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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y 25. 2023

사랑할 때 진실된다

[책들의 부엌] 김지혜 - 두 번째 -

"인생은 어차피 진실과 거짓으로 엮어지는  아닌가. 거짓 속에 달콤하고 안락하고 뭔가 특별해 보이는 세계가 펼쳐져 있다."


                                               -   인용문 –


우리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세상을 살아간다. 그 누구도 진실되게만 혹은 거짓되게만 살 수는 없다. 사람마다 그 비중에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진실과 거짓을 안고 살아가며 때론 진실을 보여주고 때론 거짓을 보여주며 살아간다.


[책들의 부엌] 속 지훈과 마리의 이야기가 나의 상념의 바다에 돌을 던졌다. 현실의 삶을 투명하게 살아가는 지훈 그리고 불투명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 실제와 가상의 삶을 분리해서 살아가는 마리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대조적이지만 둘을 통해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듯하다.


"말하기 전엔 머릿속으로 자신이  거짓말의 맥락이 자연스러운지 반드시  번씩 점검했다. 꾸며낸 내용에 빠진 것이 없는지도..."


                                               -   인용문 -


지금 나도 거짓말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거짓말이 앞뒤 맥락에 어색함이 없도록 치밀한 장편의 스토리를 쓰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나 또한 취미로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허구는 거짓의 또 다른 표현이다. 소설을 쓰는 소설가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어찌 보면 소설가가 리플리 증후군(허원증)의 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명하고 위대한 소설가일수록 이 증상의 심각성은 더 커진다. 독자들로 하여금 장편의 거대한 허구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울고 웃고 공감하게 만드는 완벽한 리플리 증후군의 끝판왕이다. [책들의 부엌]을 집필한 작가 또한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짓과 허구의 차이점


그럼 소설 속 마리의 거짓(허구)과 소설가가 만들어내는 거짓(허구)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허구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몸은 현실에 머물지만 정신은 허구의 세계 속에 머물고 있다. 예를 들면 온라인 게임을 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소설을 읽고 쓴다거나 하는 시간은 모두 우리의 의식이 허구의 세계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4차 산업사회로 나아가면서 더욱 심화된다. 온라인 세계의 확장과 오프라인 세계의 온라인 세계로의 편입이 가속화되면서 우리는 오프라인 세상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온라인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오프라인과 온라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가 적지 않다. 현실과 가상의 두 세계를 오고가는 삶이 일상이 되어간다.


"은둔형 외톨이 청년 13 시대"


얼마 전 본 뉴스에서 서울에만 13만 명(전국 약40만명)의 청년이 2~3평 남짓한 방 안의 공간에만 생활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과거 일본이 먼저 경험했던 히키코모리 세대가 이제 우리나라에서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현상은 과거의 히키코모리와는 조금 다른 형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비록 2~3평의 좁은 오프라인 공간에 머물고 있지만 그들의 정신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든 무한한 온라인(가상 혹은 허구)의 세계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건 과거 조상들이 만들고 이룩해 온 국가와 사회라는 오프라인 세상에서 살아왔던 우리와 형태와 모습만 바뀌었을 뿐 크게 다르진 않다.

[김씨 표류기] 중에서

현실과 허구를 뒤섞다.


