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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10. 2023

친환경 원시인

면도를 하다가...

"위이이이잉"


욕실에 떨림과 울림이 가득하다. 전기면도기가 털을 밀어낸다. 매일 떨림과 울림이 있는 일상을 산다. 그 떨림과 울림이 가슴이 아닌 얼굴 가죽의 표피에서만 느껴질 뿐이란 것이 아쉬울 뿐.


한국에 와서 바뀐 일상 중 하나를 꼽으라면 매일 면도를 한다는 것이다. 호주에서는 매일 면도를 하지 않았다. 콧수염과 턱수염이 까맣게 올라와도 크게 게이치 않았다. 털이 덥수룩하게 자랄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길게는 두어 달을 면도를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정말 콧수염이 내려와 윗입술을 가렸고 턱수염은 너무 길어 먹던 음식물일 털에 걸릴 때도 있었다. 그때는 내가 보는 것에 집중했지 누가 나를 보는 것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살았다.


털이 자라는 것은 풀이 자라는 것과 같다. 동식물의 생리이고 자연의 섭리이다. 풀을 깎지 않으면 도시는 원시로 돌아가고 털을 깎지 않으면 현대인도 원시인처럼 되어간다. 하지만 그건 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 그렇다는 것이다. 시각적인 존재에게 보이는 울창한 풀과 덥수룩한 털이 원시로 보이는 것은 그들이 근시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요즘에는 친환경 건축으로 건물 옥상에 녹지를 조성하고 심지어 건물 외벽에도 식물로 뒤덮는 원시 건축으로 돌아가고 있다. 건물 외부를 녹지로 조성하면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대기오염감소, 에너지 감축, 빗물 흡수로 홍수방지, 휴식공간제공, 소음감소 등등. 물론 거기에 부합하는 건축비용은 증가할 것이다. 만약 모든 건물이 녹지로 덮여 있다면 산에 올라 내려다본 도시는 회색 도시가 아니고 녹색도시 일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마치 숲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친환경 건물

한국에 와서 산에 오르니 온통 회색 빛이다. 무거운 미세먼지가 낮게 깔려 높은 하늘의 푸름과 층을 이루었다. 마치 물속에 침전현상 일어난 것처럼 뿌연 침전물 속에 도시가 덮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비로소 푸른 하늘이 드러난다. 도시에서 바라본 하늘은 이 모든 침전물을 거치고 바라보는 하늘인 것이다. 맑은 하늘을 보는 것은 이제 산 위에 올라서나 가능해진 시대이다. 호주에서는 거의 매일 맑은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듣지 않아도 볼 수 있는 푸른 하늘에 세상의 드넓음을 항상 느끼며 살았다. 그래서 그것에 무뎌져 그것들이 당연해진다.


하지만 한국에 오니 내가 얼마나 푸르름과 드넓음을 향유하고 살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인간은 항상 누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을 잊을만하면 떠나야 한다. 안 그러면 영영 잊어버릴지도... 다른 환경을 경험하고 다른 환경을 인정하듯 타인을 경험해야 타인을 인정할 수 있다. 쉽지 않지만... 그럼 비로소 내가 보인다.


한국에 온 지 이제 20일이 넘었다. 그 사이 나도 점점 예전에 한국의 삶으로 돌아가려는 듯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면도기로 갓 싹을 틔우려 거뭇하게 일어나는 털들을 깔끔이 밀어낸다. 이건 이곳의 사람들과 똑같이 되려기 보다는 단지 그들 속에서 튀지 않고 싶을 뿐이다. 남다른 모습으로 남다르기보다는 남다르지 않음으로 남다름을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예전에 그곳에서는 남다름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남다름이 되어버렸기에 그 형태와 모습을 바꿀 수밖에 없다. 형태와 모습은 바뀌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으려 한다.

 

이곳은 모두가 말끔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 안에 어떤 모습이 가득 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털을 깎고 깎지 않는 것이 뭐가 중요한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를 가져오는 이런 작은 습관이 아닌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습관을 1년, 10년, 50년이 지속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깎여나간 털들은 이제 생명을 잃어버렸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여가면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녹음이 사라진 도시는 잿빛 먼지와 하늘로 덮여 버렸다. 맑고 하얀 피부와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의 사람들의 마음은 오히려 잿빛으로 가득하다.


친환경은 깨끗하고 단정함이 아니다. 그건 바로 원시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위적인 것들에서 멀어지는 것이 친환경이다.


산 위에서도 산을 내려다보는 듯한 도시와 푸르름을 되찾은 투명한 하늘이 돌아오길... 기대해 본다.


산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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