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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27. 2023

불안은 오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떠오른 상념

"서고에 책이 없네요, 검색대에서 검색했을 땐 있는데요"

"아... 네 아마 누가 책을 읽고 있거나 아니면 누가 다른 서고에 꽂아 놓았을 수도 있어요"


벌써 네 번째 방문, 검색대 화면에 책은 항상 [대출가능]으로 서고에 비치되어 있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책은 있어야 할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책은 이 넓은 도서관 어딘가에 묻혀서 누군가에 의해 다시 발견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존재하지만 찾을 수 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런 것들이 있다. 분명 있는 것 같은데 찾을 길이 없을 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을때. 그럴 땐 우리는 만나야 할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뭐 하지만 인연이 있다면 언젠간 만나게 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우연히 만난 인연들로 이렇게 나의 인생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그 책은 아직 나를 만날 시기가 아니었나 보다.




나는 도서관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먼저 도서관 서고를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이다. 책장 사이사이를 돌면서 수많은 책들이 내건 간판들을 스캔하며 지나간다. 마치 도심 빌딩 숲 양쪽 사이 들어찬 간판들 같기도 하다. 다만 번잡하거나 어지럽지 않다. 반대로 평온해진다.


얇게는 5mm부터 크게는 50mm가 넘는 두께의 책들이 육렬(층) 횡대로 쭉 세워져 있다. 이럴 땐 두꺼운 놈이 눈에 제일 잘 띄게 마련이다. 하지만 눈에 잘 띄는 녀석치고 잘 읽히는 녀석을 찾긴 여간해선 쉽지 않다. 특히 요즘 같이 활자 기피증(영상중독)이 만연한 세상에선 더욱 외면받는다. 간혹 그 두께에 놀라 잠시 손에 들어보고는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지만 다시 책장의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망부석이 되어간다. 언젠간 누군가에게 대출되어 떠날 날을 기다리며... 하지만 미니멀 라이프 시대에 벽돌을 들고 다니면서 읽을 사람이 있을는지. 만약 그런 책을 굳이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휴대성을 고려해서 전자책으로 보는 편이 법하다.

두께에 놀란 [인간 본성의 법칙]  코로나19 락다운 기간에... 읽었던... 대부분 들었다 (오디오북) 락다운이 아녔다면 읽었을까..

우연히 서고를 지나치다 손길이 가는 책들 중에서 인연의 책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건 마치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인연(그럼 헌팅인가?!)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우연한 인연이 새로운 곳으로 나를 인도하곤 한다. 내가 책을 선정할 때는 대부분은 어떤 계기가 있다. (물론 그 계기도 우연인 경우가 많지만 사람을 통해 혹은 장소를 통해서 연결되는 것이니 이렇게 길을 가다 마주치는 인연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도서관에 오면 이런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도서관에 입장하기 전에는 분명 오늘은 이 책을 읽어야지 하면서 가져온 책은 그냥 책가방 속에서 빛도 보지 못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연히 책장에서 나의 손길에 끌려 나온 녀석이 그날 나의 시선을 하루종일 잡아둔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놈까지 집으로 끌려온다. 그렇게 끌려온 놈들이 집안에 한가득 쌓여간다.

부산도서관

중독성 강한 놈들은 마지막 책장까지 나의 시선을 잡아두지만 그렇지 않은 놈들은 중간에 인연이 끊긴다. 책 욕심이 많은 나는 1/3 혹은 반쯤 읽다가도 잠시 일어나 서고 사이를 산책하듯 한 바퀴 돌다가 다시 또 다른 인연을 데리고 와서 자리에 앉곤 한다. (책도 결국 인간의 생각을 담은 것이니 인연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사람은 이게 쉽지 않지만 책은 이곳저곳을 수시로 왕래해도 질타를 받지 않아 좋다. 사람은 내 맘대로 고르고 데리고 다닐 수 없지만 책은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을 데리고 다녔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육체와는 분리된 카피된 정신만 휴대했지만.


책은 사람을 구속하지 않는다. 언제나 책장이 덮이면 다른 책장이 열리고 과거가 떠오르면 옛날 감명 깊게 읽어던 책장을 다시 열어보기도 한다. 그럼 그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신기하다.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으면 또 그 느낌이 다르다. 이건 옛날 좋아했던 인연을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느낌이랄까? 그때 느낌이 어렴풋이 남아있지만 또 다른 느낌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사람도 변하듯 책도 변한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책은 그대로지만(물론 일부 개정판이 혹은 표지가 바뀔 수도 있지만) 이건 나의 생각과 사고의 틀이 변화되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해외에서 전자책으로 읽었던 책들을 한국에 와서 도서관 서고에서 종이 책으로 다시 찾아 읽었다. 정말 다르다. 느낌도 다르고 의미도 다르다. 음... 엄밀히 따져 말하면 느낌과 의미가 더욱 확장되고 선명해졌다고나 할까. 당시 모호했던 것들은 이제 머릿속에 체계가 잡혀 색인되었다고나 할까? 그때 책 속에서 느껴지지 않던 다른 상념들도 밀려든다. 또한 질감(촉감)을 가진 책은 시각으로만 읽던 것보다 더 잘 읽힌다.

