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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03. 2023

권력에의 의지

맥도널드에서 엿들은 사연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라고 했다, 알겠나?"


네 가족이 맥도널드에 모여 앉았다. 백발의 할아버지와 중년의 부부내외 그리고 한 명의 청년이 창가의 사각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내가 햄버거 세트를 받아 들고 그들의 옆 빈자리에 앉으려 할 때였다. 나의 가장 먼저 귀에 들려온 말이었다.


귀국 후 거의 매일 푸짐한 한국식 밥상에 입이 호강 중이다. 살찌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천에 널려 있는 산해진미들의 유혹에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다 보니 몸이 조금씩 불어난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많다는 것은 과연 행복한 것일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혀가 원하는 것 먹다 보면 원치 않은 몸을 가져야만 하는 딜레마를 가져온다. 너무 잘 먹어서 죽는 시대다.


'길을 가다 마주친 맥도널드, 호주에서의 그 맛이 날까?'


한국에만 있었다면 생기지 않을 호기심이 발길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정작 햄버거의 맛보다 앞 테이블에 앉은 가족의 사연에 귀가 솔깃하다. 귀가 혀를 이겼다. 햄버거는 먹는 둥 마는 둥 귀를 쫑긋 세워 네 가족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모든 신경이 귀로 집중되니 햄버거는 무슨 맛인지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사연의 대강은 이러했다.


아들은 경기도 평택에서 추석을 맞이해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그런데 명절 귀성이 아닌 영구 귀향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날 그 불편한 사실을 가족들에게 공표했던 모양이다. 아들이 명절을 보내러 온 것인 줄로만 알던 가족들이 아들의 영구 귀향 소식을 듣고 나서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불편하지만 그들도 아들을 향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어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독립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하고 집을 떠나 타지로 떠나던 때의 일을 꺼내 들었다.


아버지는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한 아들에게 많이 실망한 모양이었다. 아들을 양심 없는 실패자처럼 꾸짖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회유했지만 그 말이 아버지처럼 모나지 않았을 뿐 품고 있는 의미는 아버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그래, 아들아 이해해라 니 아버지가 다 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아이가"


어머니는 시종일관 말을 아꼈지만 결국 아버지의 눈치에 결국 그들에게 동조하는 편에 섰다. 3:1의 열세 속에 아들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니가 뭐 이렇다 할 자격증도 없고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버티면서 경력이라도 쌓아야지 이렇게 나와서 뭘 우짤라고 하노 도대체가! 생각이 있는 놈이가 없는 놈이가 니가"


내가 햄버거와 라지 사이즈 감자튀김 그리고 콜라까지 다 마실 때까지도 아들은 단 한마디도 않고 그들의 공습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는 어떤 말도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공습이 지나가길 바랄뿐이다.

 

그가 추석연휴의 마지막날 가족에게 자신의 처지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직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그가 돌아갈 곳은 결국 부모님의 그늘 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한 인간은 결국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 경제적 의존은 절대로 정신적 독립을 허락할 수 없음 알고 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내 생각과 상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구속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나의 몸이 구속되어 있지 않아야 가능하다.


1시간가량 지나자 가족들의 핀잔과 푸념이 잦아들었다. 할아버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일어섰다.


"@@아! 집에 가자"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조용히 말했다. 가족들은 차례로 2층 매장에서 계단을 따라 한 명씩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까지 아들은 자리에 앉아 꼼짝을 않고 있었다. 가족이 계단 아래로 모습이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아! 뭐 하고 있노? 집에 안 갈 거가?"


아버지가 다시 계단으로 올라오며 소리쳤다. 그제야 아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 계단으로 향했다. 뒷모습이었지만 서둘러 팔소매로 눈가를 훔치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건 아마도 눈물이었으리라.


5년 전 이맘때였다. 나도 그렇게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지구 남반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조금씩 작아지는 한반도의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흘린 눈물도 그 청년이 흘린 눈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때 그 눈물의 의미는 자신이 못나서도 그렇다고 내가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건 나의 심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나오는 서러움이 묻은 눈물이었다. 내가 떠나기 전 사람들은 다들 냉혹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냉정함을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눈치들이었다. 냉정함만 가득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결국 더 냉혹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때 나의 지인들은 그 청년의 가족처럼 나에게 핀잔과 푸념을 쏟아내지 못한 것은 내가 그에 상응하는 정당한 해명과 정의로운 이유들을 모두 다 갖추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건 나와 그들이 대등한 관계이고 나는 가족과 그들 어디에도 경제적으로 구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돈과 힘이 없으면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지는 세상이다. 아무리 옳고 정의로운 말과 행동도 가진 게 없는 자가 하면 오지랖일 뿐이다. 옳음과 정의도 힘이 있는 자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부과 권력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닌가. 이건 결국 부와 지위가 가져다주는 발언권과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힘, 즉 권력에의 의지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모두가 자신만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지만 그 종착지를 냉혹하게 파헤치고 까뒤집어보면 그 수많은 꿈이 대변하는 한 가지 단어 만이 남는다. 그건 권력(힘)이다.


좀 전에 그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그렇게 쉼 없이 핀잔과 질책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 또한 지금의 자신이 아직까진 아들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자식이 권력이 생기면 부모는 자식 앞에서 말을 줄인다. 가족 간에도 이러할진대 어찌 세상이 덜하리오.


인간 세상은 이 권력에의 의지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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