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구절이다.(무려 62번)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법칙들이 있다. 자연의 법칙도 있고 인간이 만들어낸 법칙도 있다. 우리가 세상에 빛을 본 이후 시간이 흘러갈수록 이 수많은 법칙들에 의해 점점 깎이고 다듬어지며 법칙들에 순응해 간다. 현실은 수많은 법칙들로 점철되어 삶을 조여 온다.
소설은 금복과 춘희(딸) 두 여자의 삶을 통해 수많은 세상의 법칙들을 보여주고 있다.
또 맨부커상?!
적지 않은 분량의 장편 소설을 읽었다. 사실 [고래]는 그전부터 읽어볼 요량으로 항상 나의 전자책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차일피일 다른 일들에 미뤄져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천명관의 [고래]가 영국의 맨부커 상(세계 3대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다.
과거 한강의 [채식주의자](서평참조)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한국 소설로는 최초로 맨부커상(2016)을 수상했다. 그때 읽었던 [채식주의자]를 기억한다. 5년 전쯤이었다. 호주에 오기 전 한국에서 어느 독서토론회 모임에서 읽었다. 당시 그 책도 너무도 외설적이고 난해한 내용으로 당시 독서 초보였던 내가 이해하기엔 쉽지 않은 소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5년이 지나 다시 읽은 [고래]는 그때와는 사뭇 다른 영감을 불러온다. 이건 아마도 내가 5년간 꾸준히 독서를 하며 의식과 감상 수준이 올라온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고래]의 맨부커상 최종후보 선정 뉴스에 미뤄뒀던 소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 흡입력과 후폭풍은 대단했다. 그리고 작가가 부러웠다. 어떻게 이렇게 방대한 스토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펼쳐질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분명 무의식 혹은 내면에 잠자고 있던 모든 것이 거침없이 쏟아내었을거란 느낌을 받았다.
고래를 읽고 난 후 알 수 없는 먹먹함이 찾아든다. 정제되지 않은 표현들과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묘사, 특히 성적 묘사는 눈을 의심할 정도로 파격적이다. 그리고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옛 단어들과 한자어들로 뭔가 난해함까지 더했다. 하지만 그 전체적인 스토리가 너무도 흡입력이 강하고 탄탄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계속 읽게 된다.
뭘 써야 할까?
참, 한마디로 뭐라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다. 내가 여태껏 읽어왔던 소설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소설에는 힘이 있다. 인간의 내면을 필터 없이 헤집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성에 사로잡혀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어쩌면 다소 파격적이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보통 책을 읽고 나면 그 속에서 하나의 포인트나 주제를 끌어내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소설은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 어디서 무엇부터 집어내어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게 했다.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 소설 속 인용문 -
소설의 줄거리를 얘기하고 싶진 않다. 직접 보시길 권장한다. 내가 소설을 읽고 어떤 문장으로 감상을 시작해 볼까 고민하다가 결국 고른 문장이다.
소설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금복이라는 주인공의 삶을 중심으로 많은 인물들의 삶을 같이 보여준다. 모두가 자신만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이란 그들이 믿고 따르고 신봉하는 것들이다.
이건 어찌 보면 개개인의 진리에도 가깝다. 진리는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소설은 인간에게 있어 진리(진실)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
"이제 소설이 현실을 포착해 내는 건 불가능하다. 현실은 이미 커다란 허구가 된 마당에 그 허구에 허구를 보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 작가 천명관 -
작가 천명관은 이 소설을 쓰고 난 후 수상 소감(문학동네 소설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이젠 우리가 소설을 통해 현실 속의 진실을 알아간다기보다는 자신만의 진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엔 소설을 통해 시대상과 현실 속 진실을 허구라는 핑계로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허구로 뒤덮여 버린 세상에서 또 다른 허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 금복 또한 어려서 따라나선 생선 장수를 통해 광활한 세상 속으로 나아가며 자신이 알던 진실들이 계속 변해간다. 결국 자신이 믿는 진실은 시간을 먹고 계속 변해간다. 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돈을 믿고 누군가는 아직도 사람을 믿고 누군가는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 자신만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각자 다들 자신만의 진실과 진리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각기 다른 진실은 서로를 포용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세상은 화합과 조화보다는 갈등과 분열로 치닫는 것이다.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가장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 소설 속 인용문 -
작가는 소설을 빌어 말한다. 진실은 삶이 끝나고 나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눈을 감아봐야 아는 것이다. 그건 사실 누구도 알 수 없다. 알았다 한 듯 세상에 알릴 수도 없을 테니까.
