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기도를 한다. 이건 종교와 신앙을 떠나서 소망이나 바람을 가진 인간 누구나 하는 것이다. 다만 그 표현 방식이 특정 종교의 양식이나 특정한 신을 향하지 않을 뿐이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그들은 '기도'가 아닌 '기원'이라고 볼 수 있겠다.
기도는 일종의 신과 내가 나누는 대화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대화는 일방적이다. 나의 생각과 소망을 늘어놓지만 바로 회신은 오지 않는다. 뭐 누군가는 신과 쌍방향으로 소통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난 그것까지 알 수 없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이기에...
기도는 편지다
그래서 나에게 기도란 마치 편지 같은 느낌이다. 다들 편지를 써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군시절 참 편지를 많이 썼던 기억이 있다. 삭막한 군생활 속에서 편지를 쓸 때가 유일하게 그 삭막함을 떠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간절함을 담아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상대에게 도착했는지, 읽었는지, 아님 읽었는데 아직 회신을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회신을 했는데 아직 나에게 도착하지 않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회신을 했는데 오는 도중에 분실되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기도 또한 그런 것이다. 간절하게 썼지만 답장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간절함 뒤에 받은 답장은 그 답장이 무엇이든 그 내용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정말 기분이 좋다. 물론 안에 담긴 회신의 내용 또한 내가 바라던 그런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편지쓰기
예를 들어 편지로 사랑을 고백했는데 거절의 답장이 날아왔다면 답신을 받았을 때 그 기쁨은 어느새 슬픔과 시련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나의 기도도 그랬다. 항상 원하는 응답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응답이 올 때가 많았다. 신은 내가 원하는 것만 주지 않는다. 그건 아마 내가 아직 그걸 받을 자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마다 왜냐고 따져봐야 소용없다. 그것에 대한 답은 주지 않는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선택은 그 시련을 신이 내게 부여한 성장의 시간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나를 위한 기도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많은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 대부분의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였다. 내가 힘들고 내 상황의 열악함이 나를 교회로 이끌었기에 나의 상황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신을 찾고 나에게 닥친 상황에 대해 묻고 따지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누구도 알 수 없는 신과 나와의 은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 사람 간의 대화도 마찬가지겠지만 상대방이 흥분한 상태에서 따지고 들면 거기에 대꾸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은 인생을 조금 살아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신이 그걸 모를 리 있겠는가? 혼자서 속으로 주저리주저리 신에게 하소연하는 기도의 시간이 한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하소연을 한들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한풀이는 될지 모르지만 상황이 개선되거나 변화되는 건 아니다. 이건 마치 여자들이 오랜만에 모여서 쌓여있던 폭풍 수다를 떨면서 몇 시간을 이야기하고 난 후 그래 우리 운동은 내일 하자'며 헤어지는 것과 같이 최초 모임의 목적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상황과도 같다.
그렇다고 이 대화나 하소연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타인과 가족이 제시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돈을 벌기 위해 대부분을 시간을 보낸다. 나를 들어줄 혹은 받아줄 시간은 좀처럼 없다. 다들 바쁘다. 그렇기에 나의 얘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친밀한 사람과 수다를 떨거나 나의 생활 반경에 없는 누군가에게 은밀한 심리 상담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게 신이라는 존재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소연에서 부탁으로
나 또한 이런 하소연으로 시작한 기도는 시간이 지나자 부탁 형태의 기복(祈福) 신앙으로 그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신에게 나의 소망을 부탁하는 것이다. 물론 나 스스로도 노력을 하겠지만 세상일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신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운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복신앙이다. 복을 기원하는 기도인 것이다. 나쁘게 얘기하면 나의 욕망을 신 앞에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기복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기복신앙
인간이 스스로 나약함을 인정하고 신에게 힘을 빌리고자 함은 그것 만으로도 순종의 의미를 어느 정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복을 비는 기도가 대부분 나와 혹은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만 향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개인주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를 위한 기도는 중요하다. 내가 없으면 너도 없다. 그래서 신앙의 기도는 나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난 후 타인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나를 위한 글쓰기 (일기, 1인칭 주인공 시점)
글쓰기 또한 그렇다. 나는 이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글을 올리기 전부터 개인 블로그에 비공개 일기를 써왔다. 누구나 일기를 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일기 쓰기는 어린 시절부터 주구장창 우리를 따라다녔다. 학교에서 해마다 방학 숙제로 따라다녔던 글쓰기였다. 매일 써야 하는 일기를 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에 몰아서 한꺼번에 썼던 기억이 떠오른다. 한꺼번에 한 달 치를 쓰는 몰아서 쓰는 글쓰기만큼 괴로운 게 없다. 의미도 재미도 추억도 없다. 며칠전 블로그를 뒤져 호주에 오기 전 퇴사 후 썼던 일기를 들여다 보았다. 그 때의 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이며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억은 기록될 때 비로소 추억할 수 있게 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일기는 온전히 나를 위한 글이다. 개인적인 글이고 개인주의 글이다. 하지만 누구나 글쓰기는 일기부터 시작한다. 일기도 제대로 못쓰는 자가 타인이 보는 글쓰기를 잘 쓸 수 있다는 건...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어린 시절 그렇게도 일기 쓰기를 강조한 것이다.
