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구가 이 시대의 개인주의를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문장이 아닐까? 여기서 신은 바로 자신이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문장을 읽고 부정적인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면 당신은 이타주의자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말은 당신이 이기주의자일 가능성도 농후하다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아름답다의 ‘아름’은 동사에서 바뀐 명사가 아니라 본디부터 명사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세기에는 ‘아람답다’로 표기되어 있다. ‘아람’이라고 하는 명사가 15세기에서 나(私, 개인)의 뜻을 지니고 있다. ‘아름답다’는 '나답다'의 뜻이 되겠다.
- 서정범 : <어원별곡(語源別曲)> (범조사. 1989) -
누구나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세상은 이 아름다움의 표준을 정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착하고 예쁜 혹은 멋있는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는가? 이걸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타적이면서 매력적인 외모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의 기준이 정형화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머릿속에 아름다움을 떠올리면 다들 비슷한 상상을 하는 것이다. 집단주의 생각으로 고착되었음을 의미한다. 아름다움도 다수결의 결정 원칙에 따라 생각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노출된 매스컴과 정형화된 교육과정 그리고 비슷한 성장 환경 속에서 사회와 학교와 부모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고착화되어 버렸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나'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소비하지만 욕구와 욕망은 표준화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인 소비 행위로 결국 자아를 잃었다."
- 책 속 인용문 -
모두가 나를 표현하기 위해 매스컴에서 떠드는 비슷한 운동과 식이요법 그리고 각종 화장품과 시술들을 소비하며 외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트렌드에 맞는 교양과 전문성을 인정받으려 각종 학위와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지식을 소비하며 내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렇게 모두가 비슷한 인간으로 변해간다. 이미 '나'라는 기준은 정해졌고 모두가 그곳으로 향해간다.
우리는 세상이 정해놓은 아름다움을 위해 나를 버리고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건 진정한 아름다움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변해버릴 트렌드와 유행 그리고 행동양식을 따르며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이건 내가 인정하는 가치와 사회가 인정하는 가치가 부합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회적 현상이다. 하지만 진정한 내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다 보면 언젠간 '나는 과연 누구이고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신을 찾아오게 된다.
가면 (Persona)
"인격(Personality, 개성)이라는 낱말의 첫 번째 의미가 가면(Persona)이라는 사실은 결코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닐 것이다."
- 책 속 인용문 -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함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개인주의를 드러내놓고 주장하기 어려운 분위기이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 낸 것이 바로 본캐, 부캐 같은 문화 현상일 수 있다. 현실(사회)에서의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분리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이 본캐이고 부캐인지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이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 본캐든 부캐든 모두 자신의 개성이 되고 인격이 된다.
신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 혹은 세 가지의 인격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을 가면 없이 민낯으로 투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까. 있다면 그 사람이 견뎌내야 할 고통은 다른 이들보다 더 클 것이다. 만약 과거 예수도 신이 내린 모습(소명)과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관습)의 두 가지를 병행하며 살았다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신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순종해야 한다. 성인(聖人)은 인간 세상에 순종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여러 가지 자신이라는 가면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현실을 견딜 수 없다.
개인주의를 다시 보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오랜 시간 집단주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 이타주의가 긍정적인 의미라면 이기주의는 그 반대의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주의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가운데에서 그 어떤 뉘앙스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타와 이기의 경계에 있다.
사회와 공동체는 이타주의를 주창하지만 사회와 공동체는 개인에 기초한다. 개인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고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회와 공동체는 다수의 개인의 욕망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애덤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가나 사회가 아닌 개인이 자신의 이익(욕망)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더 큰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게 한다고 봤다. 이게 바로 그가 주창한 '보이지 않는 손' 효과이다.
