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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May 20. 2023

의미있거나 재미있거나 아니면 편안하거나

배우자의 조건

나는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고민한다. 

이 소중한 시간을 어디에 할애할 것인가에 대해서...

글의 제목처럼 내가 시간을 사용하는 곳에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의미 있거나 재미있거나 아니면 편안해야 한다."

 

모처럼 글의 제목을 정하고 글을 써 내려간다. 나는 생각의 흐름에 따라 글을 다 쓰고 난 뒤 맨 마지막에 글의 제목을 정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른 아침 수영을 하다가 내가 여태껏 시간을 어떻게 보내왔는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그 시간 사용에 대한 나의 상념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의미 있는 시간


의미 있는 시간이란 무엇일까? 이건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것 같다. 무엇에 삶의 가치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의미 있는 시간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의 범위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배움이 있는 시간이다. 


배움의 시간이란, 무언가 공부하고 책을 읽고 기술을 습득하는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또 다른 배움의 시간이 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도 포함된다. 이건 일터가 될 수도 있고 사적인 모임이나 우연찮은 만남이 될 수도 있다. 


예전에는 나와 다른 사람, 즉 생각과 가치관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너무 힘들었다. 대화를 해도 공감하기 힘들기 때문에 같이 대화하는 시간이 괴로운 시간이고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내가 글을 쓰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듣는 것이 흥미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럴 때는 내 얘기보다는 상대의 얘기를 더 많이 듣게 된다. 그래서 그런 상대를 만나면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질문을 많이 던지게 된다. 왜냐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더라도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른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의 얘기를 상대가 이해하기 힘들거나 반감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를 해본들 상대에게 거리감만 커질 뿐이다. 


이전 글에서 MBTI(성격유형분석)에서도 언급했지만 세상에는 나와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은 나와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고 다른 환경에서 자랐다.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을 가지게 된 데는 그들만의 역사가 있다. 나는 지금 상대의 모습을 만든 그 역사가 더 궁금하다. 예전에는 사람을 표면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총체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사실 총체적인 이해를 위한 대화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서로 진정성이 있는 관계가 형성되어야만 그다음에야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1:1로 대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다수가 모인 자리는 재미를 찾지만 둘만의 대화에서는 재미보다 의미를 더 찾게 된다. 이렇게 나에겐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배움의 과정이고 또한 의미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나도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너무 즐겁다. 끊임없는 핑퐁대화와 폭풍공감의 이어진다. 하지만 사실 이런 대화에서는 배움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공감과 동감으로 즐겁고 유쾌한 시간일 뿐이다. 재미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나와 다른 세계 그리고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과 대화를 하며 생각이 충돌하면서 다른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생각이 부딪친다고 나의 신념과 가치관이 쉽게 변하진 않는다. 나 또한 적지 않은 시간 고착된 성향이 한순간에 변할 수가 없다. 다만 이런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가 이어지면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 유연해질 수 있고 또 다른 색깔이 더해질 수도 있다. 공감은 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세계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적어도 상대에 대한 적대감은 가지지 않게 해 준다. 


한국 사람들은 나와 다름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색깔이 다름을 견디지 못하기에 여야, 동서, 남북, 남녀, 노소가 그토록 서로를 혐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인간의 존재를 부인하고 변화시키려 하거나 그게 힘들면 아예 무시하거나 없애버리려 한다. 


우리는 아마도 나와 다른 존재에서 배움과 의미를 찾기보다 미움과 갈등만 찾아내는 것 같다. 다른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의미와 배움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갈수록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의미 있는 시간은 모든 대상과 순간에 있지만 찾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자신만의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은 배움이 있는 시간이고 그 배움을 얻을 수 있는 대상과 시공간을 넓혀가는 능력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시간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희를 즐기는 동물이다. 재미있는 놀이나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재미라는 것은 이념과 가치관 그리고 종교를 넘어선 것이다. 재미있는 놀이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함께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다. 이건 올림픽 스포츠가 전 세계인이 화합하는 축제가 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재미를 느끼는 분야가 사람들 마다 조금씩은 다를 수 있겠지만 재미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유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머러스한 사람에게 호감을 많이 느낀다. 웃음은 사람과 사람을 가깝게 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빠른 방법이다.


나는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개그맨(희극인)이었다. 영구 심형래와 맹구 이창훈은 나의 우상과도 같았다. 매주 주말이면 유머 일번지, 개그콘서트등 개그 프로그램은 어김없이 챙겨보며 사람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일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왔다. 


그게 커서도 영향을 미쳐서 인지 삭막한 분위기나 말없이 딱딱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싫어한다.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어떻게든 그런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다. 하지만 이젠 그냥 그런 분위기는 그냥 피하고 싶다. 물론 그렇게 해서 분위기가 쉽게 바뀔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웃픈 상황이 연출된다. 억지로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나에게도 큰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상책인 듯싶다. 만약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괴롭더라도 조용히 입 다물고 있고 싶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은 세상이다. 내가 개그맨도 아닌데 없는 직업 정신까지 발휘해 그 스트레스를 내가 다 짊어질 필요가 있겠는가. 개그맨은 그 대가로 밥벌이라도 하지만 난 그게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무대 뒤의 개그맨들의 모습은 그리 밝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은 과거의 아픔과 슬픔을 유희로 승화시키려는 소망이 발현된 케이스가 많다고 한다. 밝고 기쁨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자라왔거나 익숙한 자들이라면 의도적으로 웃기고 즐거워하려는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기 힘들다. 그걸 의도적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유도하는 능력이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개그맨은 의도적인 노력으로 웃음과 기쁨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자들이다.


