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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ul 30. 2023

시간에 갇히다

시간에 관한 상념

"What time is it now?"


정리되지 않은 길게 흐트러진 빨강머리가 인상적이다. 눈가에 주름이 볼에는 주근깨가 가득하다. 중년과 노년사이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 백인 여자가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기억이 가물하다. 길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시간을 물어온 적이 언제인지...


"Nine thirty seven" (09시 37분입니다)

"Thank you"


그녀는 정류장 펫말아래 적힌 버스시간표를 확인한다. 다음 버스가 이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까지는 아직 정확히 13분이 남았다. 나는 정류장으로 걸어오는 동안 이미 버스의 동선부터 도착시간까지 구글맵을 통해 모두 확인한 상태였다. 그것도 모자라 실시간 대중교통 앱으로 버스의 위치까지 확인했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데 걸리는 최종 시간 그리고 그 이후에 스케줄까지 집을 나서기 전에 모두 계획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24시간은 빈틈없이 짜여 있었다. (물론 계획대로 다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녀가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고는 정류장 벤치로 돌아와 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가방 안을 주섬거리더니 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한다. 나는 눈치채지 못하게 곁눈질로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소설책 같아 보였다. 한국처럼 예쁜 표지와 하얗고 빳빳한 책장과는 달리 색 바랜 볼품없는 표지와 누런 책장이 인상적이다. 주름 가득한 손이 이따금씩 책장을 넘기는 것 말고는 움직임이 거의 없다. 볼품없는 외형 안에 도대체 어떤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버스가 오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의 13분의 시간이 그녀에겐 13년이라는 또 다른 시공간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담고 싶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정류장 주변을 서성이듯 떨어져서 그 장면을 핸프폰 카메라에 담았다. 그동안 그녀의 시선은 책장에 고정되어 내가 사진을 찍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는 내가 옆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채고 나서야 서둘러 책장을 덮고 허둥지둥 버스에 오르려 했다.


"Hey! your bag" (저기요, 당신 가방!)

"Oh! I almost forgot. thank you so much" (오~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벤치 아래 놓아둔 가방을 의식하지 못한 채 버스에 오르려다 나의 말에 화들짝 놀라 가방을 챙겨 다시 오른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급작스런 시공간의 이동은 때때로 현실의 무언가를 놓치게 한다.


느지막한 오전시간 버스 안은 한산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좀 전에 읽던 책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주변에 듬성듬성 승객들이 앉아있다. 그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즉각적인 정보들과 흥미 있는 영상을 눈에 담고 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화면 아래 표기된 러닝타임은 현실의 시간과 함께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


그때 문득 책을 읽고 있는 빨강머리 아주머니와 나 그리고 다른 승객들은 모두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버스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하루 24시간의 똑같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다른 시간을 산다


시간은 절적이지 않다. 상대적이다. 이건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지만(일반 상대성이론) 우리는 일상에서 이걸 인지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끌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수록 시간은 느려진다. 과학적으로는 이걸 중력(重力, Gravity)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지만 중력은 끌어당김의 과학적 용어일 뿐이다. 물리학 용어를 문학적 혹은 철학적 표현으로 전환하면 이건 '끌림' 혹은 '몰입'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좀 전 내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보낸 13분의 시간은 옆에 앉아 있던 그 여성에게도 똑같은 13분으로 인지되었을까? 스마트 폰의 시계와 실시간 맵을 수시로 확인하던 나와 책 속의 어떤 서사와 묘사를 따라가던 그녀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이건 나의 뇌는 현재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었고 그녀의 뇌는 현재의 시간을 떠나 다른 시공간 속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나 또한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 글을 쓸 때이다. 특히 소설을 쓸 때 더욱 그러하다. 소설을 쓰다 보면 그 안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 그 속은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여러 다른 시공간을 옮겨 다녔지만 현실에서 지나간 시간은 오로지 몇 분 혹은 몇 시간일 뿐이다. 나는 다른 시간을 살다 온 것이다.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냐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혼동하는 것이 아니냐고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왜냐 당신이 아는 세계와 내가 아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좀 더 읽어보시라.


뇌는 시간을 모른다


물리현상이든 정신현상이든 이 모든 현상은 인간의 뇌를 통해서 인지된다. 인류는 아직 뇌에 대해 모든 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뇌과학은 우주과학처럼 아직 무궁한 영역이다. 인간의 장기 중에 뇌만큼 복잡한 것이 없다. 다른 대부분의 장기는 이식이 가능하지만 인간의 뇌는 아직 불가능의 영역이다. 물론 이건 윤리적인 문제와도 연관되지만 이 문제를 무시한다 해도 쉽게 풀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건 마치 물리학의 미시영역(양자역학)과 거시영역(고전역학)이 동시에 설명되지 않는 것과도 흡사하다. 이 작은 뇌 속은 아마 우주만큼이나 복잡하고 신비한 비밀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esse) 것은 곧 지각되는(percipi) 것이다."

