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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y 28. 2023

구원과 선행의 분리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 [로마서 12:14] -


당신은 당신을 혐오하고 괴롭히는 자를 축복할 수 있겠는가? 뭐 저주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축복은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저들을 용서하옵소서'라고 말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의 용서를 구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이런 행위는 납득하기 쉽지 않다. 만약 납득한다 해도 그렇게 행위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인구의 1/3 (약 24억) 정도가 기독교이다. 만약 이 기독교 인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 세상은 분명 아름다워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세상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냉혹 해지는 건 왜일까?




요즘 성경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여러 사람들과 모여 성경 공부를 하다 보면 피어오르는 의문과 상념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그 의문을 모두 물어보고 답을 구하려면 음... 민폐가 될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야 된다고 교육받았다.


과거 수십 년간 칠판과 강사를 바라보며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나에게 별로 남는 게 없었다. 1:1 학습이라면 좀 달랐을까? 하지만 나는 2차 베이비 붐 세대다. 교사 1명당 60명이 넘는 학생이 할당되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의 질문은 59명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되어버린다. 한국 사회는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과 불편을 당연시 한 대가로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그래서일까 있는 집 부모들이 왜 그렇게도 자식들 과외를 시켰는지 이제 좀 이해가 된다. 불법 과외다 뭐다 떠들어 대면서도 몰래몰래 시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내 아이는 선생님의 말을 다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르면 이해할 때까지 물어볼 수 있는 기회는 1:1 과외에서만 허락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과외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학창 시절 공부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이해가 되지 않고 공감이 되지 않는 지식과 스토리는 나에게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혼자 스스로 공부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늦깎이 중년에 독학생이 되었다. 목적 없는 공부다. 그런데 목적 없이 공부하다 보니 의미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신기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찾아보고 읽어보고 생각하고 또 그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 나간다. 다행히도 이제 세상 모든 지식은 선생님이 아닌 온라인 공간에 산재해 있다. 어떻게 질문하고 찾느냐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그 지식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연결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생각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세상이고 그것이 앞으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공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판타지에 대한 믿음


과거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면 작은 골방에 여러 명의 아이들이 둘러앉아 무릎 위에 담요를 덮고 간식을 나눠먹으며 예쁘고 신실한 대학생 누나로 부터  성경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5개의 빵과 물고기 2마리로 오천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어요"

"푸하하하~ 드래곤볼에 나오는 캡슐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요? 웃기지 마세요!"


나만 웃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그 누나는 당황했다. 그럴 때마다 그 누나는 담요 아래에 손을 넣어 나의 허벅지를 꼬집곤 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드래곤볼 같은 판타지 만화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강요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누나의 꼬집음의 강도는 갈수록 강해졌다. 그래서 그 후론 말없이 과자만 먹었다.

[드래곤 볼] 부르마의 호이포이 캡슐

교회에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물이 포도주가 되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는 수많은 예수의 판타지 스토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주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 나는 이상했다 판타지와 믿음에 무슨 상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어린 시절 나는 그냥 그런 구원보다 오늘 교회에선 어떤 과자를 나눠줄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자매님은 왔을까? 빨리 끝나고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에서 놀고 싶다는 그런 현실적인 것들에 더 관심이 많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먹고살기 바쁜 세상, 사회는 전쟁터라는 말을 꼽씹으며 이런저런 처세술에 관련된 자기 계발서들을 틈틈이 읽으며 사회에서의 성공을 꿈꿨다. 눈앞에 줄지어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머리가 아픈 나에게 저 세상 구원의 문제는 달나라 얘기였으며 별 의미가 없었다.


구원의 조건


기독교(특히 개신교)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로 오신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 임을 믿는 것으로 구원받는다고 얘기한다. 유일신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것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천국에 임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례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구원을 확정받는다.


