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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n 16. 2023

노동을 거부하다

MZ와 사토리(悟世代) 그리고 탕핑(躺平)에 관하여

"바로 노동력토지다. 마르크스는 이 두 가지가 상품화되었을 때 그 사회는 자본주의(자본제) 사회가 된다고 간주했다"


    - 시라이 사토시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중에서 -


과거 200년간 지속해 온 산업 자본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는 인간은 의미가 없는 존재이다. 자본(부가가치)을 창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 없이 소비만 하는 존재 그것도 최소한의 소비만. GDP 성장에 기여도가 전혀 없다.


그들의 저항은 과연 인류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하고 조용히 사라질 것인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아니 지금 바꾸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디스토피아일까?


사회의 골칫거리?! - MZ(N포)와 사토리와 탕핑


나는 한국인이지만 중국 그리고 일본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나보다 젊다. 많이 젊다. 그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MZ(부정적 N포), 사토리 그리고 탕핑 세대로 불린다. 호주에 오기 전 필리핀에서 어학연수를 위해 몇 개월간 머물렀다. 그때 기숙 학원에서 영어공부를 하면서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다. 대부분 나보다 10살 이상 어린 친구들이었다. 뒤늦은 퇴사와 함께 제2의 인생을 꿈꾸던 나와는 달리 그들은 다들 학생 혹은 취준생 아니면 사회 초년생인 친구들이었다. 이방인으로 이국에서 그들과 함께한 몇 달간의 동행은 아주 흥미로웠다. 비록 세대는 달랐지만 국적이 달랐기에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10년 넘게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직장 꼰대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던 나에게 그들과의 생활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어느덧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세대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나라에서 골칫거리 세대가 되어있었다.

필리핀에서 만난 인연들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은둔 시대


최근 언론에서 빼놓지 않고 자주 등장하는 기사 중에 하나는 '은둔형 외톨이'이다. 이건 현재 한국의 MZ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건 10년 전 일본이 먼저 겪었고 아직도 겪고 있으며 이제는 한국을 넘어 중국까지 널리 퍼져가고 있는 사회 현상이다. 이 현상은 산업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한 동북아(일본, 한국, 대만,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현상이다. 더욱이 코로나 19를 거치면서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현상은 몇 년 안에 베트남으로 그 바통이 이어지리라 생각된다. 나라마다 조금씩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사회 활동을 하지 않거나 해도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 우리 세대가 바라던 성공, 즉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 같은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가 권장하는 성공을 크게 꿈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화 [리틀포레스트] 중에서

며칠 전 [리틀포레스트, 2018 ] 영화를 봤다. 이 영화도 벌써 3~4번째인가? 이 영화는 마음이 심란하거나 복잡할 때 보면 편안해진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일본 만화이다. 2002~2005년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원작 만화를 영화로 만들었다. 일본에서 먼저 2부작(2014)에 걸쳐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한국에서 리메이크되었다.

일본 만화 [리틀포레스트]

이 영화는 치열한 경쟁사회에 찌든 청년이 도시가 아닌 농촌으로 숨어들어 과거 조상들의 수렵농경생활로 돌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헨리데이비스 소로의 [월든]의 현대판 버전이다. 돈을 벌지 않고 자연 속에서 얻은 것들로 자급 자족하며 그 속에서 행복과 만족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도시 산업화에 역행하는 비경제 활동 청년의 모습을 감성적인 영상으로 담아내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생산과 소비를 하지 않는 시간


나 또한 호주라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 한동안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정말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데 행복감이 증대하는 희한한 현상을 몸소 경험했다. 이른 아침 산책 혹은 운동으로 시작해 신선한 재료로 유튜브를 따라서 요리하고 그 음식을 음미하며 한적한 공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유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삶의 많은 부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과거엔 오로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 그리고 돈을 벌면 뭘 사고 즐길까에 대한 고민과 생각밖에 없었다.

