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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29. 2023

사랑의 시간차

[시월애]를 다시 보고 난 후...

"사람에게는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데요,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 숨길수록 더 드러나기만 한데요"

                     - 영화 [시월애, 時越愛] 중에서 -

   

오랜만에 추억의 영화를 다시 봤다. 쓰고 있던 소설이 길을 찾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자판 위에 손가락을 얹혀놓고 껌뻑이는 화면의 커서를 한동안 지켜보기를 여러 번. 이럴 땐 생각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새하얀 화면을 들여다봐야 머리가 백지가 되어갈 뿐이다. 감성을 불러일으킬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런 땐 감성 충만한 멜로 영화가 제격이다. 그것도 요즘 대세인 판타지 멜로 영화로 감성과 상상을 채워보려 한다.




2000년에 개봉한 [시월애]를 기억한다. 해외에는 일마레(IL MARE)로 알려져 있다. 전지현이 그다음 해인 2001년에 [엽기적인 그녀, My Sassy Girl]로 대박을 치면서 상대적으로 이 영화가 빛을 보지 못한 것 같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으로 이 영화를 이른 아침 홀로 조용한 영화관에서(조조할인으로) 봤었던 것 같다. 당시 사람이 몇 없는 적막하고 깜깜한 영화관에서 혼자 눈물을 찔끔거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땐 (정말) 순수한 대학생이었다. 다시 보니 눈물은 나지 않는다. 나도 이제 메말랐나 보다. 다시 좀 적셔야겠다. 건조함은 노화를 촉진한다.

영화 [시월애]

서두에 전지현의 대사가 영화가 끝나고도 적잖은 여운을 남겼다.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에 대한 상념을 적어볼까 한다.


"콜록콜록"


사람들이 입과 코를 가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본다. 기침은 정말 참기 힘들다. 더욱이 요즘 같이 전염병이 창궐한 시대엔 더 조심하고 참아야 한다. 코가 간질거리고 눈알이 빠질듯하고 참으려 하면 할수록 얼굴과 표정에 드러난다. 기침을 하면 사람들이 멀어진다. 그렇기에 참으려 한다. 기침은 내가 아프다는 것이고 나의 아픔을 너에게 전달(전염)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감춰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간다.


"마음의 가난은 명상과 독서로 보충할 수 있지만 경제적 가난은 모든 선한 의지를 거두어가고 마지막 한 방울 남은 자존감마저 앗아간다. 빈곤은 예의도 품위도 없다."

                                                                                                

                       - 김승호 [돈의 속성] 중에서 -


가난도 견디기 힘들다. 기침은 짧지만 가난은 길다. 기침은 약을 먹으면 낫지만 가난은 약도 없다. 자본주의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상 이 돈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 가난하면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떠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난을 너무도 싫어한다. 그렇기에 설사 내가 가난할지언정 가난함을 들킬 수는 없는 것이다. 있어 보여야 사람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가난이 숨기려 들면 들수록 습관과 냄새와 표정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되어있다.

영화 [기생충] 중에서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고상한 정신이 깃들기는 어렵다."

                                                         - 공자 -


어른들이 왜 그렇게 일만 하며 삶의 대부분을 돈을 벌기 위해 살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견디기 힘든 가난을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배를 골아가며 살아봤던 자들은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겐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정신적 풍요와 여유를 희생해야 했던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외모와 허세 치중하는지는 어찌 보면 가난을 감추기 위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경제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 모두를 포함한다. 가난해도 외제차, 성형과 패션에 치중하고 빚에 허덕이더라도 번듯한 집이 있어야 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는 것들로 자신 안에 빈곤함을 감추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떠나가서 찾아올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빠지다"


물에 빠진 사람은 멀리서 봐도 티가 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빠지면 티가 난다. 영화 속 두 남녀 주인공은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나눈다. 동시대를 살지만 시점이 틀어져 서로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가질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랑이다. 짝사랑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짝사랑할 땐 처음엔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하지만 가지지 못하고 만질 수 없음이 길어지면 그 기대와 설렘은 고통이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과거의 여자(미래에 있는)를 현재에서 만난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할 수 없기에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 사랑하지만 사랑을 드러낼 수 없다. 드러내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사랑은 커져가는데 표현되지 못하기에 사랑은 곪아간다.  


"자신의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채, 자신이 숭배하는 이성 없이는 자신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 박찬국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중에서 -  


사랑에 빠지면 자신은 사라져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자리에 그녀 혹은 그라는 우상이 자리 잡기 때문이다. 그 우상을 향한 사랑 때문에 눈이 멀어 자신이 하고 있고 해야 할 것들, 즉 자신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우상의 존재가 자리 잡는다. 이건 마치 신을 향한 우상숭배와도 같다. 영화 속 남자는 아닌 걸 알지만 여자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려다 결국 자신을 잃어버린다.


사랑하면 사리분별이 흐려진다.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인 판단력이 무력해진다. 그렇게 원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만약 서로가 서로를 동시에 우상화하며 사랑에 빠진다면 우리는 강렬한 일체감과 황홀감에 빠져든다. 마치 신과 연결된 것처럼...

영화 [시월애] 중에서

사랑의 시간차


우리는 사랑이 스며들어도 사랑을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 사랑이 상대방에게도 스며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숨겨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첫눈에 서로가 빠져버리는 사랑이라면 좋겠지만 모두에게 그런 사랑이 찾아오진 않는다. 사랑은 대부분 시간차를 두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과거와 미래를 오고 가는 판타지적 설정으로 두 사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을 표현했지만 사실 이건 우리가 현실에서 겪고 있는 사랑을 극단적 혹은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은 과거에서 미래로 연결되어 있지만 현실에선 숨길 수밖에 없다.

 

사랑은 너와 나에게 동시에 스며들지 않는다. 시간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상대방에게 사랑이 스며들 때까지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숨기려 한다. 하지만 숨기고 있는 사랑은 커져만 간다.


마치 기침과 가난처럼...


[IL M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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