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사이] 평소에 내가 올린 글들 중에서 가장 조회수가 많이 나오는 글이다. 제목에서도 느껴지겠지만 포털 검색을 통해 가장 많이 노출되는 글 중 하나였다. 특히 구글(Google)에서 관련 용어를 검색하면 항상 최상위에 노출되는 글이다. 원래는 어제까지만 해도 네이버에서도 항상 검색 상단에 노출되었는데, 이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삭제된 나의 글 (https://brunch.co.kr/@taeki5586/3)
처음 겪는 일에 적잖이 당황스럽다. 일언반구도 없이 플랫폼에서 강제로 글을 삭제당하고 나니 기분이 가히 좋지가 않다. 더군다나 이 글은 2019년에 작성된 글인데 왜 이제 와서 삭제를 당하게 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웃긴 사실은 어제는 분명 작성일자가 2019년을 검색되더니 이제는 2023년으로 변경되어 표기된다. 작성일자도 조작되었다. 도대체 플랫폼에서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제(9/7)만 해도 (왼쪽: 구글, 오른쪽: 네이버)
플랫폼의 힘
내가 브런치에 글을 게재한 지 이제 햇수로 5년이 넘었다. 그런데 사실 최근 이곳 브런치에서 글을 써오면서 많은 의구심을 느꼈다. 5년의 시간이면 이제 이 플랫폼의 성향을 어느 정도 다 파악하게 된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올릴 당시(19년)에는 엉성한 글임에도 엄청난 조회 수와 관심을 받는 듯했다. 그때는 그런 분위기 때문에 글을 쓰며 등단 작가 혹은 출간 작가로의 희망을 품기도 했다. 글이 제대로 익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내 글이 어느 순간부터 국내 포털(카카오, 네이버)에서는 거의 노출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9/8) 작성일자가 변경됨, 네이버는 검색도 되지 않음
내가 글을 오랜 시간 써오면서 나만의 문체와 글의 성향이 생기면서 이상하게도 나의 글이 노출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 점은 브런치의 다른 많은 작가님들의 글을 찾아보면서 확실히 느끼고 있다. 물론 나의 글이 질이 떨어지고 가독성이 좋지 않은 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글의 좋고 나쁨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 또한 과거 독후감이나 소설이 상(오프라인)을 받고 최종 수상후보까지 올라간 경험이 있기에 내 글이 그렇지 질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조회수와 좋아요가 달리는 다른 작가님의 글들을 보면서 나의 글을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5년간 400여 편이 넘는 글을 쓰면서 이렇게 플랫폼에서 외면받으면서까지 글을 쓴 건 보상과 관심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내가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쓰면서 나 스스로를 알아가며 나의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글이 인기가 있든 없든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그냥 읽고 듣고 보고 느낀 것들을 습관처럼 써내려 갔다. 독후감부터 에세이 그리고 소설까지 그러면서 점차 나의 세계관을 만들어가는데 의의를 두었다.
다양한 생각은 사라진다
다양한 생각과 의견과 이야기들이 모이는 글쟁이들의 자유로운 공간인 줄 알았던 [브런치]라는 플랫폼도 결국 검열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인가?
정치, 솔직히 일도 관심 없다. 하지만 가끔씩 타국에서 유튜브를 통해 한국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왜 또다시 과거의 이념과 사상으로 갈라 치던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왜 그 뼈아픈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 걸까? 조상들이 그토록 피 흘리고 고통받았던 그때 그 식민 지배 시기와 이념으로 총칼을 겨누던 시절로… 국민들이 또다시 권력과 정치로 인해 피 흘리는 모습을 반복하려 하는 것인가?
나도 이제 일제 치하의 소설가들과 시인들처럼 숨어서 글을 쓰고 아주 함축적인 그리고 애매모호한 은유법으로 정치인과 플랫폼의 눈을 속여가며 글을 써야 하는 것인가? 예술과 문학이 이제 다시 억압의 암울한 시대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제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만 써야 하나?
과거 역사책에서나 보았던 핍박받던 조상들의 시대를 우리가 다시 반복하며 살아야 것인가?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나와 너는 이 반복되는 삶의 굴레를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 평화(성장)와 전쟁(붕괴)이 반복되는 인간의 역사는 언제까지 반복될 것인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이제 100여 년이 다 되어간다. 숨 가쁘게 달려온 성장과 발전의 시간이 지나고 정체의 시간이 찾아들면 권태가 밀려들고 그 권태는 고통으로 그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분쟁과 전쟁이 일어났다. 잘 나갈 땐 너도 나도 친구지만 힘들고 지치면 남 탓하고 적의로 가득 차게 된다. 또 한 번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야 할 시기인가? 인간은 과거 역사 속에서 그것들을 배웠음에도 또다시 반복하려는 이유는 왤까?
권력에의 의지
그건 결국 인간이 권력에의 의지(욕망)를 절대로 버리지 못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불황과 불신이 찾아들면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급급해진다. 그럴수록 지갑은 더욱 굳게 닫히고 적의는 더욱 불타오른다. 그럼 힘을 가진 자는 이 상황을 탓할 누군가 희생양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곳으로 대중의 관심을 옮기고 서로 간의 불신과 적대감을 이용한다.
이것은 과거 히틀러가 독일의 암울한 상황(경제적, 국제적)을 타개하기 위해 이용한 극단적 민족주의(파시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국민들을 선동하고 반국가세력과 적대세력을 규정하여 국민들의 힘을 집결시키는 것이다. 그것에 희생당한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 아니었던가. 그들의 분노는 유대인들을 향했고 또 전 세계를 향했다. 그렇게 세계 2차 대전이 벌어졌다. 일본 또한 그때를 틈타 독일과 함께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게 두 국가가 일으킨 전쟁으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권력도 없을뿐더러 지킬 것도 별로 없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도 없고 지킬 게 없다는 것은 세상을 치우치지 않게 보는 눈을 가지게 해 준다. 힘과 부는 결국 이해 관계에서 생겨남을 안다. 수많은 이해관계에 엮기고 가진 것과 누리는 것이 많아지면 인간은 입장과 색깔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지켜야 할 것이 많기 때문 (영화평 참조)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예술과 문학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곳에 머무는 것이 좀 궁핍하더라도 마음은 편안하고 자유롭다. 예술과 문학은 시대와 인간을 향한다. 그리고 본질을 향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과 문학을 통해서 그 시대와 대중의 마음을 헤아린다. 때론 사실은 진실을 숨기고 상상이 진실을 얘기한다(서평참조). 사실이라고 떠들어 대는 TV와 신문 속에서 이제는 진실을 찾아내기란 갈수록 어렵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대중들의 마음과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시대가 되어가는 듯하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사랑의 3단계 : 포용의 사랑)은 정말 이뤄질 수 없는 것일까. 사랑이 사라지면 그 자리엔 미움이 채워지기 마련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