"넌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난 어디에도 없어, 이미 난 오래전에 사라졌으니까"
"그럼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건 뭐지?"
"후후, 꼬마 아가씨, 그건 바로 너의 기억 속에 있는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넌 이미 사라졌는데..."
"그러니까 기억이란 신비로운 것이지"
"그런데 왜 난 사라지지 않지?"
"당연하지 넌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나도 빨리 사라지고 싶어, 여긴 너무 힘들거든, 그리고 너무 외롭고..."
"꼬마 아가씨, 너무 엄살 부리지 말라고 그래도 살아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야"
- 소설 속 인용문 -
소설 속 금복의 딸 춘희는 벙어리다. 그녀가 유일하게 말을 하는 장면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녀가 괴롭고 힘들 때 피어오르는 상상과 나머지 하나는 마지막에 그녀가 죽고 난 사후세계에서이다.
그녀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고통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깨달아가는 세상의 그 어떤 법칙도 그녀에겐 무용지물이다.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과 단절된 인간이다.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땐 그녀는 그냥 바보다. 그녀가 유일하게 깨닫는 세상의 법칙이라곤 어떻게 하면 가장 튼튼하고 빛깔고운 붉은 벽돌을 만들어 내느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 한 건 춘희의 엄마, 금복은 춘희와 반대로 현실 속에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모두 치열하게 이루어 가지만 나중에 결국 이 상상(헛것, 귀신, 허상)들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죽어간다.
소설을 읽으며 많은 고민을 했다. 과연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소설은 수많은 법칙들을 쏟아낸다. 사랑, 세상, 자연, 자본주의, 화류계, 무지, 중력, 구애, 비만, 관성, 유전, 무의식 등등 다 말하자면 너무 길다.
작가는 이 많은 법칙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공감시키기 위해 그 많은 스토리들을 만들어 내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스토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함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남으로 끔찍한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칠흑같이 어둡고 좁은 징벌방 안에서 마침내 자유를 찾아냈던 것이다"
- 소설 속 인용문 -
그건 바로 기억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이란 사실이 아니다. 기억은 변형된다. 춘희는 기억 속에서 죽은 점보(코끼리)와 대화한다. 불가능한 사실이다. 그녀는 기억을 통해 상상을 했던 것이다. 상상은 기억을 아름답게 하기고 하고 때론 기억을 무섭게 혹은 괴롭게도 만들 수 있다. 춘희에게 기억은 행복한 것이었고 금복에게 기억은 불행한 것이었다.
아마 작가는 기억(상상)을 통해 지옥 같은 삶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세상은 인간들이 만든 수많은 법칙들 속에서 서로를 괴롭히며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믿으며 계속 또 새로운 법칙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진실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추종한다. 이 과정은 계속 반복된다. 법칙들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끝이 없다. 이건 마치 인간의 욕망과도 같다.
"여기는 아주 고요해"
- 소설 속 인용문 -
춘희가 죽고 난 후 사후세계에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다.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니 고요해졌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랑하던 점보랑 재회했다. 그리고 점보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제 세상 모든 것이 발아래에 다 보인다. 그리고 둘은 빛의 속도로 끝없는 우주를 향해 뻗어 나간다. 둘의 형상은 점점 희미해져 사라진다. 모두가 자신을 버렸지만 기억 속의 점보는 결국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한다.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 소설 속 인용문 -
어쩌면 우리가 기억 속에서 자주 떠올리며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무언가는 우리가 죽음 이후에 만날 그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라 믿고 살지만 어쩌면 기억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간절히 원하는 것 혹은 누군가는 결국 기억 속 상상 속에서 존재하다가 결국 내가 보이지 않게 되면 그것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린 사라지는 거야, 영원히.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 네가 나를 기억했듯 누군가 너를 기억한다면 그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 소설 속 인용문 -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고 상상하는가? 현실에 얽매여 눈에 보이는 진실과 법칙들만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