과거 교회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신의 속성을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도 그기 행한 기적들을 강조했던 것이다. 왜냐 우리는 그냥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의 말은 잘 듣지 않는다. 이건 인간의 속성이다. 인간은 힘(부와 권력 혹은 명예)이 있는 자의 말에는 스스로 권위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런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이건 예수와 같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이다. 이런 자는 현실에서 힘을 가진 자들 또한 두려워하는 대상이 된다. 현실의 제약들을 모두 뛰어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기적을 행하는 모습과 선한 말과 행동이 콤비네이션을 이루면 그의 말과 행동은 거룩하고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만약 길거리에 나앉은 거지가 예수처럼 떠든다고 한들 누구 하나 들어줄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거지가 기적 같은 마술을 보여주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람이 모인다.

예수의 기적

그래서 모든 종교들이 비슷하겠지만 대부분이 이런 판타지 혹은 신화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행위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가 그 어떤 물리적인 노력과 시간의 경과 과정이 없이도 한 번에 이룩할 수 있는 그 어떤 힘이 존재함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틀리다 맞다를 얘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과 현상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과학과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너무 많다. 나는 그 영역을 사랑한다. 관심도 많다. 우리는 이 미지의 영역을 영적인 것, 즉 신앙과 종교로 연결시킨다. 그래서 세상은 현실과 현실너머의 두 가지 세상으로 나누어져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살 수 없도록 설계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재 인간이 가진 지식과 깜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보거나 직접 경험함으로써 영적인 존재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에게 신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신과 예수가 동일함을 믿고 그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 기독교의 빈틈이 생겨난다.


노예도 애완동물도 주인은 있지만 항상 주인 말을 잘 따르며 살아가진 않을 수도 있다는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 모든 학생이 모범생이 될 수 없듯이 학교에도 불량학생이 있고 그냥 평범한 학생도 있고 다양하다. 하지만 모두 이 학교의 학생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학교는 이 학생들에게 울타리를 제공하고 그들을 책임지는 의무를 부여한다. 그런데 만약 학교에서 혹은 학교 밖에서 학생으로선 용납하기 힘든 사고나 범죄를 저질렀다. 그럼 학교는 이 학생을 강제 퇴학 처리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럴 수 없다. 왜냐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주인으로 받아들였으므로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품어준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맹점이자 장점이다.


다른 대부분의 종교는 신앙과 선행을 동일선 상에 두고 얘기한다. 신앙=선행이다. 반드시 따라야 하고 선행이 없는 신앙은 벌을 받게 되는 논리를 펼친다.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선행을 하지 않아도 구원은 이미 받았다. 기독교 신자가 세계의 1/3 임에도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는 이유이다. 나이롱 신자가 대부분이라는 반증이다. 추상적인 믿음만 있고 실제적인 행동이 부재한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나도 뭐 그중 하나인 듯하다. 나도 나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할 순 없다. 아직까지는...


나는 신이다


과거 한국의 기독교는 이렇게 많은 신도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의 가면을 쓴 수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탄생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나는 신이다]가 세간에 공분을 사고 있다.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구원에만 너무도 포커싱 된 과거 기독교가 낳은 폐해였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

수많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사람들 앞에서 서커스 같은 마술을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기적을 행하는 예수의 모습을 코스프레한 것이다. 왜냐 우리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그렇게 교육받았다. 기적을 행하고 다시 사신 예수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인간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적과 신을 동일시 한다. 기독교가 구원의 일 순위로 구세주(메시아)에 대한 순종적 믿음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위해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주인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라면 악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행동들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였다. 살인하고 간음하고 혐오하고 질투하는 것이었다. 이건 지금 한국에 만연하고 있는 현상들이 아니던가...


왜 선행을 분리했을까?


그럼 나는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기독교는 믿음(=구원)과 선행을 분리시켰을까? 여기서부터는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고 추론이다. 그 점을 양지하고 읽어주길 바란다.


