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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Feb 18. 2024

미완성 콤플렉스

쌓여가는 미완성 원고들을 보다가...

글을 쓰다 멈췄다. 

 

다시 이어서 쓸려해도 쓸 수가 없다. 그렇게 쓰다가 멈춰버린 미완성의 글들이 서랍 속에 쌓여간다. 그것들은 다시 이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그건 내가 내 의지대로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을 완성하고 싶다. 하지만 멈춰진 글을 이어보려 키보드에 손을 올려보지만 좀처럼 나의 무의식은 그것들에 다시 빠져들지 못한다. 그렇게 멈춰진 글들은 미완성으로 남아 이어질 날만 기다린다. 그것들이 완성되어 독자를 만나게 될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미완성으로 남아 서랍 속에서 영원히 잠들어 버릴지 알 수 없다. 나는 다만 써지는 것들만 계속 써내려 갈 뿐이다.

 



나의 컴퓨터 하드 디스크 안에는 수많은 미완성 원고들이 있다. 수십 만자에 달하는 미완성 장편 소설도 있고 쓰다만 단편, 칼럼, 독후감, 에세이들도 적지 않다. 열정적으로 써내려 갔던 글이었지만 이런저런 상황과 이유들로 글의 멈추고 난 뒤 시간이 지나며 그때의 열정과 관심은 어느새 다른 글들로 옮겨버렸다. 이건 두 가장 경우가 있는데 장편의 글이 멈추는 건 보통 나의 일상과 환경의 큰 변화가 생기면서이고 단편은 보통 글에 몰입해 있다가 약속시간 혹은 출근시간 등의 현실의 제약으로 인해 글을 중단된 경우이다. 후자 같은 경우, 만약 글이 2/3 이상 초고가 쓰였다면 나중에 뒤이어 완성되는 경우가 많지만 1/3 이상 초고가 진행되지 않으면 미완성으로 남아 서랍 속에서 잊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완성 원고

그렇게 수많은 글들이 ~ing 상태로 남아 다시 이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그것들이 어느 서랍(하드 디스크의 폴더)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늘 컴퓨터 하드 디스크와 웹 하드를 정리하면서 수많은 미완성 원고들을 찾아내었다. 새삼 놀라게 된다.


이게 여기 있었구나!”


쓰다만 원고를 읽으며 그때의 글을 쓸 때의 상황과 느낌이 불현듯 찾아든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물론 이 기억은 그때와 완전히 같지 않을 것이다. 왜냐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기억이 편집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런 기억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만약 그 이야기들이 다시 이어진다면 그건 그때의 기억과 감상이 아닌 지금의 기억과 감상으로 변형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 글들을 이어서 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드디스크를 정리하다 수많은 미완성 원고들을 들여다보며 상념에 잠긴다. 그것을 완성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나는 지금 그 미완성 원고들이 불러온 또 다른 상념(지금 쓰고 있는 글) 이 새로운 글을 쓰게 하고 있다. 이 글은 미완성이 아닌 완성본이 되어 독자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글이란, 작가에서 시작해 독자에서 끝나는 것이다. 독자가 없는 글은 일기이다. 일기도 어찌보면 나중에 다시 읽을 '나'라는 독자가 있는 글이다. 그런데 일기가 독자들을 더욱 감동시키는 경우가 있다. 일기가 고전(안네의 일기 등) 이 된 경우이다. 일기만큼 진솔하며 가식 없는 글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런 류의 일기는 작가가 죽고 난 후의 일이지만. 문득 가식과 위선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 어쩌면 일기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읽히지 않는 글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많이 읽히는 글만이 영속적인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세월이 흘러도 계속 회자되는 글, 고전이다. 그리고 지금 생명력을 키워가는 글도 시간이 지나면 고전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많이 읽히지 않는 글이 생명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생명력이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글도 세상에 많이 존재한다. 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감춰지고 알려지지 않는 것일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페소아의 글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그의 비밀스러운 글들은 그가 죽고 그의 오래된 친구(아돌포 카사이스)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때부터 페소아는 다시 새 생명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제 그의 글은 고전이 되었다.


두 가지의 미완성


나의 미완성 글들을 보다가 꽤나 완성도가 높은 글들이 많은 글들도 적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완성도가 높은 글들을 다시 읽어보고 나니 왜 내가 이 글을 완성시키지 않았는지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왜 이 글이 발행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해받기 힘든 글 (불편한 글)


나는 비평과 칼럼 형식의 글을 즐겨 쓴다. 이 글이 독자들이 읽었을 때 사회 특정 계층을 대변하거나 혹은 특정 계층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글을 쓰는 작가는 주관적인 혹은 개인적인 생각을 썼지만 그것이 읽는 (특정) 독자들에 의해 색깔이 정해지거나 혹은 반감과 불편함을 가지게 하는 그런 글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나는 글을 쓸 때 의도를 정해놓고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글의 어떤 색깔을 어떤 의도를 품게 될지 나도 모른다. 쓰다 보면 생각과 의미가 뚜렷해지고 뚜렷한 생각과 의미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비치곤 한다.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은 무언가를 읽고 느끼는 방식이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J형이 살기 적합한 곳이다. 웃긴 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제나 불확실성과 불분명한 것들로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P는 세상 속이 아닌 세상 밖을 꿈꾸는 것인지도...


