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 목수 May 15. 2023

죽음을 생각하는 삶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려 하거나 치유하려 들면 안 된다. 그러는 순간 그 관계는 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책 속 인용문 -


우리는 사랑하면 상대방을 위해 많은 것을 도와주고 싶어 진다. 상대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고 자신이 알고 머물고 있는 세계로 넘어오길 바란다. 물론 사랑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세계로 잠시 넘어갈 순 있다. 하지만 다른 세계에 융화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사랑보다 더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스스로 변화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세계로 쉽게 들어오지 않는 상대에게 이내 실망이 밀려들곤 한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서로는 서로가 자신을 이해해 주길 원하고 자신의 세계에 융화되길 바란다. 그러면서 사랑은 갈등과 오해로 인해 서운함이 쌓여가고 이내 미움으로 바뀐다. 가까워지면 사랑이 더 깊어질 줄 알았지만 사실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더 쉽게 상처받고 화를 낸다.


오랜 세월 각자 자신의 세계 속에 살던 두 사람의 만남은 사랑이라는 불꽃 튀는 감정으로 시작되지만 그 이후에 다가오는 것은 두 세계의 충돌이다. 대륙과 대륙이 만나면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밀려오며 화산이 폭발한다. 그렇다고 삶과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 버티고 살아남으면 다시 평온이 찾아온다. 삶은 결국 버텨내는 것이고 사랑 또한 인내 없이는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삶도 사랑도 시간을 견뎌내야만 지속된다.




다시 김혜남 작가의 책을 집어 들었다.


내 나이 서른을 코 앞에 둔 29살의 청년 시절, 사회 초년생으로 일과 관계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몸은 피폐해지고 정신은 방황하던 시기였다. 우연히 서점에서 그녀의 책[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을 집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흡입력 있고 감성적인 그녀의 문장들이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며 나를 사로잡았다. 당시 독서와는 거리가 먼 나였지만 그녀의 책은 좀처럼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10년이 훌쩍 지나서 다시 읽은 그녀의 책은 또다시 그때의 감동을 불러온다. 시간이 흘러 청년시절의 깨달음이 주던 감동은 이제 공감과 동감의 감동으로 바뀐 듯하다. 지금 읽는 작가의 글들은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것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확인시켜 주는 듯한 느낌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재앙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내면에서 죽어 가는 것들이다"


                                             - 책 속 인용문 -

                                                                          

작가는 오래 시간 파킨슨 병을 앓으면서 항상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기분은 어떨까? 죽음에는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상치 못한 죽음이다. 사고나 재난으로 한 순간에 목숨을 잃는 것이다. 이건 자신의 의도와 삶의 태도와도 무관한 죽음이다. 선하고 바르게 살았든 악하고 그르게 살았던 이 죽음은 전자와 후자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삶을 찬찬히 되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는다. 물론 이런 재난이나 사고로 눈앞의 죽음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것들을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살아서 하지 못한 것들을 후회하고 눈물 흘리며 아주 짧은 회개의 시간만 주어질 뿐이다.


두 번째는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다. 이건 작가의 상황과도 같다. 고통과 함께 자신의 몸이 점점 병들어가고 자율신경계가 더 이상 말을 듣지 못하는 순간까지 경험하며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겠지만 그건 우리 같이 멀쩡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그런 것이다. 매일을 참기 힘든 병마와 싸우는 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삶에 대한 희망이 더 간절히 다가오게 된다.


죽음과 소망의 상관성


죽음과 고통 속에서 소망과 희망은 더욱더 꿈틀대는 법이다. 안락과 풍요 속에서는 희망과 소망보다는 권태와 불만만 더 쌓여간다.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죽은 자)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 입이다."

 

                               - [데살로니가전서] 3:14 -


예배시간 설교가 떠오른다. 과거 기독교 또한 그랬다. 복음은 과거 수많은 박해와 탄압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 깊이 뿌리내렸고 간절한 소망을 심어 줬었다. 죽음을 불사(不辭)하며 그 소망을 간직했고 사람들과 그 소망을 함께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가 공인(313년, 밀라노 칙령)되었다. 모두의 간절했던 소망이 이뤄졌다.  