"나는 오늘 친구를 만나서 싸웠다. 그 녀석이 너무 싫다."
"나는 오늘 학교에서 좋아하는 여자아이와 짝꿍이 되어서 기뻤다."
"나는 어젯밤 꿈속에서 어른이 되는 꿈을 꾸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일기는 이처럼 모두 나를 중심으로 쓰인다. 세상의 중심이 바로 나다. 이렇게 일기 쓰기를 하다 보면 자신을 점차 들여다보게 된다. 이 과정은 마치 자신을 위한 기도의 시간과도 비슷하다. 기도는 입으로 자신을 돌이켜보고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일기는 글로 자신을 돌이켜보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일기 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이제는 독후감이나 에세이 혹은 자서전을 쓰게 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자신 중심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일기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형식과 격식을 갖추고 타인을 배려한 글이긴 하지만 글의 내용과 전개는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책을 읽었던 관점과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들 학창 시절 독후감을 한 번씩은 써봤을 것이다. 그리고 논술고사를 치른 사람이라면 에세이 또한 한 번씩은 써봤을 것이다. 일기에서 시작해 독후감 그리고 에세이로 나아가는 과정은 나를 알고 드러내는 글쓰기의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의 생각과 의견을 일기와 독후감 그리고 에세이를 통해서 타인에게 드러내고 타인은 그것들을 통해 나를 알게 된다.
다들 알다시피 나의 브런치에는 대부분의 글은 독후감과 에세이(칼럼) 그리고 일기이다. 수많은 나의 생각과 일상과 의견을 주관적으로 써 내려간 글들이다. 물론 독후감처럼 책의 내용을 통해 객관성을 가미한 나만의 주관을 표현하면서 점점 나의 색깔을 만들어 간다. 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무명 글쟁이의 글에 신빙성과 객관성을 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름 있는 작가의 명성과 지식을 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작가는 다른 작가를 카피(읽으며)하며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이 처럼 글쓰기는 지극히 주관적인 '나' 중심에서 시작한다. 나를 위한 기도에서 신앙이 싹트는 것과 같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글은 글쓰기(나 , 知己, writing)에서 그치고 글짓기(타인, 克己, composition)로 나아갈 수 없다. 기도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종교 활동에서 멈추는 것이다.
타인을 위한 기도 (중보기도, 仲保祈禱)
성경을 읽다 보면 알겠지만 성경의 대부분의 내용이 타인을 향한 선행을 말하고 있다. 이타주의적인 글들이다. 대부분이 하나님 혹은 타인에 대한 관점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신을 타자로 분리하기가 애매하긴 하지만...)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남들 생각까지..."
