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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Apr 25. 2023

작업 전환의 대가

[원씽] 게리 캘러

"작업 전환에는 대가가 따른다"

                                          - 책 속 인용문 -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인상에 남는 문구이다. 우리는 많은 일들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만큼 많은 집중과 몰입을 하고 있을까? 많은 일은 한다는 것은 그 많은 일과 작업들을 옮겨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생각지 못한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몰입의 순간이다. 몰입의 순간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신의 속성을 주었는데 아마 몰입이 신의 속성에 가장 근접해 있는 상태가 아닐까? 


몰입(沒入)과 집중(集中)


몰입의 순간은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인지 못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집중은 반대로 시간과 공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몰입과 집중은 다른 개념이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혼동한다. 집중은 한 가지 사물이나 행동(동작)에 마음과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이고 몰입은 한 가지 일이나 주제에 흥미와 열정을 가지고 몰두하고 감정적으로 깊게 연결되어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운전을 배우는 자를 생각해 보자. 내 차 주변의 상황, 즉 전방의 신호와 교통표지판을 확인하고 다른 차들과 보행자들의 움직임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의 차의 속도와 방향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집중이다. 몰입은 무언가 한 가지 현상이나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그와 관련된 기억들을 인출하고 연결하며 새로운 생각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다. 혹은 그런 생각들이나 현상들을 새로운 시공간의 스토리로 상상해 내는 과정들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  집중은 정신이 각성된 상태이고 몰입은 이완된 상태이다. 


장시간의 몰입


2년 전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던 시기 이곳 호주도 락다운으로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그때 나는 시드니의 어느 작은 골방에 갇혀서 거의 두 달가량을 칩거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활달한 성격이라 한 곳에 갇혀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겐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몰입이었다. 당시 나는 태어나서 가장 긴 시간의 몰입을 경험했다. 이른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밥도 먹지 않고 글만 썼던 기억이 선하다. 그전에도 글을 쓰긴 했지만 항상 몰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 로그 아웃하는 일상의 상황을 반복해야 했다. 일을 해야 하고 사람도 만나고 카톡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수많은 역할과 일들로 인해 장시간의 몰입 환경이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멈춤은 몰입을 가져온다.


전염병의 창궐은 그런 일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온전한 격리의 시간을 주었다. 락다운과 함께 세상이 멈추고 시작된 격리의 시간은 처음에는 고통이었다. 고통을 어떻게 벗어날까 고민하다. 게임도 해보고 책도 보고 했지만 기나긴 격리의 시간을 견디기엔 역부족이었다. 게임을 하고 난 후엔 허무감과 몽롱함이 찾아들었고 출력 없는 입력만 계속되는 독서 또한 장시간의 몰입은 쉽지 않았다.


새로운 장편 소설을 구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두 번째 장편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부엌에서 커피 한잔을 타서 방안 안락의자에 앉아 작은 백열 스탠드만 켜놓은 채 새로운 세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런 일상의 방해가 없으니 몰입은 계속되었다. 몰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하루종일 먹지 않아 밀려드는 허기 때문이었다. 허기도 허기지만 오랜 시간 몰입 후의 나의 몸은 마치 혼이 밖으로 빠져나간 듯 축 늘어졌다. 그렇게 저녁까지 몰입 후 먹는 한 끼의 식사는 정말 감사할 수밖에 없는 맛과 행복감을 주었다. 음식의 모든 열량과 에너지가 온전히 몸속으로 흡수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때 인간은 왜 하루 세끼를 먹으며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기업농과 식품가공업으로 남아 넘치는 식품을 소비하기 위해 만든 세상의 규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고된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칼로리를 다 소모하지 못한다. 못 먹어서 죽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북한이나 아프리카 난민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들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기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현대사회는 잘 먹어서 병들어 죽는 것이 대부분이다. 비만과 암은 모두 많이 먹고 가공된 음식을 많이 섭취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몰입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어쨌든 하루종일 몰입과 하루 한 끼의 식사는 내가 가난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해 주었다. 당시 호주정부에서는 팬데믹으로 인한 구제책으로 호주에 체류 중인 자들(기존 소득세를 납부한 이력이 있는 자들)에게 재난 지원금을 나눠주었는데 나 또한 지원금을 신청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한 푼의 지원금도 받지 못했다. 벌어둔 돈을 렌트비와 생활비 학비로 모두 까먹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런 걱정들에서 완전히 벗어난 몰입의 시간 속에 빠져 있었다. 일상과 관계에서 벗어나니 비교할 대상도 바라볼 대상도 없었다. 현실을 떠나 있는 몰입이 궁핍이라는 존재를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몰입은 알 수 없는 중독처럼 계속해서 빠져들고 싶은 것이었다. 매일매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몰입에서 빠져나온 후 남겨진 수많은 활자들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몰입 or 중독?

