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EP 105 (추가개정판)
[그제 오후, 제주도에 초속 20m의 폭풍을 동반한 강한 비로 적지 않은 재산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제주도 동부 연안에 그 피해가 집중됐는데요. 이 날 오후 우도와 성산항을 운항 중이던 한 여객선에서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아시아계 외국인 남성이 배에서 추락해 실종되는 인명 피해도 발생했습니다. 해경은 해상구조대와 함께 주변 바다를 탐색하고 있지만 강한 조류로 인해 시신이 멀리 휩쓸려 갔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다음 뉴스입니다...]
“엇! 설마…”
나는 제주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제주 공항의 탑승장 게이트 앞에 앉아있다. 눈앞에 들어온 대형 TV 속 뉴스를 보는 순간 뭔가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인다.
‘아~ 그 친구분 배에서 내리더니 자긴 다른 일이 있다며 먼저 가 버리던데요’
순간 장주임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혹시 그녀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온갖 불길하고 좋지 않은 예감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그녀와 나는 어젯밤을 같이 보냈고 그녀는 아침 일찍 비행 일정이 있어 먼저 제주도를 떠났다.
[희택 오빠! 이제 출발하겠네, 난 이제 상해 도착해서 동방명주 앞에서 야경을 바라보고 있어. 너무 예쁘다. 외계에서 온 로켓 같아 보여. 오빠랑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 주 부산 가면 봐!]
장주임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섬뜩한 기시감(旣視感)이 또다시 온몸을 엄습한다. 그녀의 메시지가 상해에서 춘옌과 함께 했던 마지막 밤을 떠올린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전과는 달라진 장주임의 말과 행동은 과거 춘옌의 모습을 닮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희택 오빠! ‘부산시 사상구 ****** 강변 오피스텔 1501호’ 여기 부산에서 내가 지내는 오피스텔 주소야, 도어록 비밀번호는 **** 이야, 필요하면 오빠 거기서 지내도 돼요]
또다시 그녀의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녀가 보내온 주소는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녀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나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구해놓고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섬뜩한 기분에 휩싸인다.
[어, 그래 부산 오면 봐]
나는 그녀에게 간단한 답장을 보내고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비행기에 싣는다. 어지러운 상념들이 머릿속이 복잡하다. 멀어지는 제주도의 야경을 뒤로한 채 비행기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저희 DG 오토모티브 경력 공채에 합격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공식적인 입사 일정과 급여 및 복리후생 관련 사항을 E-mail로 보내 드렸으니 확인 바랍니다. DG 오토모티브의 가족이 되신 걸 다시 한번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또 다른 새로운 삶의 시공간이 시작되려 한다. 이직할 직장으로부터 온 이 메일을 확인한다. 메일에는 구체적인 급여 및 복리후생 그리고 입사 일정과 기숙사 배정에 관한 사항들이 일목 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DB중공업을 다닐 때와는 뭔가 다른 디테일 함이 이 메일에서 느껴진다.
선박과 자동차라는 서로 다른 제품의 차이일까? 제품이 작아질수록 디테일이 중요해지는 법이다. 당시 한국의 조선업은 중국의 추격과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긴 불황을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반면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글로벌 1위를 고수하던 일본 도요타(TOYOTA)의 페달 게이트(리콜 사태) 사태를 기회로 삼아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갖추며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며 해마다 인력과 설비투자를 늘려가고 있던 시기였다. 비즈니스 세계에선 누군가의 불행은 누군가에게 기회가 된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선박부터 자동차 그리고 반도체까지 초대형에서부터 초소형까지 아우르는 제조업 분야의 최대 강국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전 세계 어느 국가도 이렇게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곳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선박부터 자동차,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다양한 제조업을 고르게 성장시킨 나라는 극히 드물다.
“진짜 가는 거라?”
“어~ 가야지”
“거~ 대구는 여름 되면 덥어가 어디 사람 살긋나?”
“거도 다 사람 사는 데다”
“가믄 어디서 지낼라꼬?”
“회사에서 기숙사도 다 제공해 준단다”
“그래? 다행이네, 집 구하는 것도 돈 마이 드는데… 가거든 열심히 일해가 얼른 돈 모아가 집도 사고 해야지”
“그래 알았다. 내 알아서 하께”
“그래 우짜든 둥 가서 잘 지내고 아빠 엄마도 가면 한 번씩 찾아가꾸마, 엄마가 뭐 도와줄 껀 없나?”
“없다 괘안타. 내가 정리하께. 엄마 일 봐라”
방 안이 어수선하다. 나는 며칠 뒤 떠날 짐을 정리하고 있다.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닌데 30년이 넘게 지내온 고향을 떠나는 기분이 왠지 어색하다. 막상 내 방을 정리하려 하니 일이 많다. 옷장과 서랍 깊숙이 잠자고 있던 물건들이 하나둘씩 쏟아져 나온다. 새로운 일상을 준비하기 위해선 현재의 일상을 정리해야 한다.
“엇! 이건?! 하하하”
서랍 속을 뒤지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중학교 시절 꼬치친구 다섯이 나란히 교회 예배당 골방에 앉아 성경 공부를 할 때 찍었던 사진이다. 사진 속 가운데 심은하를 꼭 닮은 교회 누나가 마치 성모 마리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다. 나는 그녀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손가락으로 승리의 브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왼쪽에는 귀덕이와 춘곤이 성경책을 들고 식상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모태신앙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일요일을 반납하며 교회에 끌려 다닌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둘의 얼굴에선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보기 힘들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나 우리들과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인다.