우리는 누구나 쉬운 길을 가고 싶어 하며 빠른 길을 잦기 바란다. 한국에 기독교가 성행했던 시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과 북이 이념으로 갈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 세계에서 이런 최빈국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열악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몇십 년 만에 세계 경제 10위권의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 기적이다. 기적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결국 기적을 이뤄냈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관계 중심 그리고 공동체 중심의 신앙이다. 힘을 모으고 합치는데 이보다도 좋은 종교가 없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르침(성경)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렵다. 서두에서의 [로마서] 구절처럼 너무도 힘든 선행을 요구한다. 이건 누구나 쉽게 받아들이고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신실한 기독교 신자라도 저런 구절 앞에서는 가슴이 뜨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선행을 분리시켰다. 영혼 구원에 있어서 선행은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한 것이다.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지만 일순위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믿으면 구원된다. 믿는 데는 돈과 시간이 필요 없다. 심플하다.


선부론 (先富論, Getting Rich First)


이건 한국이 과거 몇십 년간의 경제계획과 맞물려 있다. 폐허가 된 한국은 일단 일어서고 볼일이었다.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 일단 잘살고 보자는 게 우선이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유행처럼 불려졌다.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과 탄압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이 부가 아니었던가. 빨리 고속도로를 뚫고 국가 수출을 높이기 위해 굴뚝에 연기가 멈추지 않게 공장을 돌리며 일을 했다. 마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선행처럼 여겨졌다. 그러니까 돈만 많이 벌면 선부(善富 : 선한 부자) 되는 것처럼 비쳤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신자들을 늘리기 위해 힘들고 복잡한 성경 속의 가르침(선행)보다 일단 구원을 간판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일단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바빴다. 그렇게 전국에 수많은 교회들이 난립했다. 밤에 산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면 빨간 십자가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외국인들이 보면 이곳이 천국의 땅인 줄 알았다며 오해할 정도였다.

한국의 십자가들

지금도 편법과 탈법은 능력으로 간주할 정도로 한국인들의 생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내가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고는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뭘요"를 자랑처럼 얘기한다. 그렇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 부자가 된다. 그래서 그 법을 만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부자다. 그들이 법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사회가 아름다워지려면 준법정신이 아닌 선한 양심이 살아있어야 함을 알지 못한다. 법 위에 양심이 있어야 한다. 법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양심을 무서워해야 한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 [마태복음 5:34] -


얼마 전 위에 구절에 대해 나의 생각을 쓴 적이 있었다. 물론 맹세하지 말라(참조)는 말이 아니다. 말만 하지 말라는 얘기다. 나는 입으로 남들 앞에서 다짐하고 맹세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 행동으로 이어질지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 말없이 행동하는 스타일이다. 그냥 내 생각 옳다고 여기거나 판단되면 조용히 움직인다. 그 판단과 생각이 굳어지는데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한 번 굳어지면 행동과 실천의 지속시간 또한 길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과거 한국 교회는 행동이 아닌 다짐과 맹세만을 강조했다. 사람들 앞에 나와 빨리 세례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구원받으라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아니요'를 말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론 '예예예'하면서 주인 말이나 선생 말을 잘 듣지 않고 살아왔다. 주인 말대로 살려니 너무 힘들고 번거롭다. 멍청한 짓으로 보였다. 믿음과 선행은 마주 오는 기차처럼 잠시 스쳤다가 끝없이 멀어지는 것과 같았다.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한다. 성경을 본 사람들을 알겠지만, 이건 마치 선행지침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의 진리를 얘기하며 선행을 강조한다. 성경 속 진리를 알면 선행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은 선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임마뉴엘 칸트도 일찍이 자신의 저서(실천이성비판, 서평참조)에서 말했다. 진리를 깨우친 자는 반드시 선행이 뒤따르게 되어있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선행이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 접근성이 아주 높다. 그 말은 누구나 쉽게 기독교인의 신분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세계 인구의 1/3이 기독교인 이유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이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과 기적을 기억하기보다 그가 행했던 말과 행동의 가르침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는 진리의 가르침을 위해 기적을 행한 것이지 기적을 위해 가르침을 행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기보다 조용히 가르침을 이해하고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가 그토록 바라던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지금 기독교가 이렇게 대중들에게 핍박받고 있는 건 과거 종교인들이 남발한 구원론(과거의 면죄부 같은)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항상 그랬다. 가장 핍박받고 박해받았을 때 간절하고 순수하게 다시 피어났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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