"이기주의의 역설이다. 나만을 위해 한 행동이 결국 타인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 책 속 인용문 -
여기서 문제는 이익 추구가 선한 양심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양심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욕망이 양심을 짓밟을 수 있다. 그래서 다수의 이익이 선하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럼 다수에게는 그것이 이타주의이지만 소수에게는 이기주의가 되어버린다. 전체주의로 흘러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히틀러의 파시즘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국가와 사회가 특정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기만하는 것이다. 이건 독재나 특권 체제로 흘러가게 된다. 이건 다시 무소불위의 군주제로 회귀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마태복음 23:12] -
이 성경 구절을 읽으면 어떤가? 이 구절은 예수의 삶을 한 문장으로 잘 묘사해 준다. 예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길을 따라갔을 뿐이지만 다수의 군중과 제자들에게 높임을 받았고 후세에 까지 지속적인 높임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예수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거나 높인다는 뉘앙스 자체를 가지지 않았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는 자신 스스로 이타적 혹은 이기적인 뉘앙스를 가지지 않았다. 그는 신의 속성을 표출한 것뿐이지만 인간들에 의해서 그가 이타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여겨지고 숭배된 것이다.
그는 그냥 여유롭고 당당했다. 왜냐 틀리지 않은 말과 행동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관습과 사회분위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지만...) 다만 그 틀리지 않은 말과 행동이 누군가와 특정집단에게는 이기적이고 불편한 것이었다. 결국 이타주의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선악의 이분법적 개념이 존재하는 한. 마태복음의 저 구절은 그를 따르는 군중과 제자들이 예수 사후 그의 언행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이타주의 뉘앙스와 이상주의의 염원이 담겨 기록된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낮추려 하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 글짓는 목수 -
성경 속 구절을 손자병법의 관점(처세적인 관점)으로 전환해서 악용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이다. 기만 전술이다. 이타주의는 지극히 이기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말이다.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의 대외적인 모습은 항상 이와 같다. 왜냐 다수의 지지와 응원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이런 모습이 겉과 속이 일치할 수도 있고 불일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인기를 먹고사는 세상이다. 인기는 부와 권력으로 전환된다. 인기는 얻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전문성을 갖추어 부와 권력을 가지는 것과 진리와 지혜를 익혀 인격적인 성인이 되는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인기이고 후자는 인간의 양심(良心)을 자극하는 인기이다. 중요한 것은 후자가 전자의 위에 올라선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부)과 힘(권력)을 선망하지만 내가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은 그렇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우월감이나 욕망 충만한 사람보다 정의감과 선한 양심이 충만한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길 바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항상 권좌에 오르기 전에는 항상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정의감과 선한 양심으로 표를 호소하지만 막상 권좌에 오르면 자기를 낮추려는 자들을 불편하게 여긴다. 인간은 스스로 낮추는 것은 미덕으로 여기지만 힘에 의해 낮춰지는 것을 굴욕으로 받아들인다. 이기주의는 이타주의의 가면을 쓴다. 이건 기만이다.
예전에 어느 독거 할머니 집에 내부 공사를 간 적이 있었다. 아주 넓은 하우스에 강아지와 둘이 사시는 할머니는 인심이 참 좋으셨다. 목수 어르신과 나에게 매일 손수 따뜻한 점심을 차려 주셨다. 그 할머니는 전라도 분이셨는데 음식 솜씨가 어찌나 좋으신지 맛난 집밥을 먹을 생각에 매일 일하러 가는 게 즐거울 정도였다. 나는 그 할머니가 너무 고마워서 일을 마치고도 집안에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도와드리곤 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목수 어르신은 나의 이런 행동을 달갑게 보지 않았고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을 때도 표정이 그리 밝지 않으셨다.
"아놔~ 또 이러시네"
"왜 그러세요? 목수님"
"저 할머니 또 공사비를 다 까고 주시네"
"네!?"
"돈도 많으신 분이 꼭 저러신다니까, 넌 주는 밥이 다 공짜인 줄 알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알겠냐?"