오른쪽에는 나의 꼬임에 넘어온 동구가 입을 반쯤 벌린 채 심은하 누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동구는 심은하를 꼭 닮은 교회 누나가 있다는 내 꼬임에 넘어가 교회에 따라 나왔다. 녀석은 대담한 건지 아님 무심한 건지 십자가가 걸려있는 교회 예배당에 손목 염주를 차고 나타났다. 부처님이나 예수님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신 분은 심은하 누님인가 보다. 그는 누나만 우러러보고 있다.
사진 제일 끝에는 두 볼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재득이가 앞에 놓인 과자봉지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그는 예수나 심은하 보다 눈앞에 과자가 더 매혹적인 모양이다. 그에게 신앙과 성욕은 식욕 앞에서 사라진듯 보인다.
“이야~ 이게 언제 적이고? 큭큭큭”
“그러게? 옛날 생각나네”
“저 때가 참 좋았는데…”
“심은하 누나는 잘 살고 있나 몰라?”
꼬치친구들을 소집했다. 대구로 떠나기 전 그들에게 신고식을 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이런 일 저런 일을 핑계로 모이며 20년간의 우정을 다져왔다. 다섯 친구가 자주 모이는 허름한 돼지국밥 집에 모여 앉았다. 뽀얀 국물에서 김이 올라온다. 친구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내가 가지고 나온 그 사진을 보며 옛 추억을 상기하며 한 마디씩 투척한다.
“그 누나 얼마 전에 이혼했다는 거 같던데… “
"헐! 정말?”
귀덕이 뭔가 들은 소문이 있나 보다. [마지막 승부] 속에 그 심은하 누나는 장동건이 아닌 어느 금융업계의 나이 많고 돈 많은 지점장 아저씨에게 팔려갔다는 소문을 들렸다.성모 마리아처럼 순수한 사랑을 할 것만 같아 보이던 그 누나도 결국 나이가 들고 현실을 깨닫고는 돈이라는 존재에 자신을 내어준 듯 보였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줄거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현실적인 판단은 때론 현타(현실자각타임)를 가져오기도 한다.
“남자가 돈 있으면 여자는 생기는데 또 계속 붙어있진 않나 보네”
“그건 또 별개의 문제인가 보지 큭큭”
“남자란 자고로 여자를 한 번 가지면 질리게 되는 법이지 그럼 또 다른 여잘 찾겠지 돈이 있으면 여자는 계속 꼬이니까”
“나도 한 번 질리도록 가져보고 싶네 휴~”
“가질 수 없는 너~♩ ♬ 큭큭큭”
“푸하하”
또다시 짝 없는 수컷들의 한숨 섞인 푸념이 시작되고 술기운이 오른 친구들은 노래방에서 푸념을 노래 가사에 실어 날려 보낸다.
나는 늦은 밤 친구들과 헤어지고 취기가 올라 알딸딸한 기분으로 도로 옆 보도블록 위를 걸으며 집으로 향한다. 잠시 가로등 불빛 아래 기대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며 태양처럼 내리쬐는 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빠 뭐해요?]
장주임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문자메시지를 보내온다.
[뭐 하길래 답장이 없어요?]
답장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또다시 메시지가 날아든다. 집착에 가까운 모습에 조금씩 그녀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순간 얼마 전 그녀가 가르쳐준 그녀의 오피스텔 주소가 떠올랐다. 그 주소를 찾아 그녀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정말 나의 집에서 걸어서 15분이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띠띠띠띠”
“띠리링 찰칵”
그녀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도어록이 열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오피스텔은 복층 구조의 작은 원룸 형태를 하고 있다. 데크(마루) 모양의 장판이 깔린 거실에는 바닥과 색깔을 맞춘 듯한 브라운 계열의 3인용의 작은 소파와 대형 TV가 놓여있다. 옆으로는 혼자서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조그만 주방이 보인다. 그 앞에는 하얀 2인용 탁자가 놓여 있다.
“어! 이건 민들레 꽃이잖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꽃병에는 한 송이 민들레 꽃이 꽂혀 있다. 민들레의 꽃말은 행복이다. 행복을 원하는 자는 현재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다시 과거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춘옌도 그랬다. 자신을 민들레에 비유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항상 그 행복이란 녀석은 계속 쫓아가야만 하는 존재였다. 현재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깨달았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이루면 행복해지겠지 하며 행복을 뒤쫓기에만 급급하다. 가지면 이루면 참으면 행복해질 거라 믿었지만 또다시 행복은 저만치 멀리 가버린다.
“도대체 이건 뭐지?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장주임이 지금 춘옌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인가?”
옆 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에는 머리가 닿을 듯한 천장 아래 퀸 사이즈의 매트리스가 깔려 있다. 나는 그 매트리스 위에 앉아본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엉덩이를 감싸며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 느낌이 포근하다.
술기운에 나도 모르게 잠이 밀려온다. 매트리스에 몸을 누인다. 두 손을 머리맡으로 가져다 가다 베개 아래에서 뭔가 비닐 포장이 부스럭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음 뭐지?”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를 집어 든다. 베개피 안쪽에 뭔가가 들어있다. 나는 배개피의 지퍼를 열어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낸다.
“엇! 이거 콘돔이잖아! 이게 왜 여기에 들어있지?”
순간 이상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워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있는 옷장을 열어본다. 옷장에는 옷걸이에는 그녀의 잠옷과 외출복들이 걸려있고 옆에 있는 서랍장들은 단단한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장주임의 등장과 춘옌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이상한 말과 행동들… 그리고 알고 보니 내 주변에 머물고 있었다는 그녀, 이 모든 사실에 께름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순간 술기운이 가시는 기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복층 계단을 내려간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무심코 신발장을 열었다.
“헉! 이건!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