Reading & Writing

 매일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고 새로운 맛을 뱃속에 집어넣었다.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옮겼다. 다른 맛과 다른 생각을 찾고 알아가는 과정의 의미와 즐거움을 경험했다. 그때 왜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이 다양한 느낌과 생각을 향유할 시간보다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의 시간과 노동으로 창출된 돈과 상품(서비스)을 소비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Cooking

과거 한국에서는 이 모든 시간이 낭비이고 무의미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에 일과 공부 혹은 유흥과 소비를 더 즐겨야 했다. 결국 돈을 벌거나 더 많이 벌 능력을 키우거나 하니면 돈을 쓰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돈(무한)은 결국 인간의 시간(유한)을 계속 소비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숙주)에 기생하여 증식하는 자본


결국 '나'라는 존재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에서만 존재의 가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경제학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자본)를 창출하고 창출한 가치를 잉여상품 구매하는 데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이윤, 은행은 이자, 국가는 세금이라는 잉여자본을 획득한다. 그렇게 노동을 통해 생성된 자본은 산업 자본주의 각 구성 조직들이 부를 쌓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노동이 없다면 기업, 은행, 국가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청년의 깨달음(득도)란...?


지금 젊은 세대들은 깨달았다. 그렇게 생산하고 소비하고 경제를 돌려도 결국 그 안에서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나 궁극적인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과거 세대는 부가 빠르게 증대되는 쾌감과 희열을 경험했던 세대이다. 못 먹다가 잘 먹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못 먹던 세대가 아니다. 처음부터 물질의 풍요를 디폴트로 깔고 태어난 세대이다. 노오력과 여얼씸이를 해도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잠시 한 눈 팔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유혹과 경쟁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의 사토리(悟る) 세대의 뜻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의미인 이유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일본의 경제가 장기 침체 국면과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이 늦은 이유 중 하나는 젊은 세대들이 사회경제 활동의 주체로 나서지 않고 은둔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직도 종이문서와 도장을 사용할 정도로 아날로그 감성이 사회 전반에 지배적이다. 4차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더디다. 이건 과거 기성세대들이 아직도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경제와 산업 발전의 주체가 이동해야 하지만 일본은 그러지 못했다. 경제 발전의 주체가 이동하려면 부의 이동이 이뤄져야 한다. 기성세대들이 과거 축적한 돈이 다음 세대가 발전할 기반(미래 투자)이 되어야 하지만 돈은 그들의 아날로그 감성에 묻혀 보험자산처럼 되어버렸다.


누구나 알다시피 미국은 전 세계 산업의 선두주자이다. IT산업을 비롯해 4차 산업, 우주미래산업등 항상 우수한 과학기술을 앞세워 세계 산업의 방향을 주도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젊은 인재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다. 그만큼 청년층의 경제 산업 분야에 대한 주도권을 빠르게 인정하고 넘겨준다. 그리고 그 청년들의 머리가 기성세대들의 부도 함께 증식시켜 주는 신구의 동반 성장을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일본을 비롯해 한국과 중국은 미국처럼 젊은 세대들이 사회와 경제 산업의 발전에 선두(4차 산업, IT)에서 주체가 되는 기회와 환경이 상대적으로 느렸고 적었기 때문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부의 평형이나 이전 혹은 역전 현상이 일어날 수 없었다.


편리하지만 불편한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시대의 주인공으로 부상해야 할 청년들은 변두리로 뒤편으로 숨어버렸다. 이런 모습은 그 시대상을 대변하는 문학에서도 드러난다. 꿈과 희망이 사라진 일본의 사토리 세대의 모습을 그린 [편의점 인간, 2016]이라는 소설은 불과 5년 뒤 [불편한 편의점, 2021]의 한국판 버전으로 옮겨왔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생겨난 공간이 불편한 청년들의 삶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있는 이곳 호주는 편의점을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삶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 편리함의 이면에는 항상 불편함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손님이 편하려면 직원은 불편해야 하고요, 불편하고 힘들어야 서비스받는 사람은 편하지요"


                   -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

무라타 사야카 [편의점 인간]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박수칠 때 떠나야...


기성세대들이 계속 사회경제를 주도하고 젊은 세대들은 단지 그들의 노후를 위한 노동력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건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중국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겪고 있는 문제이며, 이것은 세대 간 갈등의 원인이다. 이제 다음 세대에서 스포트라이트와 그 무대를 넘겨줘야 하지만 무대 위의 영광을 내려놓고 싶지 않다.