그러고 보면 적잖은 사람들이 게임에 중독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다만 게임에 몰입하는 것이 다른 몰입과 다른 점은 능동적이 아닌 피동적인 것이고 틀을 깨는 창조적인 것이 아닌 틀에 갇힌 구속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상상을 통한 몰입은 현실을 바꾸려 혹은 새롭게 보게 하지만 게임은 현실에서 계속 멀어지게만 하는 듯하다. 어쨌든 능동적 혹은 피동적 몰입 모두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점은 같다. 인간이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속적인 몰입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멀티태스킹은 업무 속도를 늦추고,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

                                                                             - 책 속 인용문 -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생계를 위해 다시 일터로 나가야 했고 관계와 일상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몰입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몰입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일까 다시 그 시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일상에서 다시 온전한 몰입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낮에는 일을 해야 하고 밤에는 피곤함에 절어 몰입의 시간이 휴식의 시간으로 변해 버렸다. 일상의 패턴으로 생활리듬이 바뀌면서 다시 그때의 몰입으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몰입을 시작하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고 몰입을 해도 그때처럼 길게 몰입을 할 수가 없다.

Multi tasking

인간은 일상에서 항상 멀티태스킹을 강요받고 그것에 능한 것이 능력 있고 효율적인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멀티태스킹은 그저 많은 것을 하게 했던 것뿐 의미 있는 것에 깊고 넓은 통찰이나 사고를 방해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많은 역할과 일들을 강요하며 우리가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30분 뒤에 잡혀 있는 약속 때문에 몰입에서 점점 빠져나와 잊고 있던 시공간을 다시 인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매너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강제 로그 아웃 해야 한다.


몰입의 시간이 갈수록 미지의 세계로


장시간의 몰입을 경험하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몰입의 빈도와 시간이 늘어갈수록 몰입에서 얻는 상상과 통찰이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이게 내가 몰입에 더 집착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몰입이 깊어지면 전혀 연관이 없을 것만 같던 것들이 연결되고 전혀 떠오르지 않던 지극히 사소했던 오래전 기억들도 불현듯 떠오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이 지금 내가 몰입하던 생각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게 너무 신기하다. 뇌는 깊은 몰입의 순간 풀가동 되며 내가 생각하는 것들에 필요하는 것들은 찾아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단서를 던져준다. 그럼 나는 그 단서를 이용해 빠르게 검색을 해서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 연결시킨다. 요즘은 지식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다만 내가 뭘 찾고 싶은지 또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 찾는 것뿐이다. 지식정보사회는 끝났다. 이젠 질문상상사회가 도래했다. 답은 모두 존재하고 답을 찾을 수 없을 만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간이 여태껏 없는 신인류의 표준이 될지도 모른다.

Fucuing one thing

"바쁜 일상은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


우리는 매일 바쁜 일상을 살아간다. 아침에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일어나 세수하고 아침을 먹으며 아이들을 챙기고 일터로 가서 이런저런 업무와 이해관계 속에서 어떻게 손해와 손실이 없이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일하고 관계를 가질지 고민하며 하루를 보내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씻고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챙기며 지친 몸을 누인다. 그렇게 하루가 시간에 쫓기듯 지나간다. 바쁘다 느끼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각성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소소한 의미와 행복을 찾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다만 문제는 이런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계와 성공이라는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바쁨 속에 머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이런 바쁨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몰입을 통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궁한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류의 번영과 발전을 가져왔다. 이 발전의 밑바닥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몰입(일이 아닌) 시간의 희생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우리를 바쁨 속에 몰아넣고 그것에 익숙해져 버리게 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무궁한 상상과 상념의 세계로 갈 수 있는 몰입의 기회를 빼앗아 버렸다.


