 아시아인은 치열한 복수극을 다룬 이야기이다. 이민 1.5세대로 자라온 두 남녀는 미국 사회의 중산층과 하류층을 대표한다. 그들은 치열한 이민 사회에서 어떻게든 상류와 중산층으로 올라가려 발버둥 치는 이민자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타향만 리를 떠나왔지만 삶은 어디서나 만만치 않다. 때론 더 많은 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참고 견디는 삶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또한 그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여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현실에서 계속 쌓여온 스트레스가 길에서 마주친 상대를 향해 폭발하고 만다. 그렇게 분노을 안고 사는 사회의 비주류는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부러움이란 결코 편안해질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걸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감정, 즉 분노나 혐오, 원망 등으로 번역한다."
-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치열한 경쟁사회의 동력은 부러움(시기심)이다. 계층 간의 부러움을 자극해 경쟁을 심화시키고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도모한다. 모두가 먹을 게 없고 못살면 동지가 되지만 누구는 호화로운 주택에 진수성찬을 즐기고 누구는 단칸방에 라면만 먹으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다. 자연스레 위화감과 적대감이라는 감정이 싹트고 계층 간의 벽을 만들어 낸다. 그렇기 때문엔 인간은 '만인은 평등하다' 법조문의 말이 무색하게 인간이 사는 세상은 물의 흐름처럼 상류, 중류, 하류로 구분되고 이 경계 넘어서 올라가는 것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탁해지고 오염되며 치열하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마치 연어처럼 평생을 거친 물살을 가르며 상류로 올라가려 발버둥 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류에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물은 더 탁해지고 수중 이산화탄소 농도와 질소 함량만 증가할 뿐이다. 더욱 숨쉬기 힘들어질 뿐이다. 그렇게 수많은 연어는 치열하게 올라가다 함께 죽어간다. 다행히 상류에 도착한 몇몇 연어들만이 알을 낳고 바로 죽어버린다. 이건 마치 인간의 삶과도 흡사해 보인다. 부모가 어떻게든 더 맑고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자녀가 살게 해 주고픈 마음과 같다. 아이러니하지만 세상(지구)은 더 맑고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은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하지만 자연의 법칙은 언제나 인간의 세상에도 적용되고 있다. 주류(상류) 사회는 그들의 영역이 오염되길 원치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피라미드 구조를 유지시킬 시스템을 견고하게 구축하고 발전시켜 나간다. 그래서 유토피아는 항상 꿈과 이상(理想) 속에만 가능할 뿐 현실은 항상 그 반대를 향해간다. 뭐 그래서 꿈과 이상이 더욱 의미 있고 간절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민자의 삶
나 또한 호주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과거 백인 부부가 운영하는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그 회사는 한국인과 인도인 그리고 호주인을 현장 직원으로 데리고 있는 회사였다. 백인 사장 부부는 한국인 직원들을 선호했다. 그래서일까 처음 사장내외는 나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그도 그렇다시피 한국인들의 일하는 방식인 빠르고 효율적이면서 더 오래 많이 일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 호주 회사는 그렇게 과거 한국직원들을 많이 고용해 왔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비자만 받고 나면 모두 그 회사를 떠났다고 했다. 그러니까 대부분 울며 겨자 먹기로 비자를 위해 불합리한 근무 환경을 참고 견디며 버틴 것이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분위기가 다른 직원들과의 불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한국인 직원들은 다른 직원들 위에 올라서고 싶어 했다. 그들은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더 많은 시간 일하는 것을 다른 직원들에게도 종용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장은 그 모습을 방관하며 한국 직원들을 뒤에서 지지하는 듯했다. 이건 과거 내가 군생활과 회사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겪어왔던 모습이다. 결국 이런 모습은 이 타향만 리까지 한국인을 타고 넘어왔다. 사장은 한국인들이 일하는 형태가 회사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 직원과 다른 직원들 간의 불화는 심해지고 서로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그 가운데 끼어 난처한 상황을 경험 적잖이 경험했다. 난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다. 나는 데모도로 일하면서 인도인들과 함께 일할 때도 있었고 한국인과 일할 때, 혹은 백인과 일할 때도 있었다. 각자 문화가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달랐다. 인도인 직원과 백인 직원들은 다른 한국 직원들의 거만함을 비난하는 말을 나에게 쏟아내었고 한국직원들은 나에게 인도직원과 백인직원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그때그때 누구와 일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방식에 맞춰서 일할 수밖에 없었기에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가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난 체력과 근력 빼고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난 당신이 이 회사에서 절대로 비자(영주권)를 받지 못하게 할 테니까 그렇게 아세욧!"
