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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06. 2023

별빛 사랑

잔나비 [투게더]를 듣다가...

오 기다림은 저 별의 빛

우주를 건너는 달음

                               - 잔나비 [투게더] 중에서 - (음악과 함께^^)


요즘 자주 듣는 노래이다.  잔나비의 노래는 음률도 좋지만 그 가사 또한 계속 되뇌게 된다. 가사가 함축적이면서도 서정적이다. 음률을 빼고 읽으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음악은 그 음률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아~ 뭐지? 뭐지? 저 음악..."


우리는 종종 우연히 들려오는 귀에 익은 반가운 음악이 들려올 때면 가사와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음은 모두 기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사를 따라 부를 순 없지만 그 리듬을 기억하고 따라서 콧노래흥얼거린다. 음악은 소리로 기억되기 때문에 눈(가사)에 보이지 않는다. 음악이 여타 다른 예술과 가장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예술에서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신비한 영역이다. 마치 신앙의 영역과도 같다. 우리가 신을 볼 수 없듯이 시각을 배제한 예술은 그저 느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시각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음악에 글(가사)을 삽입하고 영상(이미지)을 가미해 힘(시력)을 불어넣는다. 시각화된 음악은 더욱 오래도록 기억된다. 우리가 OST(Original Sound Track) 음악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은 음악이 시각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읽은 것 또한 뇌에 이미지를 만드는 시각화 과정이고 이 이미지를 청각화 시키는 것이 바로 작곡이다. 그러니까 작곡가는 글을 이미지화시키고 이미지를 다시 청각화 시키는 두 번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음악은 이미지 혹은 글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낸다. 가사 없는 조용한 클래식 혹은 뉴에이지 음악과 함께 보는 글귀와 이미지(사진)가 더욱 생동감 있고 영상 또한 극적인 장면에는 항상 OST가 깔리며 그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감성이 자극되고 감성이 자극된 상태에서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2D의 세상을 3D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음악인 것이다.


"글에서 음악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줬다. 작곡가는 대부분 글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래서 작곡가는 작사를 먼저 하고 그 글귀에서 오는 느낌과 영감을 음률로 표현해 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는 느낌과 영감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에 글이라는 매개체에 그때의 영감과 느낌을 잡아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해서 보면서 글 속에서 음률을 뽑아내는 것이다. 글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을 살려서 시가 되고 음표 위에 올라가 가사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작곡가와 반대로 음악과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곤 한다. 물론 글에서도 영감을 얻는다. 작가(혹은 다른 예술가)와 작곡가가 가장 다른 점은 작곡가는 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자이고 여타 다른 예술은 보이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보이는 것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드라마 [무빙] 보다가 몇 번 듣게 된 OST [투게더]가 나에게도 글의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음악을 들으며 가사를 음미하다가 잔나비의 가사가 사랑을 과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두에 적은 [투게더]의 가사가 바로 그것이다.


기다림, 사랑이 익으려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상대방을 관찰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거친다. 누군가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요즘 같이 허세와 허식이 난무하는 세상에 겉으로 드러난 단편적인 외면만 보고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일 수 있다. 외형의 호감은 넘쳐나서 이젠 그 가치를 상실했다. 내외가 일치하는 호감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사랑이란 시간을 먹고 익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외형이 부족해도 내형의 충만함은 시간을 견디고 드러나게 마련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별빛 사랑


잔나비는 별과 우주와 우리의 시간차를 가사 속에 담아내었다. 사랑을 별빛에 비유했다. 작곡자는 별은 빛나지만 그 빛이 우리에게 닿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림을 알고 있는 듯하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지금의 별이 아니다. 이전의 별빛이 이제 나에게 닿은 것이다. 사랑의 시간차를 표현한다. 나에게 닿은 이 사랑이 상대에게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에게 닿은 사랑은 그대의 과거 사랑이었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가 상대의 현재를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언제나 과거의 사랑에 얽매여 있었음을 알지 못한다. 이건 반대로 얘기하면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지만 아직 그 사랑이 나에게 닿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사랑이 지금 광활한 우주 공간을 열심히 달려오고(달음) 있는 경우이다.


나의 사랑도 항상 그러했다. 나의 사랑도 광활한 우주를 건너는 별빛처럼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지만 상대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나의 사랑을 볼 수 없다. 사랑이 그에게 닿았을 때는 어쩌면 나는 이미 식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치 수명이 다한 별처럼... 상대는 그 환하게 빛나는 별빛을 보고 사랑에 빠졌지만 이미 그 별은 사라지고 난 이후이다. 별빛은 항상 과거의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는 이제는 소멸되고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다. 지금 보고 있는 별이 지금 살아있는지 아니면 사라졌는지, 단지 그 과거의 빛이 이제 우리에게 닿은 것뿐인 것이다. 별은 과거만 볼 수 있다.


사랑도 그렇다. 열렬히 빛나며 달려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광활한 우주 공간을 지나는 동안 별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항상 다가올 빛나는 사랑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별은 이미 식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이 불타오르는 시간은 상대가 식어가고 있는 시간이었다. 남녀의 사랑이 항상 엇갈림 속에 놓여있음을 잘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은 나를 사랑했었던 사람이다.  


"당신은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잖아요?"

"당신 왜 이렇게 변했어요? 사랑이 식었군요"


어쩌면 우리는 상대방의 현재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나는 너의 음악이고 그런 마음 한 줄이야

때가 되면 네 마음에 시퍼렇게 남을 거야


                                              - 잔나비 [투게더] 중에서 -


음악과 글도 그렇다. 우리가 음악을 만들고 글을 남기는 것은 나의 과거를 남기는 것과 같다. 녹음된 소리와 기록된 글은 시간을 견디고 달려가 언젠간 당신에게 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이미 죽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음악과 글로 남겨진 나를 느낄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나의 과거이지만 남겨놓은 음악과 글이 진실되다면 그것은 시공간을 넘어서 당신의 마음속에 시퍼렇게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밤 별빛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듯이...


[무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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