요즘처럼 서로 간의 반목과 갈등이 만연한 시기엔 편 가르기는 더욱 심해진다. 의도를 부여하고 색깔을 규정하고 그것으로 네 편 내편으로 나눈다. 하지만 알다시피 세상일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내 편도 없다. 그저 모든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다만 그 생각은 맥락과 소신이 있어야만 한다. 생각은 변하고 움직이지만 맥락과 소신 없이 변하고 움직인다면 그 자는 가까이하면 좋을 게 없다.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면 그 과정과 이유가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 그건 맥락을 가지고 소신이 될 수 있다. 


불법이나 범법적인 행위를 제외하고서 옮고 그름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양심에 따라서 그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옳은 것은 자신의 이익과 가족의 안녕을 위하는 것이다. 설사 다른 이의 비난과 질책을 받을지라도 나와 나의 가족에게 피해와 손해를 끼치는 것은 그른 것이 되어 버린다. 그 누가 ‘자신을 희생하고 가족을 저버리고 소신을 지켜라’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 자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일 가능성이 높다. 


적지 않은 시간 사색하고 글을 쓰면서 나만의 소신이라는 게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것들이 글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나의 소신이 누군가에겐 불편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또한 글을 통해 나를 드려다 보던 것이 이제 세상을 향하고 있음이기도 하다.


공감받기 힘든 글 (불쾌한 글)


나는 필명을 쓴다. 필명을 쓰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드러내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이 반영된 것이리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는 그 사회마다 가지는 통념과 주된 가치가 있게 마련이다. 물론 이 통념과 가치는 시대(시간)가 변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하지만 인간의 반응 속도는 항상 느리다. 인간은 기계화 디지털화 거치고 이제 인공지능화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기계화(아날로그)가 도입되고 발전하는 시기에 대부분의 인간은 손과 발에 의존해 있었고 디지털의 도입과 발전 시기에 대부분은 기계에, 지금 인공지능의 시대에 대부분은 디지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항상 인류 대부분은 한 발 느리게 적응해 간다.


그래서 일반인이 그 시대의 통념과 시스템에 벗어나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일상 속에서 쉽지 않다. 일반인이 일반적이지 않으면 소외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대중 속에서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 뭐 요즘 같이 매체의 다양화 (즉 각자가 보고 듣는 것이 너무도 다른) 시대엔 너무도 다양한 개성 때문에 공감대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나는 소설과 에세이 또한 즐겨 쓴다. 보통 소설과 에세이를 쓸 때는 감성적이게 되는 데 이 감성적인 상황 연출이 때론 너무 개인적인 느낌 혹은 사회 통념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쓸 때는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쓰는데 다 쓰고 나서 보다 보면 글을 공개하기가 망설여지는 글들이 있다. 만약 내 필명과 내가 완전히 분리되었다면 가능하겠지만 내 필명과 현실의 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글이 공개되면 현실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걱정된다. 전업작가로 살아간다면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난 생업과 일상의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몸은 구속될지언정 글이 구속되질 않기 바란다. 구속되지 않으려 글을 쓰는데 구속된다면 난 글을 쓸 이유가 없어진다. 


나는 보통 일상에서 나의 가치관과 신념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일상의 관계는 가치관과 신념보다 유머와 일상의 얘기로 채우려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무난한 주제를 얘기하려 한다. 나이가 들고 다 큰 어른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 왜 이렇게 혼란과 갈등이 만연하고 심화되는지는 그들이 가치관과 신념을 얘기하기 때문임을 안다. 또한 가치관과 신념을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자는 부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 한정된다. 부과 권력이 가치와 신념을 만들어내는 세상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나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삶이 다른데 어찌 비슷한 신념을 가진 자가 찾기 쉬울까. 들을 귀가 있는 자 인지 아닌지는 조금만 대화해 보고 지내다 보면 알 수 있다. 바뀌지 않는 것은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나부터 변화되면 된다. 물론 비슷한 신념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면 일생에서 더없이 기쁜 일일 것이다. 그건 축복이다. 그 사람이 바로 영원한 내 편 아니겠는가.

 

하나님,

제게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옵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키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제게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 라인홀드 니부어의 [평온의 기도] -


누군가와 반목과 갈등이 찾아들려 하면 항상 떠올리는 기도문이다. 신념(믿음)보다는 화목이다. 세상이 갈수록 냉혹해지는 건 나의 신념 때문임을 모른다. 화목을 깨뜨리고 신념을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그 망할 놈의 신념(이념, 가치관) 때문에 죽어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신념을 누구 앞에서 설득시키고 강요하는 말로 상대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이렇게 필명으로 글을 쓰고 나의 가치관과 신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이 세상에 누구 한 명이라도 나의 이런 가치관과 신념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길 바라는 마음인 것뿐이다. 있다면 나의 글을 계속 읽을 것이고 아니라면 자신에게 맞는 글을 찾아 떠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완성(미공개)의 글들이 서랍 속에 계속 늘어가는 이유는 누군가에겐 이해하기 힘들고 불편할 수 있는 그리고 누군가에겐 공감하기 힘들고 불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간 이 글들이 완성되어 드러나고 이해되고 공감되는 날이 있길 바란다.


글을 쓰다가 in Lake Parrama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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