기성세대의 심리에는 자신들이 과거 힘들게 일궈낸 것들을 젊은 세대들이 잃어버릴 것이라는 불안과 불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세대 간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장기 불황 속에 임금 인상과 물가 인상이 이뤄지지 않고 정체되어 있었던 건 그런 사토리 세대들의 부가 정체 혹은 오히려 감소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일본 여행이 호황인 이유는 그들의 화폐가치가 낮아졌다는 말이다. 이건 그 기간 다른 국가들의 화폐가치는 상대적 상승했다는 것이다.)


과거 전후 일본의 베이비 붐 세대들은 급속한 경제 성장과 버블을 통해 많은 자본을 축적했다. 그 자본은 주식과 금융 그리고 부동산을 부단히 도 옮겨 다니며 증식했다. 그들 또한 자본을 토지에 축적하는 자본주의 경제 발전 시스템을 적극 이용했다. 부가 부를 불리는 방식은 최종적으로 부동산을 통해서 이뤄진다.


"자본의 본질은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 그 운동이 자본 자체다. 이는 즉 운동하지 않는 돈, 증식하기를 멈춘 돈은 더 이상 자본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 시라이 사토시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중에서 -


이제 누구나 알겠지만 돈(화폐)은 계속 찍어낼 수 있는 무한 자원과도 같다. 하지만 부동산은 그렇지 않다. 화폐의 가치는 세월이 갈수록 떨어지지만(계속 찍어내니까) 토지의 가치가 계속 상승해 온 것을 보면 알지 않은가? 다들 '부동산! 부동산!'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과거 200년의 산업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기간 동안 노동력으로 창출된 잉여 자본이 금융을 통해 부풀려지고 그 비대해진 자본은 부동산(토지와 건물)에 그 몸집을 옮겨 담는 과정이었다.

암호화폐

새로운 기축 상품의 등장


비트코인, 전 세계를 통합하는 새로운 기축통화의 등장을 기대하는 분위가 만연했다. 전 세계인의 이목과 관심이 집중됐다. 관심이 집중되는 곳에는 항상 돈이 모인다. 시중에 넘쳐나던 돈이 새로운 은신처를 찾았다.


그 과정 속에서 주식과 부동산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특히 속도에 진심인 한국인은 코인시장에 더욱 열광했다. 더욱이 암호화폐가 주창하는 목표와 의의가 청년 세대들에게 더 큰 호응의 계기가 되었다. 왜냐, 암호화폐는 기존이 화폐처럼 중앙의 기득권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무한 발행하며 쥐고 흔들 수 있는 종류의 화폐가 아니었다. 금처럼 희소가치가 있지만 다자간의 통제(인증)를 통하는 것이었기에 신뢰성과 형평성이 있었다. 청년들이 기성세대에게 항상 요구하는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담고 있는 기축상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버블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그 버블이 또다시 재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아마도 오랜 시간 경제 호황으로 불어난 돈이 갈 곳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돈들이 만약 모두 주식과 부동산으로 계속 흘러들어 갔다면 사람들은 그 엄청난 버블에 큰 우려와 동요가 일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커졌을 것이다. 주식 시장 버블 당시 실제 기업의 가치보다 미래기대 가치가 너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분위기가 대부분의 국민인 노동자들의 분노로 이어지면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권력은 항상 이것을 두려워했다. 기득권을 지키는 방법은 항상 그들의 분노가 극으로 치닫아 일손을 놓고 광장으로 뛰쳐나오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부동산은 가치 산정을 위한 계산 기준이 없지만 주식은 주당 실질 가격 산정에 대한 기준이 있다. 그렇기에 실제가치보다 너무도 과장된 주식 버블을 우려한 사람들은 그 돈을 부동산으로 옮겨놓길 원했을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으면 커지면 커질수록 무주택 노동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임금으로는 도저히 집을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만연해지기 때문에 노동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평가절하 된다. N포세대와 사토리, 탕핑은 모두 이 상대적 박탈감이 가져온 의욕 상실이 빚어낸 사회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계가 다시 자국 우선주의와 양극화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불황으로 빠지면서 불어났던 돈은 긴축이 필요했고 돈을 다시 빨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 직격탄의 가장 먼저 맞은 곳이 바로 암호화폐 시장이었다. 암호화폐 시장의 자본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그 과정에서 아마 엄청난 자본이 세탁(암호화폐의 익명성)되어 음지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노동만으로도 부가 축적되던 세대 (베이비 부머)