어쨌든 나는 나의 유머도 잘 받아주고 웃음과 미소가 있는 재미있는 시간을 원한다. 그게 아무 의미 없이 실실거리며 웃고 떠드는 것이라도 상관없다. 생기가 넘치고 밝은 에너지는 의미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편안한 시간 


우리는 간혹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그냥 편안한 시간이 있다. 그것이 편안한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이기도 하고 편안한 시간 혹은 장소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힘든 일상에서 그런 편안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휴식의 시간이다.


나는 아직 그렇게 편안한 사람은 없지만 스스로 그런 편안한 시간과 공간을 찾아다니는 편이다. 만약 그곳에 편안한 사람도 같이 한다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말없이 조용히 사색하고 산책하거나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책을 보다가 스르륵 잠드는 그런 기분을 좋아한다.


그리고 편안한 사람


말을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아도 그냥 같이 있어도 편안한 사람이 있다. 아마 그런 사람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가슴 설레고 흥분되며 재미있고 의미 있는 사람보다는 같이 있을 때 편안하고 평온함이 찾아드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아마 평생을 같이 살아가는데 무리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아 헤매지만 좀처럼 그런 사람을 찾기 힘든 건 우리가 항상 의미와 재미를 기대하며 사람을 찾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하는 건 한 순간이다. 


"인생의 현자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사랑에 눈이 멀어 우정을 보지 못하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 칼 필레머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중에서 -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사랑과 우정사이] 이 노래는 과거 한국에서 노래방에만 가면 꼭 한 번씩은 부르던 노래였다. 과거 대학 시절 나에겐 오랜 시간 우정을 자랑하던 이성친구가 있었다. 말 그대로 같이 있으면 아무 말하지 않아도 편안함이 느껴지는 친구였다. 문제는 어느 순간 우정이 사랑의 감정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관계는 깨어지고 말았다. 나는 우정에서 사랑으로의 변화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지만 상대는 우정과 사랑의 경계선을 넘는 것은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넘으면 끝장나는 것이다. 


만약 그때 그 편안한 우정이 사랑과 결합했다면 지금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글도 쓰고 있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여자는 편안함보다는 의미와 재미 그리고 설렘을 가져다주는 교회 오빠를 따라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 친구는 아직도 그 의미와 재미 그리고 설렘을 여전히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한 발의 총알, 의미 있고 재미있는 배우자


지금 나도 주일마다 교회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 교회 공동체 속 싱글들에게는 모두 각자 한 발의 총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다들 이 한 발을 총알을 어디에 쏠지 항상 고민을 하며 신앙생활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다. 굳이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배우자나 연인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 신앙이나 믿음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나 그 외의 다른 조건이 더 우선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공동체 속 많은 시선들 때문에 둘의 연애가 자유롭지 못한 단점도 있다. 물론 시선 때문에 관계에 더 신중해지고 진지해지는 장점 또한 있다. 


신앙과 믿음에 관심이 높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배우자를 찾길 바랄 것이다. 왜냐 그나마 교회를 다니면 기본적인 신앙이 있을 거라는 맹목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나 예수에 대한 믿음이 상대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신기한 공간이다. 서두에도 설명했지만 우리는 같지 않은 가치관과 생각 혹은 신앙을 가진 자를 배우자나 연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지 않다. 안 그래도 고달픈 인생 더 힘들게 의미를 찾고 싶지 않다.  


이걸 좀 비유적으로 표현해 볼까?


만약 나의 반려자가 예수 혹은 성모 마리아와 같다고 생각해 보자. 어떨까? 음... 만약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MBTI의 S(감각)보다는 N(직관) 영역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100% 직관의 영역에 머무는 자일 것이다. 이 유형은 현실보다는 극히 적은 가능성과 지극히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실과는 좀 동떨어져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남편이 예수라고 가정하면 이건 참 쉽지 않은 고달픈 삶을 예고한다. 예수의 삶을 같이 할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일까 그는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기존의 현실 체계와 시스템(율법)을 타파하고 사람들에게 기존에 없는 세상에 대한 망상 같은 희망을 심어주며 고난의 길을 차처 해서 가는 존재가 나의 배우자라고 생각하면... 음...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신앙이 있는 자를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끝판왕인 예수 같은 반려자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고개를 갸웃하는 건 왜일까? 이건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항상 예배당에 앉아 고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면서 정작 예수의 삶을 닮아가고 그 길을 따르는 신앙인을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말한다는 것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거룩하고 싶지만 괴롭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오류 투성이인 존재이다. 신을 숭배한다면서 대부분의 시간은 돈을 버는데 쓰고 인류의 평화와 사랑을 외치면서 총칼을 들고 상대를 살육한다.


의미, 재미 그리고 편안함 중 으뜸은?


자! 그럼 정리가 되지 않은가? 우리는 항상 의미와 재미를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편안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거룩하고 의미 충만한 예수나 흥미롭고 재미 충만한 개그맨보다는 그냥 의미가 없어도 재미가 없어도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편안한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존재가 영원한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한 사람은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받아주는 편안한 사람인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의미 있고 재미있는 사람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Comfo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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