국회부산도서관

전문화?! 아니 편협화!?


우리는 대게 익숙한 것만 보며 살아간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보이는 것만 보인다. 풍요 속 빈곤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이건 AI와 알고리즘 시대를 맞이해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현상 중 하나이다. 온라인 세계는 이제 내가 봤던 것만 계속 보여준다. 완전히 다른 세상 혹은 기존에 접해 보지 못한 세계는 영영 보지 못하게 된다. 만약 자신의 일과 삶의 울타리까지 반복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세계를 영원히 이해하지 아니 알지도 못하고 살다가 자신이 익숙했던 것만이 진실이었음을 믿고 세상 다 살아 봤다며 눈을 감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 대부분이 그런 삶을 살다 갔다 갔고 시대가 발전했지만 여전히 그렇게 살다 간다. 과거에는 정보가 없어서 지금은 정보가 넘쳐도 접근 방법을 몰라서... (혹은 알고리즘에 의해 접근 차단 혹은 조종당해서...?! )


아마 우리가 온라인상에서 핸드폰의 안드로이드 계정 혹은 IOS 계정을 통해 보는 세상은 모두 기록되고 연산되며 나를 러닝학습해 더 많은 관련 정보와 심화 콘텐츠로 안내해 광고와 판매를 부추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 그들의 가장 큰 영업이익이 바로 광고 수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화되는 선호 콘텐츠에 의해 광고를 소비 혹은 광고 대시 직접 결재(프리미엄)로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오프라인에서 얻는 지식과 정보는 아직 그들이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물론 이것까지도 사실 좀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핸드폰이 도청이나 도촬까지 하고 있다면... 오프라인의 정보까지 입수하고 있을지도... 그럼 막을 방법이 없다) 하여튼 우리가 그들의 통제 밖에서 정보를 입수한고 접하는 방법은 이런 오프라인에서인 경우뿐 아닐까? 그것도 도서관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저서가 밀집한 곳에서 우리가 어떤 지식과 정보를 대면하고 그 대면으로 인해 나의 뇌가 받을 충격 혹은 반향을 안드로이드나 IOS는 알 수 없다.


나는 한국이 아닐 때는 주로 전자책을 읽는다. 미니멀 라이프를 살아야 하기에 책은 짐이 된다. 전자책도 물론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찾아 읽기도 하지만 월구독으로 좀 저렴하게 책을 읽으려다 보니 간혹 내가 읽고 싶은 책이 구독 서비스에 없는 경우가 많다.(특히 신간은 거의 없다) 그래서 선택권에 제한이 있다. 또한 플랫폼이 노출하고 오픈하는 책들만 볼 수 있기에 그 점이 아쉽다. 뭐 그런 책들이 아마도 온라인 서점에서 이윤이 가장 많이 남는 책일 것이다. 온라인 서점도 결국 수익 극대화 알고리즘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나를 발전과 성장을 위해 고안된 맞춤형 개인학습 알고리즘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온라인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누리려면 자본주의 원칙을 따라야만 한다.


그렇다고 구독에 구매까지 하면서 읽기에는 독서 시간이 풍족하지 못하다. 그나마 있는 책 중에서 관심이 끌리는 것들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다 정말 끌리는 책은 구매창을 클릭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많다.


전자책을 읽으며 찝찝한 점이 하나 있다면 내가 읽은 내역(개인정보)은 고스란히 그곳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나의 독서 패턴과 독서 성향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그것 또한 뇌과학이 한 층 더 발전하면 한 개인의 생각(뇌)을 완전히 분석해 꽤 뚫어 볼 수 있는 아주 고급 정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가까운 미래에... 갑자기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가 떠오른다. (아직까진 이런 개인 독서 성향 정보가 크게 돈벌이로 연결되진 않지만 언젠간 나의 뇌가 읽힐지도...)

