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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05. 2023

토론이 필요한 세상

마지막 독서 모임에서... (칸트 편)

또다시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세 번째 참석이자 마지막 참석이었다. 

그런데 당일날 약속시간이 다되어 갑자기 장소가 변경되었다.


원래 모임을 하던 카페가 [내부수리 중]이다. 가장 먼저 도착하신 분이 다른 카페를 물색한 모양이다. 근처의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우아~"


한국에 와서 이렇게 화려하고 멋있는 인테리어의 카페를 처음 봤다. 나는 읽어야 할 책은 읽지 않고 한동안 카페 안을 둘러보는데 적잖은 시간을 보냈다. 하는 일이 목수일이다 보니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고풍스런 카페

그 사이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눈호강의 아쉬움을 사진기에 담고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 여가 흐르고 각기 흩어져서 책을 읽고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카페 중앙에 있는 가장 큰 테이블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된 책소개, 오늘도 다양한 책들이 독자의 머리를 거쳐서 새롭게 재창조 되고 있다.


"**님, 오늘도 재밌는 이야기 해주실 거죠?"

"오늘도 기대되는데요, 무슨 얘기를 해주실지... 하하"

"하하하"


내 차례가 되었다. 세번째 참석이라 이제는 안면이 있는 분들 몇 명 보인다. 그들은 두 차례 나의 스토리텔링을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섞여 있음이 느껴졌다.  


"이번엔 칸트를 읽었어요. 서양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인물이 있어요. 그 인물이 바로 임마누엘 칸트죠. 이 칸트의 산을 넘지 않고는 서양철학을 논할 수가 없어요, 다들 칸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죠? 혹시 칸트 하면 뭐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


또다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나는 또 잠시 뜸을 들였다.


"[관념론]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로 나뉘어 대립하던 서양 철학이 칸트를 만나 한 번 중재와 통합의 순간을 맞이한다. 칸트는 철학 사유의 방식을 대상에서 주체로 가져오는 전에 없던 발상을 해낸다. 결국 인간이 보고 듣고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은 인간의 뇌(관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뭐가 맞고 틀리다 것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념은 교육과 문화 그리고 환경에 의해 프레이밍 되어 누군가는 절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또 상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인간은 사물과 대상의 실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데로 아는 만큼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아닌가? 누군가에겐 당연히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신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예수는 인성이 뛰어난 여러 예언자 혹은 선지자 중 한 명일 수도 있다. 무엇이 실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데로 믿는 데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긍정적인 혹은 희망적인 무언가를 가져다준다면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국 세상의 실체를 모두 다 볼 수가 없다. 결국 내가 아는 만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는 만큼은 그 자신의 프레임(관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아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인간은 고작 100년도 채 살지 못하며 그 시간도 대부분 익숙한 일과 환경 그리고 관계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다가 죽는다. 


또한 인간이 가진 인식 능력은 아주 제한적이다. 예를 들자면 인간이 가진 오감(입력기관 :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과 뇌(프레임)가 아닌 다른 생명체의 감각과 뇌로 인식되는 세상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다른 생명체가 세상을 인식하는 세계는 인간이 알 수가 없다. 수백만 종의 동식물들 혹은 외계의 다른 생명체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인간이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인간이 그토록 알고자 혹은 풀고자 하는 신비의 영역에 해답은 인간의 사유방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인식체계와 프레임이 아닌 다른 존재의 관점에선 이게 아주 단순하게 있는 것들이지 않을까? 인간이 가진 관념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신처럼 세상 위에 굴림하려 한다.


"그러니까 칸트는 결국 우리 인간이 가진 인식능력 즉 뇌라는 프레임의 한계에 갇혀 있다 걸 말한 거죠, 죽을 때까지 무엇이 실제인지 모른 체 관념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겁니다"


또다시 모임에 참석한 청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모양이다. 다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인간도 관념의 방향과 변화가 생기기도 해요"


관념의 변화는 보통 삶의 변화와 함께한다. 기존에 형성된 관념(프레임, 교육과 성장환경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이 변하기는 쉽지 않아요. 하지만 기존의 관념의 자신의 삶을 계속 억누르고 있거나 혹은 그 관념을 견지함이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인간들 중에 전에 없던 개념과 관점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세상의 프레임을 벗어난 관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런 인물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그리고 그런 인물의 등장이 세상의 큰 변화를 이끌어낸다. 물론 그들이 제시하는 관념이 다수의 호응을 얻어낼 수 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게 대부분의 인간은 관성의 법칙을 따르며 살아간다. 새로운 개혁과 변화를 두려워하며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화는 보수를 동반한다. 뇌의 수용 능력과 반응 속도가 느려지면 기존의 나의 뇌로 이해하고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변화가 두려운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기존의 관념으로는 더 이상 사회의 유지와 존속이 힘든 상황에 치닫았을 때이다. 세상의 양극화가 불평등이 심화되고 삶이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다 느끼면 사람들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생긴다. 인간에게 이 보다 더한 지옥은 없다고 생각되면 그 어떤 변화와 혁명도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 히틀러의 말에 선동된 독일 국민들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내 삶이 지옥이면 다른 이의 삶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다 같이 살 수 없다면 다 같이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쓰지 않았나요?"


그때였다. 나의 '관념론'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잠시 적막이 흐르고 있을 때였다. 내 옆에 앉아계시던 나와 비슷한 동년배의 남자분이 나에게 물었다.