그랬다. 할머니는 이전에도 그러셨고 이번에도 그랬다. 할머니의 성의는 결코 무료 봉사나 순수한 이타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목수님은 나와 함께 얻어먹은 식사 때문에 공사비를 모두 다 달라고 말하기도 난처했다. 그냥 웃으면서 좋게 좋게 서로 인심 좋은 관계를 남는 것이 낫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목수님도 그걸 감안해서 견적을 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타주의를 지향하하는 사회의 이면에 보이지 않는 이기주의가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호주인들의 공사 경우에는 이런 일은 거의 없다. 더 주고 덜 주고 하는 것이 없다. 인정 없고 차가워 보이지만 감정적 손실이나 소모가 없다.
요즘 시대에 우리가 타인의 호의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의 시간 속에서 이런 수많은 이타주의를 가장한 이기주의를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면 우리의 인식체계는 변화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세상에 순수한 의도로 불특정한 타인을 도와준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타인의 순수한 선의와 호의에 어색함과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쌓여온 집단주의의 위세는 여전히 견고하고 엄격하다"
- 책 속 인용문 -
나 또한 과거 오랜 시간 학교와 직장 생활 그리고 사회생활 속에서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게 심어졌다. 그런데 호주에 와서 이런 집단주의 성향이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일면식 없는 낯선 이들과 함께 사는 셰어하우스에 처음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낯선 사람들과 동거하면서 처음엔 그들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집안에서 마주치면 먼저 말을 건네고 음식을 하면 나눠먹으려 했다. 그들은 그런 나를 다소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최초 이런 행동은 나의 자발적인 행동이었지만 이런 행동에 피드백이 없으면 계속 지속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지만 나의 이런 배려와 호의에 상응하는 피드백이 없자 이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나무는 있어도 아낌없이 주는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보상과 피드백이 있어야만 그 행동을 지속할 수 있다. 물론 그 피드백과 보상이 금전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 호의에도 계속되는 무관심은 버티기 힘들다. 결국 이타적인 행동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향한 이타적인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직할 뿐 아니라 이기주의 자체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다"
- 책 속 인용문 -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로 태어났다는 성악설(원죄)을 믿으면서도 내가 이타적일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신이 인간에게 혹은 부모가 자녀에게 행하는 그런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가 타인에게는 가능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나와 타인이 이기적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지속되는 것이다. 차라리 나와 타인의 이기주의가 합의점을 찾은 것이 더 올바른 것이다. 이게 바로 개인주의이다. 각자의 욕망을 꺽지 않으면서 양보하고 절충하는 방법을 찾는 것, 즉 서로의 이기주의가 서로를 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 이건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한 이해공감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쉽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늘 관찰하며 내적 성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을 먼저 발견하지 않고는 결코 신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책 속 인용문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을 계속 살피는 것(성찰)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기독교가 공동체와 집단주의 문화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개인주의 문화는 서양의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은 과거 고대의 제사장과 중세 성직자(교황)를 통해서만 연결될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신은 나(개인)와 직접 연결된다. 우리는 누구나 신과 연결되고 대화할 수 있다. 이건 나와 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개인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로 일부 중개자(권력자)를 통한 신과의 접속을 개인과의 접속으로 바꾸는 혁명적 사고를 일반화시킨 것이다.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사이에서
우리는 항상 공동체와 나(자아) 둘 사이에서 접점 찾기 위해 고민하며 살아간다. 나는 개인적으로 현재 우리가 과거 집단주의와 앞으로 다가오는 (초) 개인주의 시대의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본케 부케 같은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모습(이기적인)과 공동체와 사회에 부합하는 모습(이타적인)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을 절충이다. 아마도 현재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를 오고 가는 개인주의라는 경계에서 살아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개인주의가 나(자아)와 공동체(사회)가 건강하게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아름다운 사람은 어쩌면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일지도...
당신은 아름다운 개인주의자인가?
개인주의를 권하다
"인간에게 대지와 삶은 무겁다. 그리고 중력의 영이 그러길 바란다! 가벼워지고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