기성세대들은 노동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지금은 순수한 노동으로 부를 축적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니다. 70~80년대 경제 발전시기의 은행 이자는 어마어마했다. 원금 보장에 20~30% 육박하는 이자 소득이 있었다. 당시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높지 않았지만 이자가 높았기에 이자 소득으로 부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내 집 마련의 꿈이 가능했다. 나의 부모님도 그렇게 내 집 마련을 꿈을 이루셨다. 베이비 붐 세대는 그렇게 집도 사고 차도 사며 부가 증대되는 것을 팽창의 시대를 체험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중산층이 성장했다. 그들은 비록 몸은 힘들고 고단한 시절을 보냈지만 부의 증대라는 보상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들은 아직도 지금 세대도 그들처럼 노동을 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과거의 가치관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문제다. 시대가 빠르게 바뀌어도 살아온 시대가 만들어낸 인식의 변화는 그보다 항상 느리다. 부는 상대적인 것이다. 기성세대가 과거 일궈낸 부는 스스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토지과 건물에 비대하게 저장되었다. 그런데 지금 세대의 노동 가치가 과거와 비슷한(물가 상승률에 맞춰 올라가는 임금과 저축 이자가 전무한 시대) 환경 속에서 노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붓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리석고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왜 물가 상승률에 지가 상승률을 포함시키지 않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항상 품고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인간에게 가장 기본인 의식주(衣食住)에서 왜 주만 쏙 빼고 물가상승을 얘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와 함께 모든 곳에서 지대가 상승한다는 사실은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못하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중에서 -


노동의 가치가 부동산 상승비율 그리고 화폐의 증가 비율과 비슷한 수준으로 상승해야만 그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고 노동만으로도 자신이 살 수 있는 주거의 문제를 살아있는 동안에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살아서 열심히 돈 벌어 죽을 때나 되어 집을 장만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릴 텐데 말이다.


노동의 가치가 증대되어야만 기존의 기득권이 가진 토지와 건물의 권리를 교환할 수 있다. 그래야만 부의 세대 이동이 가능해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은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건 국가가 나서서 부의 재분배를 한다고 해도 양극화를 속도는 줄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이상 양극화는 절대 좁혀질 수 없다.


MZ - 반항의 시작 (세대 갈등과 분열)


그나마 한국의 청년은 반항기가 다분해 이런 사회 분위기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소리 내어 많이 드러내는 편이다. 하지만 기성세대들 대부분은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기 보단 현상 판단하고 분석하고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해결책(정량적)만 찾기 바빴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청년의 결혼과 출산 장려를 위해 15년간 38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소멸할 국가가 되었다. (도대체 이 눈먼 돈은 다 어디로 간것일까?!)이건 사실 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구조 변화와 저변에 깔려있는 문화인식의 개선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사회, 경제, 정치를 떠나서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MZ 세대

일본 - 사토리는 득도(得道 : 깨달음)의 경지 


그들은 노자의 도가사상을 물려받은 듯 보인다. 위에서 언급했던 [리틀포레스트]처럼 정치경제사회에서 벗어난 삶을 주창한다. 그냥 속세에 관심을 끊어버리고 자신 안의 세계에 빠져버린다. 일본이 유독 오타쿠가 많은 것은 그런 이유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화나 소설 등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현실세계가 아닌 그들만의 이상세계에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붓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의 머리엔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본 사람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면 친절과 상냥함이 떠오르지만 속으로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가진 민족인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내면세계는 득도의 이상세계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사토리 (득도: 得道)

중국 - 탕핑(躺平 : 드러눕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그들도 사토리와 비슷하지만 그들이 만들어진 환경은 좀 다르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이다. 그들에게는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당권이다. 당권이 인민을 대변한다. 그렇기에 주권이 당권이다. 그들에게는 한국이나 일본처럼 민주주의의 항거운동이 공식적으로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다. 자칫 하면 입을 틀어 막고 총과 탱크로 밀어버릴 수도 있는 곳이다. 당권이 인권 위에 굴림한다.