교회에 나가다 보면 정말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목사 혹은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의 말을 따라서 누군가를 위해 혹은 다른 민족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어찌 보면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 [레위기] 19:18 -
처음에 이것이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의 안식과 평화를 위해 찾은 예배당에서 앉아 계속 타인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니 도대체 내 기도는 언제 하라는 말인가. 뭐 타인이라도 자주 얼굴이라도 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 인도자의 간단한 정황 설명만 듣고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순간은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는 차라리 무시하고 속으로 내 기도를 했던 적도 적지 않다. 이건 아마 나뿐만 아니라 생각된다. 개인주의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중보기도라는 것이 어쩌면 가장 힘든 기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내가 아닌 타인이다. 물론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거쳐야 하지만 타인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신앙은 성장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은 모든 당신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세상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위한 글쓰기 (소설, 3인칭 전지적 혹은 관찰자 시점)
나는 소설 쓰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사실 난 소설보다는 에세이나 칼럼 쓰기에 더 능숙한 것 같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다르다. 하지만 소설 쓰기에 더 큰 애착을 가진다. 그건 적잖은 시간 글(독후감, 에세이, 일기, 칼럼 등)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관심이 조금씩 타인에게로 옮겨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1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던 세상을 이제 3인칭 시점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안톤 체호프는 소설과 희곡을 통해 캐릭터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게 엄청난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로버트 그린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
소설, 즉 이야기를 쓴다는 것 또한 사실 대부분 1인칭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즐겨 읽는 웹소설의 경우가 대부분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많다. 이건 한 인물의 관점에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가장 주관적인 소설인 것이다. 또한 그만큼 몰입도가 높다. 독자가 작가의 세계관과 비슷하다면 쉽게 매혹되고 빠져든다. 작가와 독자 모두 주인공에 감정이입되기가 가장 쉬운 방법이다. 쓰는 사람도 잘 써지고 읽는 사람도 잘 읽힌다. 그래서 소설가의 처녀작은 대부분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다. 소설 쓰기도 순서가 있는 법이다. 나를 중심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사실과 주장보다는 허구와 상상을 뒤죽박죽 섞어서 말이다.
My Mister [나의 아저씨]
나의 인생 드라마를 하나 꼽으라면 [나의 아저씨]를 들 수 있다. 이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계속 회자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드라마의 이야기(시나리오, 극본)는 모든 인물을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이유 없고 사연 없는 이가 없다. 주인공을 비롯해 모든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며 한 편의 거대한 삶의 드라마를 만들어 간다.
더 글로리
우리는 사실 선악의 구분이 뚜렷한 영화나 드라마에 익숙해져 있다. 선악 대결 구조가 아닌 이야기가 히트를 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최근에 히트를 친 [더 글로리] 또한 그렇지 않은가. 권선징악의 스토리는 통쾌하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도 물론 선악을 표현하지만 그 누구도 완전한 선이고 그 누구도 완전한 악인 사람이 없다. 선과 악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누구나 선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며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는 선악이 아닌 인연(因緣)을 얘기한다. 선악도 결국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이쪽 저쪽을 오고 가게 되는 것이다.
[나의 아저씨] 중에서
"가만히 보면 모든 인연이 다 신기하고 귀해"
- [나의 아저씨] 중, 봉애의 대사 -
아마 시청자들은 극 중에서 분명 자신의 캐릭터 하나를 찾아서 감정이입을 했을 것이다. 그 인물이 누구인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어떤 조연 하나도 허술하게 다루지 않았다. 다들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이웃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이 드라마 앞으로 모여들게 했고 자신과 같은 그 인물에 동화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 인물이 극 중 주인공이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나 또한 그 드라마 속 누군가에게 끌렸다.
이런 전지적 시점(혹은 3인칭 관찰자)의 드라마는 선악 구조가 뚜렷한 일인칭의 시점의 드라마처럼 딱딱 끊어지고 통쾌한 재미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러하다. 딱딱 끊어지고 통쾌한 삶을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그런 류의 드라마를 즐겨보는 이유는 그걸 보면서 대리만족을 해왔던 것뿐이다. 하지만 [나의 아저씨]는 그런 대리만족이 아닌 우리의 삶을 그대로 드라마 속에 재현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이다.
"소설 쓰기란, 내가 아닌 다른 한 명이상의 캐릭터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작업이다."
- 안젤라 애커만 외 [캐릭터 직업 사전] 중에서 -
글쓰기가 '나' 중심에서 타인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저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에서 내가 아닌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타인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어쩌면 작가라는 직업, 특히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들이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자! 그럼 왜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고 이야기(소설)를 써야 하는 설명이 되지 않는가? 가장 어려운 기도이고 가장 어려운 글쓰기이다. 하지만 가장 어렵기에 가장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글을 쓰며 타인을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