                                                     

                                                       - 조지 버클리 George Berkeley - 


여기서 칸트의 관념론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는 관념론을 통해서 인간은 실재를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얘기했다. 각자만의 프레임(관념)으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세상을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감각기관(눈, 코, 귀, 입, 피부등)을 통해 들어온 외부세계의 정보를 뇌를 통해서 지각(知覺)한다. 우리는 모두 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외부세계를 있는 그대로(실재) 인지할 수가 없다. 왜냐 이건 우리가 뇌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외부 세계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을 인간의 인식기준으로만 판단하고 그것이 실재라고 믿고 있는 것뿐이다.

박쥐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박쥐가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그것과 같을까? 자신이 박쥐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박쥐는 시력이 거의 없고 초음파로 세상과 사물을 인식한다. 그들의 뇌에 구현되는 세상의 모습은 분명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우리 인간은 박쥐의 뇌를 통해서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 이처럼 다른 생명체들은 저마다 그들만의 뛰어난 감각 기관(인간이 가지지 않은)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감각으로 세상과 사물을 인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이 보는 것이 실재라고 말한다. 그럼 뇌를 가진 다른 생명체들이 인식하는 수천수만 가지의 세상 모습은 무엇으로 정의하고 설명해야 할까? 그건 실재가 아닌가? 인간 중심적 사고로서는 풀리지 않는 난제들은 어쩌면 다른 생명체 혹은 존재의 인식기준으로 바라보면 의외로 간단히 풀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 어쩌면 인간이 여태껏 풀지 못한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의 미스터리가 어떤 다른 생명체나 존재의 인식체계에선 아주 단순하게 이해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 결국 뇌를 가진 모든 생명체는 실재를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관념론의 핵심이다. 각기 다른 뇌(프레임)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관념화된 세계이지 실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몰입의 시간


우리는 뇌를 속일 수 있다, 아니 뇌가 우리를 속인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실제로 뇌 이미징 연구는 현실적 경험과 비현실적 상상의 유사 상황에서 뇌의 같은 영역들이 활성화되는 것을 밝혀냈다. 이건 뇌가 현실과 비현실(상상)을 구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건 멀지 않은 미래에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구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현재 글로벌 IT기업(구글, 애플, 메타 전 페이스북등)들이 왜 가상현실 세계에 집중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현재 우리는 온오프라인(On-Off line)을 병행하며 살아간다. 사람마다 하는 일과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그 비중이 다를 뿐 아직은 누구도 온라인에서만 혹은 오프라인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이건 우리의 몸(육체)이 현실(오프라인) 상의 외부요인(소리, 온도, 충격, 냄새등)에 의해 지속적인 자극(정보)을 받아들이고 또한 뇌가 그 정보들을 처리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현실(오프라인)을 지속적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몰입을 지속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이유이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 내가 소설을 쓰고 있다. 이야기 속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의 성격과 현재의 행동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 인물의 성장 과정을 서사한다. 나는 30분의 짧은 시간 몇 문단에 걸쳐서 서술하지만 나의 뇌는 그 인물이 살아온 과거 30년의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이미징(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인물의 과거 삶을 15년쯤 따라가는 도중에 키보드 위 나의 손등에 모기가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나는 현실의 15분을 지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뇌는 지속적인 외부 자극에 의해 내적 몰입(끌림)을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쓸 때는 조용한 새벽시간 쓰거나 아니면 핸드폰을 방해금지 모드로 한 채 가사 없는 잔잔한 뉴에이지의 음악을 들으며 뇌가 최대한 외부 세상의 정보와 자극으로부터 차단된 상태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만약 이런 외부 요인들을 모두 차단하고 생리적 현상까지 차단 혹은 정지시킬 수 있다면... 어떨까. 장시간의 몰입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뒤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또 다시 그 영화가 떠오른다.

[매트릭스] 중에서

과거 오랜 시간 원시 인류는 이런 외부 요인을 위험으로 인지하고 빠르게 반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건 원초적 본능이며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몸(센서)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자극)를 빠르게 분석하는데 더 많이 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의 시간에 철저하게 구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어제 본 것 같은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네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건지..."

"야! 나처럼 나이 좀 더 먹어봐라~ 더 빨라져!"


며칠 전 저녁 식사 모임에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너무도 빨리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한탄과 푸념 섞인 말들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간혹 이런 얘기를 한다. 10대, 20대 , 30대...로 점차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은 10km, 20km, 30km... 점점 가속된다고 아마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뉴턴의 제2법칙(가속도의 법칙)은 시간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이것을 지금까지 내가 유추한 내용에 따라 요약하면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현실의 시간에 점차 구속되어 감을 의미한다.


"또각또각, 내가 신데렐라야 아라찌?"

"그럼 난?"

"음... 넌 백설공주야!"

"얏호!"