탕핑(躺平)

중국 청년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 정부와 사회 그리고 기득권자들이 그들을 비난하고 질책해도 반항도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입 닫고 귀 닫고 몸도 몇 평 남짓한 방안에 닫혀있는다. 그들은 일본처럼 자발적인 득도가 아닌 어쩔 수 없는 득도를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과거 천안문 그리고 지금의 신장위구르 탄압, 홍콩민주화(우산혁명) 등의 민중운동이 어떻게 진압되고 억압되는지 보아왔다. 언론을 막고 인터넷을 통제하면 정보의 전파 속도는 느려질 순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공산당에게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과거 중국 청년들이 성공의 우상으로 삼았던 알리바바의 창업주 '마윈'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은 지켜봤다. 성공도 한순간에 일장춘몽이 되어버릴 수 있는 곳에서 노오력과 여얼씸이로 노동할 이유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노동은 자본의 숙주 (자본주의의 딜레마)


서두에서 말했지만 산업자본주의의 근간은 노동력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근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추앙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노동력이 사라지면 산업자본주의는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어있다. 국가의 지도자들과 기득권은 그걸 우려하기 때문에 지금 방 안에서 은둔하는 청년들을 질책하고 비난하며 그들이 사회로 끌어내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들이 노동력이 되어 생산하고 소비하며 (자본의 증식과 순환) 또 노동력을 재생산(결혼과 출산) 해 주기를 촉구한다. 자본은 노동이라는 숙주가 사라지면 기생과 증식을 멈추게 된다. 자본이 증식 없이는 국가도 기업도 성장할 수 없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딜레마이다.


희망 없는 삶은 죽음과 같다


사회구조와 시스템의 변화가 없이는 지금의 청년들의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축적이다. 과거는 기성세대가 만들어 온 역사이다. 그들이 지금의 현상을 인과적으로 이끌어 내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원하거나 예측했던 상황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만 살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인간은 항상 계획하고 예측하려 하지만 사실 10년 뒤 아니 5년 뒤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전문가들의 말만 믿고 그들을 맹신한다. 과거 각 분야 전문가들이 만든 세상이 지금의 모습이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고생하고 노력해서 이룬 현재의 부와 발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제는 자신들이 이것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잘못된 생각이다. 넘겨줘야 한다. 쥐고 놓지 않기 때문에 변화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들은 방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너무도 복잡하게 엮여버린 사회의 시스템들은 이제 더 이상 노력으로는 해결 혹은 헤쳐나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들 보다 살 날이 많은 자들이 더 간절히 미래를 걱정하고 대비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살 날이 더 많이 남은 자들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의 10대에서 30대까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출산은커녕 스스로도 인구에서 빠지고 싶다.


"강은 빠지는 곳이 아니라 건너가는 곳임을, 다리는 건너는 곳이지 뛰어내리는 곳이 아님을."


                   -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중에서 -


인간 세상은 적어도 열심히 노력하면 의식주는 해결될 수 있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동물도 새끼를 낳으려면 둥지와 보금자리부터 만든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The lord of creation)인 인간은 그것조차도 힘든데 이게 무슨 영장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간의 자식들은 머리를 뉘어 안식할 곳조차 없도다."

                                                 - [도마복음] 86장 -           

사망원인 [출처 : 통계청]

혁신의 딜레마


모두가 빠르고 똑똑하고 스마트해질 수는 없다. 똑똑하고 스마트한 사람들은 경쟁 속에 더 똑똑하고 스마트한 사람들만 만들어내고 그런 자들 때문에 똑똑하지 않더라도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어렵게 만들어가는 구조이다. 이제는 웬만큼 똑똑하지 않으면 대우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대부분이 학사모를 쓴 노예들이다.