하지만 소망이 이뤄졌다는 것은 또한 소망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기독교는 부패와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의 대리인을 자칭하는 자들이 권력과 부를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 죽은 자들보다 기독교가 성행하며 종교 전쟁과 마녀사냥등으로 죽은 자들이 더 많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13 -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하나님과 예수가 말한 궁극적 계명인 '사랑' 외치면서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상황이... 그들의 맹목적 믿음이 사랑을 짓밟고 있음을 몰랐다. 이건 분명 누가 봐도 예수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는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을 것이다. 기만 전술로 제자들과 후일을 도모했을 것이다. 그럼 이건 성경이 아니라 삼국지나 초한지의 스토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생활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했기 때문에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 책 속 인용문 -


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톨스토이 또한 작가처럼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책을 탄생시켰다. 남들 못지않은 여유로운 생활과 구색을 갖춘 가정과 직장 그 속에서 갑자기 찾아든 죽음,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죽음 앞에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후회가 밀려든다. 그건 삶에 간절한 소망이나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간절한 소망은 안락과 풍요가 찾아들면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린다. 우리는 종종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을 하곤 한다. 시간이 지나도 초심을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고통의 의미


나는 수영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금 여긴 한국과 반대로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접어들었다. 이른 아침 맨살에 닿는 바깥공기가 온몸을 감싸 돌며 머리가 쭈뼛쭈뼛 곤두선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수영장까지 움직이는 것부터가 귀찮고 고통스럽다. 이렇게 추운 아침 옷을 벗고 야외 수영장에 몸을 던지는 건 더욱더 고통스럽다.


"풍덩! 으흐흐흐흐 추으으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든다. 왜일까? 이유가 없다면 뛰어들지 않는다. 이건 앞에서 설명한 장대한 역사 속의 스토리와 비록 스케일은 다르지만 어찌 보면 같은 이치이다.


그 이유는 고통 속에서 희망이 보이고 환희가 찾아들기 때문이다. 이 환희는 일시적이다. 다시 권태와 불만이 찾아든다. 그럼 다시 고통을 찾아 뛰어드는 것을 반복한다. 반복이 지속되면 건강이 찾아들고 활력이 항상 곁에 머물게 되는 이치이다. 그렇기게 사람들은 운동! 운동! 운동! 외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유가 아닌 외형적인 아름다움과 옷걸이를 좋게 하기 위한 목적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뭐든 간에 이 육체적 고통의 반복이 정신적 환희와 육체적 건강을 지속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한국에서 한 겨울에 주말 바다 수영을 한 적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살이 찢어질 듯한 추위와 고통 속에서 수영을 하고 난 후 찾아드는 환희와 안락함의 강도는 더 커진다는 것이다. 고통의 강도가 클수록 경험하는 환희의 크기도 비례해서 커진다는 것이다.


이걸 삶에 대입해서 얘기해 보자


이전에 썼던 [고래]의 서평(참조)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현실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소망이 있으면 행복한 순간을 맛볼 수 있다. 소설 속 춘희는 소망을 꿈꾸고 상상하며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었다. 현실이 처절할수록 그녀의 소망은 더욱더 간절해지고 그 소망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 주었다. 삶의 버텨내는 힘이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삶이 힘들거나 고통스러울 때면 물속을 뛰어들어 미친 듯이 팔다리를 휘젓는다. 그럼 육체의 고통이 찾아들고 심장이 터질 듯이 숨이 가빠진다. 죽을 듯이 힘들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고통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고 몸에 활력이 찾아든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

                                     - 책 속 인용문 -

                                     

우리가 죽음을 떠올리면 고통이 함께 떠오른다. 우리는 죽음과 고통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 들이게 된다면, 다른 말로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간절해지고 소망으로 가득 찰 수 있게 되며 활력이 생겨나게 되며 그렇게 생겨난 활력과 에너지는 에너지 보존과 전환의 법칙에 의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전달되게 된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퍼져나간다.


비약적인 해석이라고 들릴지 모르겠지만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다'는 말이 부인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시간의 문제이고 지속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시간과 지속을 견디지 못하고 효율과 속도를 원하기 때문에 사랑과 인내가 아닌 기만(欺瞞)과 기습(奇襲) 전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쟁은 효율과 속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성경]이나 [논어]보다는 [군주론]이나 [손자병법]을 더 많이 적용한다.


책을 읽는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 것 같다. 작가의 글에서 삶에 대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은 그가 항상 죽음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태어났을 때와 마친가지로 자신을 온전히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긴다.... 다시 한번 갓난아기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 책 속 인용문 -

                                 

우리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죽는 순간 그리고 죽은 후는 분명 누군가의 손에 맡겨질 것이다. 그 누구도 쓸쓸히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죽는 순간 그 옆에 누가 있을지 알 수 없다. 당신의 죽음을 슬퍼해줄 그 마지막을 함께 해줄 사람이 필요한가?

 

그럼 우리는 갓난아기 때 받았던 사랑을 다시 베풀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다시 갓난아기로 돌아갔을 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이별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기만으로 살았다면 기만하는 사람들 속에서 죽을 것이고 사랑으로 살았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죽을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연속된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죽음은 오히려 내 인생을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 책 속 인용문 -


사랑하며 살았다면 비록 죽음은 형체를 지워버리겠지만 영혼은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럼 그건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살아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