 그때 옆에서 구두를 신은 꼬마 아이들이 장난감 인형을 손에 들고 신이 나서 방을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그들에겐 지금 현실이 아닌 동화 속 세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현실의 시간은 잊은 채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른다. 지금 어른들과 이 아이들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아이의 시간

아이의 시간


어린아이들은 현실의 시간을 부모 혹은 교사 그 이후엔 트레이닝(교육과 사회화 과정)되어 스스로가 인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사실 어린 아이는 시간 개념이 없다. 엄마가 때 되면 밥 주고 잠을 재우고, 선생님이 때 되면 국어책을 또 다른 시간에는 산수책을 펼치라고 하기 때문에 그때마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한다. 그들은 친구들과 놀이에 혹은 동화책에 빠져 있을 때 시간이 흘러감을 인지하지 못한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하루종이 밖에서 놀 때 해가지는 줄도 몰랐던 기억이 선하다. 그때 그동안의 시간은 느리고 또한 영속적이지만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던 다른 어른들의 시간은 지금처럼 빠르게 흐르고 있었을 뿐이다. 아이들은 더 많은 시간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즉 시간이 느리게 가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공과금을 내고 엑셀 시트에 데이터를 입력하고 컴퓨터에 코딩 명령어를 입력하는 순간순간의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얼마를 무슨 데이터를 어떤 코드를 입력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일과(정해진 시간 테이블에 따라)의 흐름에 따라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행동들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그래서 우린 항상 바쁘다는 말과 시간에 쫓긴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살아간다.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어린 시절 이런 말을 자주 했던 기억이 있다. 어릴 땐 왜 그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얼른 어른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했던 기억이 선하다. 그때 내가 느낀 시간은 분명 느렸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취학 전 아이들의 시간은 부모 통제(밥, 잠, 대소변)의 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이 새롭고 자유롭다. 아이들은 무언가에 빠져드는 시간(몰입), 즉 시간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게 바로 어른과 아이가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어린아이의 뇌는 아직 시간의 프레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집중(Concentrate in)과 몰입(be Lost in, 상상)


이건 어른들이 자주 하는 집중의 시간과는 좀 차원이 다른 시간이다. 집중은 시간을 빠르게, 몰입은 시간을 느리게(많게) 만든다. 집중은 현실의 사물 혹은 위치와 공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하는 뇌의 활동이다. 예를 들면, 목수가 톱을 들고 정교하게 목재를 도면에 따라 가공해야 하는 경우 혹은 운전자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주변의 교통과 보행자의 상황 그리고 내비게이션 정보를 주시하며 핸들과 브레이크 액셀레이터를 적절하게 조작해야 하는 상황이 바로 집중의 뇌상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몰입은 이런 현실의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난 뇌의 상태이다. 한계나 제약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신데렐라도 되었다가 백설공주도 되고 그러다 갑자기 공룡 장난감을 손에 들고 쥐라기 시대로 시공간을 이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르시게 되셨습니까?"

"이 자리(경지)에 오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시간이 순식간에 흐른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의 분야에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시간이 정말 잘 간다. (이 일이라는 것은 주로 뇌와 몸이 상호작용해서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일)그리고 이런 집중의 시간이 길어지면 뇌와 몸이 하나 된 것처럼 그 일에 최적화된다. 우리가 말하는 장인(기술자 or 전문가)이 되는 것이다.


두 가지 시간


화성에 있는 사람과 지구에 있는 사람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화성의 중력은 3.71m/s², , 지구의 중력은 9.807m/s² 이 다르기 때문) 여기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구에 있는 두 사람의 시간은 같다고 느끼는 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가까운 물리적 현상(현실)에만 갇힌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몸(육체)의 위치(현실)에 의해서만 시간의 빠르고 느림이 좌우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의 상태에 따라서 시간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육체의 시간(소모적)과 정신의 시간(창조적)은 동일한 것일까? 우리는 두 가지의 시간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서로 다른 시간들

시간의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시간개념은 인간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념을 만들었다. 이 관념이 인류의 눈부신 번영을 가져왔다. 인간은 시간을 통제함으로 효율적이고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진화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이건 어쩌면 시간이 인간의 구속시킴으로써 시간이 없던 무궁한 시공간의 세계를 사라지게 만든 것은 아닐까?


우리(어른)는 주름이 늘어갈수록 수많은 시간(Deadline)들에 쫓기며 살아간다. 현실에 발이 묶인 우리의 시간은 야속하고 두렵고 무서워진다. 그럴수록 시간은 더욱더 빨라진다. 결국 그들의 시간은 소모품이었고 언젠간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라. 그들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그들은 오히려 새로운 그들만의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느린 시간을 살고 우리는 빠른 시간을 산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의 시간을 빠르게 가도록 만들어줘야만 한다. 안타깝지만 이건 부모의 의무이고 학교의 책임이며 사회의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시간에 갇혀 버렸다.


당신의 시간은 어떤가?

버스 정류장에서...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마태복음] 1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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