학사모 노예

"혁신은 인간을 행복하게 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특별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 시라이 사토시 [삶의 무기가 되는 자본론] 중에서 -


*한 기업에서 사회적 평균 이상의 노동 생산력에 의하여 생산된 상품의 잉여 가치 [네이버 국어사전]


얼마 전 PD 수첩에서 쿠팡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곳은 모든 노동자들을 UPH(Unit per Hour)로 측정한다. 만약 능숙하고 빠른 어떤 노동자가 오늘 생산속도 1등을 달성했다. 그러면 내일은 이 일등의 성적(속도와 효율)이 평균이 되어버린다. 이건 노동자가 노동자를 조여 오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그들은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도 눈치를 봐야 한다. 기업은 그렇게 노동자가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이익을 취하는 형태의 시스템을 적극 활용한다. 그리고 그런 노동환경을 위해 노동자의 행동반경과 행동패턴을 로봇에 가깝도록 생산라인을 구축한다. 그것이 생산기술팀이 하는 일이다. 그들은 어떻게 인간을 로봇화 시키는지를 연구하는 팀이다.


과거 10년 전 내가 보아왔던 자동차 부품회사의 생산 라인과 크게 바뀐 게 없다. 제조업을 비롯해 모든 산업에서 노동은 UPH와 시간당 공정진척률을 성과지표로 활용한다. 정량적 지표에는 휴머니즘은 없다. 특히 일용직과 계약직에게는 더욱더... 정규직이 사라져 가는 이유이다. 그럼 기업은 공장을 모두 로봇 공정으로 바꾸면 될 일 아닌가? 물론 인간이 로봇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면 반자동은 전자동으로 바뀌어야 하지만 이건 보다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왜냐 국가의 실업 문제와 소비 문제가 엮여있기 때문이다.

쿠팡 물류 센터

기업과 정부의 공존 (인간이 로봇으로 대체되면 안 되는 이유)


기업이 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일자리 창출이다. 대기업들은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적 의무를 안고 있다. 그렇기에 기업들은 완전 자동화 설비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로봇화 트레이닝 시키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기업 또한 그 의무를 이행해야 함을 안다. 왜냐 노동자가 노동을 통한 소득이 발생해야 그들이 쿠팡에서 다시 물건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야만 기업도 국가경제도 돌아간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 그래서 혁신이라는 미명(美名)의 악순환 은 계속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현상을 좀 더 확장해서 보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서도 발생한다. 대기업은 낮은 가격의 질 좋은 제품을 공급받길 원한다. 중소기업이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산업경쟁력이 된다.


 이 과정도 쿠팡의 사례와 같다. 만약 어느 중소기업이 혁신과 공정개선등을 통해 제품원가를 낮추었다. 그럼 이 사례는 다른 모든 중소기업들의 표준인 동시에 기준이 되어버린다. 그럼 다른 중소기업들은 다시 단시간에 뼈를 깎는 혁신과 공정개선을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은 기존의 이익을 보전하기 위해 임금의 인상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결국 중소기업에서 창출한 특별잉여가치가 모두 대기업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 격차를 계속 벌려 놓을 수밖에 없다.


단일 민족을 포기하면 대체 노동력은 있다. (이민 국가로의 전환)


이제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도 미국이나 호주처럼 이민자들에게 노동력을 기대야 할 것이다. 청년들이 사회활동을 거부하고 결혼과 출산을 멈춘다면 그 자리를 대체할 사람이 필요하다. 민족은 사라지더라도 국가는 존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그리스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현지의 청년들은 살 길을 찾아 해외로 모두 나가 버리고 자국은 가난한 나라의 이민자 들와 노령자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노동력을 대체했다.