워라밸과 우선순위


요즘 떠오르는 대세는 일과 라이프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일터에서 가정에서 또 다른 조직이나 관계에서 각 역할을 모두 다 잘 소화해 내며 살려고 노력한다. 그 말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살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역할과 책임들은 줄어들기보다 늘어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놓을 수가 없다.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무한한 책임만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놓아야만 진정으로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원숭이가 목이 좁은 항아리 속의 바나나를 손에 쥐고 빼내려고 하지만 움켜쥔 손은 목이 좁은 항아리를 빠져나올 수 없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놓아야 한다. 그리고 항아리를 던져서 깨뜨려야 함을 알지 못한다. 틀을 깨버려야 하는 발상만이 바나나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우리의 삶도 일상에 젖어있다보면 관성의 법칙에만 따라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관성은 법칙은 시간을 먹고 더욱더 견고해지고 가속되는 경향이 있다. 빠져나올 수도 멈출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길이 있을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도 있음을 알지 못한다.


작업전환의 대가(≒ 기회비용) 때문에...


이건 우리가 관성과 가속도를 멈추면 다시 0(zero)에서 시작해야 하는 기회비용 혹은 작업전환 비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것을 가장 혹독한 시련으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반평생을 해오던 방식과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과 또 다른 방향에서 시작해 다시 관성과 가속도가 붙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은 너무 힘들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존의 과거로 되돌아가고픈 향수가 오래도록 남아 자신을 괴롭힌다.


"라테는.. @!#$!%#%"


우리가 자주 쓰는 라테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를 비난하면 쓰는 유행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음 세대가 또 지금 세대를 향해 내뱉을 무한반복 유행어가 될 뿐이다. 과거에 얽매여 살고 있다. 과거의 축적이 현재의 나이지만 현재의 내가 불만족스럽다면 과거를 끊어내야 한다. 라테(Latte)는 마시고 소화시키는 것이지 다시 내뱉고 토해내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관성의 시간(과거)이 길면 길수록 방향과 작업의 전환은 힘들 수밖에 없고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방향과 작업이 전환되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생은 한 번이지만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면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관성에 따라 하나의 인생 속에서 영원히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며 다른 곳을 보지 못하기에 세상은 갈수록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갈등과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방향이 틀렸다면 큰 작업전환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실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작업전환의 비용을 줄이고 한 가지에 오래 많이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예상치 못한 큰 성과와 발견 그리고 성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정한 몰입을 할 수 없는 작업환경 속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반복적인 일과 멀티태스킹을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과거 나 또한 그런 일을 하며 우리가 습관처럼 말하는 '일 쳐내기 바쁜 삶'만 살아왔다. 물론 지금도 이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몰입을 경험한 이상 이것을 놓지 않고 계속 가져갈 수 있는 한 가지는 꾸준히 하려고 한다. 이것이 삶의 활력과 변화를 가져다주고 행복감을 증진시키고 있다는 것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가진 무궁한 상상과 몰입의 능력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작업환경에 놓여 있는가? 당장 눈앞에 돈과 생계를 위해 항상 각성상태를 유지하며 반복과 멀티태스킹으로 숨 가쁘게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대가(기회비용  작업전환의 대가)를 지불하고 다른 방향과 작업환경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세상의 온갖 유혹과 알림의 방해와 일상의 일과 관계 속에서 적지 않은 작업 전환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제는 이 작업전환의 대가를 줄여나가며 무언가 한 가지(The one thing)에 몰입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외부에 가치가 아닌 내 안에서 가치를 발견해야하지 않을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가치(Persnal Branding)를 만드는 것임을 믿는다.


당신만의 가치는 무엇인가?


THE ONE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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