그런데 이미 그 회사에서 기득권이 된 한국 직원들은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빈대 같은 나의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를 회사에서 쫓아낸 자는 백인 사장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민족도 동포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철저하게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BEEF, 성난 사람들] 중에서 그날 이후 어느 주일 예배당에서 찬양 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당황스러웠다. 그 눈물은 너무 많은 감정과 복잡한 생각을 머금고 있었고 뜨거웠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노래를 토해내었다. 신기한 건 그 눈물이 그 복잡하고 괴로운 생각을 씻어내려가는 것 같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모습에 공감할 수 있었다. 눈물과 슬픔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홀로 눈물 흘리고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슬픔은 온전히 느낄 때 비로소 사라진다. 그 과정이 바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과도한 경쟁과 효율 그리고 분열
만약 내가 한국인들 혹은 호주인들만 있는 회사에서 일을 했다면 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한 가지 분위기에 따라가면 되니까 말이다. 문화와 가치관이 다른 민족이 함께 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면 더욱 그렇다. 조화와 협력은 이해와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와 배려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비효율적이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백인 사장 부부가 더 얄미워 보였다. 그들은 그냥 조용히 뒤에서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방관하며 한국직원들이 만들어 가는 치열한 경쟁 시스템을 통해 회사의 이익을 도모하려 했지만 결국 과도한 경쟁이 분열을 초래했다. 사장은 그런 상황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BEEF, 성난 사람들] 중에서 [성난 사람들] 드라마에서도 주류 사회로 올라가기 위한 비주류 간의 싸움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주류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주류 사회를 더 풍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그렇게 주류사회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간다. 하지만 드라마는 보여주고 있다. 너무 치열한 시스템은 결국 주류사회까지 무너뜨릴 수 있음을... 드라마의 결말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서로 물어뜯던 비주류는 결국 그 타깃을 주류에게로 향한다. 결국 최상류 사람들은 어이없게 최후를 맞이한다. 이 결말은 영화[기생충, Parasite]의 결말을 떠올리게 했다. 기생충들끼리 물어뜯다가 그 칼이 주류를 향한다. 이것 또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영화 [기생충] 중에서 과거 역사는 항상 그렇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전복시키려는 스토리였다. 인간 세상에서 계층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지만 그 계층 간의 괴리가 너무 커지면 어느 순간 물어뜯는 자들끼리 뭉치기 시작한다. 중간층(중산층)이 사라지고 양극화가 심해지면 생겨날 수밖에 없는 문제다. 과거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 중산층이 성장하며 허리가 튼튼했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부딪치는 완충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부실한 허리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곳곳에 디스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BEEF, 성난 사람들] 중에서 "Do you really think it's possible to love someone unconditionally?"
(당신은 정말로 누군가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 [BEEF, 성난 사람들] 중에서 -
에이미는 배우자와의 관계 때문에 심리 상담 중에 했던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현실의 조건에만 맞춰 살아오면서 잃어버리고 있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현실의 삶은 조건(욕망)과 조건 충족(욕망 충족)의 과정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아왔다. 배우자와 관계 또한 그중 하나였다. 더 이상 배우자가 채워주지 못하는 욕망을 다른 곳에서 찾았고 배우자를 기만하고 외도를 저질렀다.
과연 우리는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조건 없는 사랑은 언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
원수를 사랑하려면...
과거 그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 그 사랑은 자연에서 시작했다. 원래 둘은 모임에서 만나면 항상 티격태격하는 사이였다. 온전한 자연 속에 덩그러니 놓인 인간은 완전히 평등해진다. 만약 그 자연이 재난의 상황을 가지고 왔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 남자와 그 여자는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다. 가시덤불을 같이 헤쳐 나가면서 서로는 점점 처참한 몰골로 변해가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자는 발목까지 삐어버렸다. 해는 기울어 가고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서로는 온전히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하염없이 걸어야만 했다. 어둠 속에서 둘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공포가 엄습할수록 서로에 대한 알 수 없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산밑 인가의 불빛을 발견하고 살아서 숲을 벗어났을 땐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 자작 소설 중에서 발췌 -
드라마의 마지막도 그러했다. 원수였던 에이미(앨리 웡)와 대니(스티븐 연)는 사막 같은 불모지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생사를 함께하는 처지에 놓인다. 둘은 처음엔 서로를 죽이려 했지만 다리를 다친 에이미와 팔이 부러진 대니는 이제 둘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서로 전략적인 공조를 통해 살길을 모색한다.
[BEEF, 성난 사람들] 중에서 둘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독극물인 줄 모르고 먹은 식물의 열매 때문에 사경을 헤매게 된다.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둘은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상황 속에서 서로의 과거를 돌아보며 내면에 숨겨두었던 상처들을 끄집어낸다. 어차피 죽을 텐데 모두 얘기한다. 그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가식으로 뒤덮여 있던 현실이 아닌 서로를 온전하게 드려다 볼 수 있는 처절한 상황이 서로에게 연민과 사랑을 싹트게 만들었다.
아마 감독은 마지막에 둘이 같이 죽어가는 상황을 설정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욕망이 사라진 상태, 즉 죽음이 목도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전히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얘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인간에게 욕망이 없을 순 없다. 문제는 이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따르는 것은 세상이 말하는 발전과 번영의 동력이지만 내면의 영혼이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으로 태어나 끊임없이 이 영혼을 죽여가며 결국 육체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유혹과 욕망이 꿈틀거리는 곳에서는 조건 없는 사랑은 켤코 피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BEEF, 성난 사람들] 중에서
(글짓는 목수 - 유튜브 계정)
https://youtu.be/pNMX7pC-n2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