오래전에 읽었던 [꿈꾸는 다락방]이라는 자기 계발서(베스트셀러)를 기억한다. 자신이 간절하게 꿈꾸는 것이 있다면 이미 그것이 실현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언젠가는 그 꿈이 이루어져 있을 거라는 책의 내용은 모든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때 그 책이 나에게 적지 않은 동기 부여를 했던 기억이 있다. R=VD (Realization = Vivid Dream)이라는 공식을 내세우며 마치 아인슈타인의 E=mc^2의 물리학 공식처럼 당시 사람들 사이에 붐이 일었던 걸로 기억한다. 문제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냉혹한 현실을 견뎌야 함을 간과했다. 꿈을 리얼하게 꾸면서 그 기대와 희망이 현실을 견디는 동력이 되긴 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의 족쇄들을 끊어내고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 속 마리도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현실에서 리얼하게 자신이 꿈꾸던 것들을 말하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문제는 말과 행동에 따라가야 할 실제 노력이 없었다. 그녀는 현실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뒤섞어 버렸다. 우리는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분리하고 구분하며 살아간다. 요즘 유행하는 '본케'와 '부케'라는 말처럼 여러 가지 가면(페르소나)을 가지고 현실과 자신만의 여러 가지 허구 세계를 오고 가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두 개의 세계가 뒤섞여 버리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마리는 허구의 세계를 현실로 가져와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리플리 증후군(허언증)에서 심해지면 조현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소설가나 예술가들도 허구의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집어넣어 현실에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 속에 바람으로 넣어두고 사람들에게 공감과 이해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현실의 변화를 꿈꾼다. 하지만 마리는 그런 타인의 이해와 공감의 거치지 않고 사회적 약속과 사람 간의 신뢰를 깨뜨려버리고 마치 소설 속의 인물로서 현실을 살아간다. 그나마 리얼리티 소설이라 다행이다. 그녀가 판타지 소설 속 인물로 살아가려 했다면 정신병원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꿈의 의미


세상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꿈을 꾸게 만든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가지는 사회적 성공의 꿈, 모두가 같은 꿈을 향해 간다. 사람들에게 온전한 사람, 부러움을 사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다. 자신의 상처와 연약한 모습은 드러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멀어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사실 상처를 드러내고 나서도 곁에 머물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더 진실된 자들이다. 우리 곁에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마리는 과거의 자신이 가졌던 결핍을 스스로 채우려 노력했다. 아니 채워진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자신이 가져보지 못했던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을 마치 가졌고 느꼈던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자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모습을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각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처를 드러낸다는 


소설 속에는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외로움은 글이 된다, -서평참조-]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 카야를 마리의 모습과 연결시키고 있다. 지훈은 소설 속 카야의 모습을 보면서 마리를 떠올렸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며 극 중 인물과 실제의 인물을 동기화시키며 공감과 감동을 얻는 것은 것처럼 지훈은 카야의 삶을 들여다보며 마리도 소설 속 카야의 삶을 들여다보았으면 했다.


카야와 마리는 둘 다 가정에서 버림받은 존재로서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야만 했던 존재였다. 카야에게는 습지가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고 마리는 자신이 만든 허구의 가면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 그들은 타인이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 속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깊은 상처는 습지와 허구의 세계 속에 감춰진 채 치유되지 못한다. 상처는 드러났을 때 상처가 아닌 게 되어버림을 알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줘야  나은 사람이 된다."

                                              - 안톤 체호프 –


자신의 과거와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먼지를 털어내듯 표현하고 말하고 드러냈을 때 비로소 상처와 아픔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밖으로 잘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상대방 아픔과 상처를 앞에선 이해하고 공감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비난하고 손가락질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자신의 상처와 과오를 드러내지 못하는 비겁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인간들이다. 이건 우리 사회가 타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비열한 방법을 가르쳐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마태복음 23:12] -


소설 속 지훈은 삶과 실제가 같은 가면이 없는 존재이다. 겉과 속이 같은 투명한 존재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보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마리도 지훈을 바라보며 그랬고 카야도 테이트를 보면서 그랬을 것이다. 거짓없이 투명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상대를 보면서 스스로가 치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치유의 시작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지독한 외로움과 아물지 않을 것 같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마리는 지훈의 투명하고 깨끗한 눈빛이 두려웠다.  눈빛에 자신도 투명해질 것만 같았다"


                                                 -   인용문 -


빛은 어둠을 몰아낸다. 여명은 밤을 밀어낸다. 우리는 그런 빛을 가진 투명한 존재의 사랑을 통해서 변화되고 빛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사랑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서로 진실로 사랑할 때 우리는 진실된다.


[Book's Kitchen]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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