내가 있는 호주도 그렇고 이민자로 만들어진 사회는 활력이 있다. 왜냐 수요와 공급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에서 온 청년들의 입장에서 선진 국가의 임금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건 과거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들도 경험했다. 그들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또 중동의 거친 모래바람을 견뎌낸 이유이기도 했다. 노오력과 열 시 미를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혹은 그곳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상대적 풍요를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진 국가에서 물질의 풍요를 일상으로 경험한 청년들은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선진국가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나름 고급인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비선진국의 이민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버렸다. 그들은 과거 부모들이 쏟아부은 그 많은 교육비와 양육비의 본전도 회수하지 못하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사회에 나와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동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다. 국제사회의 기술 수준은 상향 평준화로 나아간다. 지금 적잖은 기업들이 외국인의 노동력에 의존한다. IT산업도 예외 아니다.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IT 노동은 해외아웃소싱으로 개발자 부족분을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의 노동력은 가성비가 나쁘지 않다. 한국 청년들처럼 잦은 이직이나 요구사항이 적다. 한국엔 이제 고학력 백수들과 단순 노무자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투자대비(교육비) 수익이 좋지 않은 노동상품이 되어버렸다. 자본은 피부색과 민족을 따지지 않는다. 증식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풍요가 일상이 되면 권리가 된다.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다. 이민사회로의 전환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각종 인종 및 종교 그리고 문화차이로 인한 갈등이 생긴다. 물론 국가의 존속과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피해 갈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결국 국가의 구성원이 된다. 미국과 호주처럼 그 이후에는 그들은 풍요가 일상이 되고 기득권을 가지려 할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한국인, 아이를 많이 낳는 이민자....


결국 세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국가의 주류는 이민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민족은 사라지고 국가만 남는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화 다양성의 공존 아니겠는가? 호주사회 또한 이 현상을 겪고 있다. 이슬람 민족 국가의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이 말은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영향력과 입지가 커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뭐 엄밀히 얘기하자면 호주도 미국처엄 인디언들의 터전이었듯이 호주 원주민(Aborigine)들의 터전이었다. 원래 백인들의 터전이 아니었다.) 한국에 비하면 호주 백인들의 출산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출생률은 세계 최저, 이 상황에서 이민자들의 유입과 정착 그리고 확장이 가져올 미래는 어떨까? 아마 그때는 초등학교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사라지지 않을까?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우리보다 1세기 정도 빨리 시작한 유럽은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이민자의 유입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대체하며 경제성장과 국가존속을 유지해 왔다. 그 가운데 수많은 갈등과 사회문제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그들의 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정책과 인식의 변화를 통해 출산율을 제고하고 있다. 유럽은 자본주의의 발원지이지만 이제는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의 색깔이 더 짙은 국가들이다. 그들은 인본주의로 돌아가고 있다.


돈(자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


물론 이런 변화가 국제 사회의 힘의 논리에서 유럽이 미국과 중국에 뒤처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대항해 시대 전 세계를 호령했던 유럽의 영광과 파워는 이제 미국, 일본 그리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국제사회는 힘은 노동을 통한 산업 창출한 자본의  비례한다. 산업자본주의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이다.


한국도 이런 딜레마 때문에 항상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다. 공산과 자본의 이념으로 양분된 나라의 뼈아픈 과거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세대 간 갈등 또한 전쟁을 겪은,  민주화를 겪은, 그리고 풍요 속에 빈곤을 느낀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들의 기억이 살아있는 이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으로 형성된 프레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프레임이 만들어가는 미래가 다음 세대가 살기 힘든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다수결의 의사결정 원칙은 기성세대(베이비붐 세대, 노년층)에게는 유리하다. 출산율 저하로 청년들의 주권 (선거권) 비율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프레임도 바뀌지 않고 주권도 이동하지 않는다. 소수가 살아갈 미래보다 다수가 살고 있는 현재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태어날 이유?


기성세대는 청년 세대들에게 비록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주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정신을 빈곤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터전까지 사라지게 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자녀 세대를 위한 발전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결국 자신들만 살고 갈 세상을 만든 게 아닐까.


그들이 청년들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논한다는 건 어찌 보면 모순이다. 그들만 살고 사라질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들이 더 이기적이라고 봐야 맞지 않을까? 다음 세대는 살아갈 의욕도 환경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과거 세대는 지금 세대의 거울이었고 지금 세대는 다음 세대의 거울이 될 것이다.  


지금 MZ(N포)와 사토리와 탕핑이 방문을 닫고 드러누웠다면 다음 세대는 굳이 태어날(혹은 깨어날)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노동도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불현듯 영화 [메트릭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매트릭스, 1999] 중에서
- 여태껏 제가 쓴 글 중에서 가장 긴 글이 되었네요. 며칠 간을 사유하며 쓰고 또 쓰다 보니 장편의 칼럼이 되었네요.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주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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