뉴럴링크

과거로 돌아가는 소통 방식 (토론과 대화)


한국에 와서 한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중 하나를 꼽으라면 오프라인 독서 모임에 나갔던 일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각자 책을 읽고 느낀 점과 생각을 공유하는 모임이었다. 유사한 목적을 띈 모임과 단체에서만 만나던 사람들과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비슷한 목적이기에 공감은 있지만 이해는 부족했다. 다른 과 이유로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할 기회는 없다.


이 모임에 몇 번 참석하면서 이것이 어찌 보면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가장 인간다운 모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책 또한 다른 이의 생각을 읽는 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른 이와 소통하는 법을 연습하는 것. 그것도 메시지 창에 표정을 감춘 채 텍스트와 이모티콘이 아닌 육성으로 면전에서 하는 커뮤니케이션이야 말로 가장 인간다운 소통방법이 아닐까?  


사실 이건 내가 종교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 알게 된 사실이기도 하지만 과거 4대 성인들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공자가 행했던 배움(가르침)의 방식이기도 하다. 대면하여 묻고 답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좀 더 나은 생각으로 발전해 가는 방식, 이것이 과거 성인들의 방식이었다.


이건 정반합의 변증법적 토론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토론식의 대화는 한쪽이 한쪽에게 동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한쪽과 또 다른 한쪽이 만나 새로운 또 하나의 생각을 도출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과 반이 만나서 새로운 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만들었지만 또 라톤(절대주의)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상대주의)라는 또 다른 인물을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배웠음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는 완전히 다른 철학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처럼 배움이란 카피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해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 우리는 묻지도 않고 정답만 찾는 교육방식(테일러주의 교육방식) 오랜 시간 노출되어 한 명의 교사와 칠판만 바라보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입되는 교육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니 생각이 천편일률적이며 인생에도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살아왔다. 기계화 산업화에 맞는 소품종 대량 생산 방식의 시스템 속에서 모두 다른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규격화 정형화된 인간으로 생산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뭔가 영혼이 상처받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배운 데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삶(현실)과 영혼(이상)은 풀리지 않는 모순을 품에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알뜰신잡] 중에서


"똑같은 작품을 읽어도 감상이 천 개가 나와야 되고 천명이 읽으면 천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다"

                                                                                                         - 김영하 작가 -


다양해짐(엔트로피의 증가)은 우주와 자연의 법칙이지만 인간은 왜 그렇게 다양해짐을 두려워하고 걱정할까. 어떻게든 그 다양함을 통제 안에서 두려고 한다. 사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질서유지라는 명목으로 다양성을 통제할 수밖에 없다. 이건 좋게 얘기하면 문명화이고 체계화이며 나쁘게 얘기하면 통제와 구속이다.


하지만 우주의 법칙은 인간의 법칙 위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져보면 인간은 우주의 법칙 뒤를 쫓아가며 밑 빠진 독을 여기저기 계속 막으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건 시간이 갈수록 복잡 다양 해지는 법률과 제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와 국가는 이 모든 다양성을 통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의 증가 속도는 가속도의 법칙을 따른다. 다양함의 속도는 가속한다. 그러니까 다양성의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이다. 통제가 다양화를 앞설 순 없다. 그럼 다양화의 받아들이고 이 다양성이 어떻게 조화롭게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하느냐에 거기에 관심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다양성의 조화이다. 이민자들이 모인 곳 다른 종교 문화 언어 생각 모두가 다른 이가 모이면 사실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이것을 역으로 활용해서 서로를 인정하고 각각의 다양성이 화합을 이루면 이건 스스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이건 정책과 시스템의 변화보다는 인식의 변화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인식의 변화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말은 일관성 있는 인식 변화에 대한 정책을 10년 20년씩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해마다 그것도 모자라 사건 하나가 터질 때마다 바뀌어 버리는 정책과 시스템은 결코 큰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과거의 인연과 새로운 인연의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달여의 시간, 삶의 터전을 떠나 과거의 인연들과 또 다른 우연한 인연들을 만나면서 나에게 또 많은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들을 언젠간 글로 옮길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책 속의 상념들을 같이 공유하고 나눌 사람이 있다면 좋을 듯 하다.


오늘도 도서관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기웃거리며 이 사람 저 사람의 생각을 엿보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친 그 인연의 책은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할 운명인가 보다. 그 때 머리말 부분만 읽으며 빠져들어가던 그 책은 도서관 운영마감 시간 방송에 아쉽게도 책장을 덮었다. 다음날 다시 만나길 바랐지만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때 왜 그 책이 나의 눈에 그렇게 띄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밀려드는 감정 때문이었으리라.   


그 책의 이름은 "불안" [원제 : Status Anxiety , 알랭드 보통]이었다.


불안해서 찾았지만 결국 불안은 오지 않았다.


끝내 찾지못한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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