"오~ 아시네요, 맞아요. 칸트의 대표저서죠, 논문 한 번 쓰지 않았던 철학과 교수가 11년간의 침묵을 깨고 완성시킨 논문이었어요. 그 당시엔 그의 논문을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난해하고 어려워 주목을 받지 못했죠. 하지만 그 책은 진리를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렇다 진리(眞理)가 가장 우선이다. 칸트는 11년간의 사유의 시간을 거쳐 [순수이성비판, 1781]을 출간했다. 그는 가장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인간에게 있어 진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것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우선되고 중요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진리를 깨우친 고대 성인들처럼 인간들도 그들처럼 진리를 알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트이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동양철학과도 맞닿아 있어요, 진선미 아시죠?"

"미스코리아요?"

"하하하, 그렇죠 미스코리아의 진선미(眞善美), 거기서 뭐가 제일 우선이죠?"

"뭐~ '진'이 제일 이쁘잖아요"

"아냐~ 요즘은 뭐 진선미 모두 안 이쁜 사람 있냐?"

"하하하, 맞아요. 진이 제일 앞에 있긴 하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진(진리)을 얘기했죠 그다음은..."

"선이겠네요"

"맞아요, 칸트는 그다음 저서인 [실천이성비판, 1788]에서 진리를 깨우친 자는 선을 행(善行) 해야 한다고 주장해요"


진리를 알면 선행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이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이다. 이건 과거 성인들이 모두 실천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칸트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그 또한 수많은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들과 크게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불우한 이웃한테 빵하나 동전 몇 닢 쥐어주는 것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선행일 뿐이죠, 인간에게 당장의 의식주 해결도 중요하지만 칸트는 가난하고 마음이 병든 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봤어요"


칸트는 마지막 저서 [판단력 비판, 1790]에서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을 얘기한다. 그건 바로 상상력이다. 칸트가 말하는 상상력은 심미적인 상상력을 의미한다. 이건 인간만이 행하는 예술행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아름다움은 '나다움')이 바로 예술이고 그것은 음악, 미술, 문학, 무용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이것은 많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고 향유된다. 그리고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감성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예술에 능하거나 예술작품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사회가 병들어 가는 이유는 이 공감과 이해능력의 결핍 때문이 아니던가? 칸트는 모두가 예술을 행하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고 본 것이다.


"진선미가 아마도 칸트의 철학을 가장 짧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진선미는 동양의 철학이기도 하죠. 칸트는 어쩌면 서양 철학을 동양과 연결시킨 최초의 서양 철학자가 아닌가 싶어요"

"그럼 이제 우리 모두 예술을 해야 되나요? 하하하"

"**님, 오늘도 완전 빠져드는 이야긴데요, 칸트는 로맨스가 빠져서 좀 아쉽지만 큭큭"

"하하하 그러네요 죄송해요. 니체도 에리히 프롬도 다 로맨스가 있었는데, 칸트는 앙꼬가 빠진 느낌이네요 하하, 어쨌든 저의 책소개는 이 정도로 마무리할게요"

"짝짝짝"

"짝짝짝"

"역시 오늘도 저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네요"

"다음번엔 또 어떤 철학 이야기를 들고 와서 이야기해 주실지 기대되네요"

"하하...."


다들 학창 시절 윤리 교과서에서 밑줄 그으며 외워댔던 그 '칸트'의 철학을 이제야 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음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다. 나는 그냥 입가에 미소만 띠고 대답을 않았다. 


"저기 이제 저희 카페 마감할 시간이라서요"


오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다들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섰다.


"여기선 집에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님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그때 한 남자분이 나를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도 좀 안될까요?"


다른 한 여자분이 물었다.


"죄송해요, 2인승이라 자리가 하나밖에 없어서요"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에는 오토바이가 있었다. 늦은 밤 그의 허리춤을 잡고 한적한 도로를 질주했다. 과거 영화 "비트"가 떠오르며 왠지 모를 해방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는 배달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의 등 뒤로 음식을 담는 박스가 있었다. 나도 해외에서 배달일을 많이 했었기에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아버지가 지독한 책벌레라고 했다. 학교 경비일을 하시는 데 경비실에 앉아 책만 보신다고, 자신은 책이 싫었는데 집에 책이 쌓여있어 읽진 않아도 항상 눈에 띄어서 이렇게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책 읽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그래야 자신이 좀 더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나...

영화 [비트]

"다음에 오실 때 말씀하세요 제가 태워다 드릴게요. **님 오늘 칸트 이야기 너무 좋았어요. 덕분에 오늘도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같이 책 읽고 서로 생각을 듣는 게 좋은 거 같네요"

"그럼 다음 주에 또 뵐게요 "

"부릉~"


그는 나를 집 근처에 내려주었다. 나는 대답은 않고 '부릉'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세 번째 독서모임이 끝이 났다.


나는 이 세 번의 독서 모임에서 니체를 통해 '모순'을 얘기했고 에리히 프롬으로 '사랑'을 그리고 '진선미(진리, 선행, 예술)'를 마지막으로 칸트를 얘기했다.


3번의 독서모임을 통해 내가 알게 된 의미 있는 사실은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다양한 대화를 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에 많은 호응을 해주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요즘 세상은 논쟁과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이런 다양한 토론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카페에서 칸트와

*칸트의 진선미 철학[서평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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