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지인과의 대화가 나에게 울림을 가져왔다. 대화가 즐거운 만남은 언제나 기대된다. 술잔을 기울이며 시작된 옛이야기는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5년이라는 시간이 바꿔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티에이징에 진심인 한국인은 속은 몰라도 겉은 방부처리가 잘 되어인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제 서로 살아가는 영역이 더 이상 겹치지 않는 것이라는 것만 빼고 말이다.
삶의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가 품은 생각을 거리낌 없이 터놓고 얘기할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예전에 나눴던 대화는 의지와 정열으로 가득찼다면 이젠 유연함과 냉철함이 더해졌다. 그때도 좋았고 지금도 그대로 좋았다. 그때는 이해관계에 엮여 있어서 하지 못했던 얘기까지 이젠 모두 추억이 되어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는 구세대(X세대와 그 이전 세대)와 신세대(MZ)가 사회에서 조직에서 상하의 위치에서 부딪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내가 사회초년생 때 배웠던 것들은 X세대(60~70년)가 우리에게 알려줬던 것들이었다. 그들에게 배운 것은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나의 생각이 있어도 재삼 고민하고 상황과 타이밍을 적절히 고려하며 말하고 나보다는 우선 조직과 공동체를 위한 것이 옳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을 따르는 것이 우리(개인)에게 사회지위적인 그리고 금전적인 보상을 가져오는 시스템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진리처럼 믿고 따랐다. 그렇게 일과 관계를 배워나갔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혜성이 등장했다. 내가 과장이 되고 조직의 중간 역할을 할 때쯤 새로 들어온 후임들은 내가 배우고 훈련했던 것들을 무너뜨리려 했다.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과거를 지우려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당시 사회는 이제 변화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이라는 말이 조직의 아래에서부터 터져 나왔고 새로운 정부도 거기에 부응하며 이제는 노동강성국이 아닌 노동선진국으로 가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를 가르쳤던 선임들은 이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새로 유입되는 신진 세력들과 직접적인 교류에서 멀어졌고 이제는 신진세력을 길들이는 그 역할을 내가 해야 했다. 나는 배운 데로 했고 그들은 가르치는 데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고 필요 없는 것은 무시했다. 필요한 것을 얻었으면 필요 없는 것도 수용해야 할 줄 알아야 하는 나의 기존의 가치관에 균열이 일어났다. 나의 눈에 그들은 이기적으로 보였다.
"야~ 이 새끼야! 너 할 일도 다 안 하고 어딜 가!"
결국 적잖은 세월 참고 견뎌온 나의 인내의 화산을 폭발시킨 것은 아래에서부터였다. 아무리 위에서 짓밟아도 다시 일어서고 견디며 견고한 내구성 자랑하던 나의 내공에 내상을 입힌 것은 예상치 못한 내부의 가장 낮은 존재였다. 옛날에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이 상황에 적절할까. 내가 세운 초가삼간이 다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런 과장님 같은 사람이 그리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요즘은 그런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냥 다들 감정 없는 로봇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과장님이랑 일했을 때가 저도 너무 기억에 남네요. 뭐 어찌 보면 힘들고 괴로운 시기였지만 그게 오랜 추억이 되어 또 이렇게 보게 되잖아요"
"그런가요?"
"그런데 이젠 바뀌어야죠, 우린 그게 부당하고 잘못된 걸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았잖아요"
그랬다. 나도 사회 초년생 때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름에 대한 기준이 없었다. 돈을 벌고 성공을 위해서는 나를 끌어주는 자를 신뢰하고 따라야 하며 조직이 나를 키우고 성장시키게 해 준다고만 생각했었다. 부가 쌓이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는 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장과 성공을 같은 뜻을 가진 다른 단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공한다고 반드시 성장하진 않는다. 성공과 성장은 완전히 다른 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우리가 낀세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도 이제 좀 누리고 살아야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배운 데로 가르치고 배운 데로 살 수 없는 세대인 거 같아요 하하"
"과거 예수도 그랬잖아요. 자신이 죽어야만 모든 것이 바뀐다는 것을... 그는 제자들이 자신이 살아 있으면 자신이 가르친데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죠"
"..."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죠. 신(新)과 구(舊)의 두 대륙을 연결시켜 주는 다리가 필요한 거죠. 두 대륙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지만 그걸 넘어가려면 밟고 갈 다리가 필요하잖아요. 예수가 구약과 신약의 연결점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예수의 탄생이 기원전(BC)과 기원후(AD)의 연결지점이네요. 하하 그럼 우리가 희생양인 건가요?"
"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희생과 헌신이 없으면 시기와 혐오가 계속되는 세상 아니겠어요?"
"이것도 자기 합리화 아니면 확증편향의 일종 아닌가 하하하?"
"하하하 그냥 자기 위로라고 해두죠"
다행히 그와 나는 기독교였다. 하지만 그는 천주교였고 나는 개신교였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과 예수의 말은 하나지만 인간이 만든 종교는 여러 갈래로 나눠져 이제는 서로 너무 멀어져 버렸다.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치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있었다. 혹시 종교가 세상을 나누고 분열시키는 것이 아닐까? 신앙은 하나로 향하는데 종교는 신앙을 여러 가지로 분리시키는 것은 아닐까.
"뉴스 봤어요? 그저께 이스라엘이랑 하마스(팔레스타인)가 전쟁 시작한 거"
조그마한 횟집에 걸린 TV에선 무자비한 폭격이 떨어지는 뉴스 화면을 눈에 들어왔다. 젖과 꿀이 흐른다던 가나안 땅은 피와 분노만이 가득한 지옥의 땅이 되어버렸다. 과거 예수가 복음을 전하며 걸어갔던 길은 또다시 불길에 휩싸이고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나에서 뿌리를 내린 인간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이유(명분)만을 찾고 있다. 그 때문에 수많은 인간들이 이유 없이 죽어 간다.
"과장님 회사 떠나고 과장님 얘기하는 사람들 많았어요"
"네? 정말요?"
"떠나고 사라지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잖아요, 어찌 보면 과장님은 우리에겐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일 수도 있었는데..."
"그렇죠 그게 저의 역할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요, 서로가 속한 조직에 이익을 위해 그것이 마음속에 거리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서로는 서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과 같았다. 서로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고 설득을 위해서는 합리적인 말과 글이 필요했다. 끊임없이 말하고 글과 숫자로 점철된 자료들을 끊임없이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해야 했다. 그와 나는 어찌 보면 항상 논쟁이 불가피한 협상 테이블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와 나는 토론을 통한 협상에 가까웠다. 서로는 서로의 합리적인 주장을 내세우고 그다음에 거기서 내어줄 수 있는 것들을 얘기했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그것이 우리의 협상 방식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이해(利害)관계였음에도 우호적일 수 있었다. 내가 만나왔던 대부분의 이해관계자들은 예의만 갖추었을 뿐 대부분 적대적인 관계였었다. 이해관계에서 협상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논쟁이 되느냐 토론이 되느냐는 서로가 어느 정도 양보할 마음을 가졌느냐 아니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이해관계에서 정해진 득실의 정답은 없다. 그냥 내가 많이 가져간 것 같은 혹은 내가 더 잃은 것 같은 느낌만 있을 뿐이다. 왜냐 그건 내가 정한 목표 혹은 조직이 정해준 목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목표는 계속 생기고 언젠가 더 이상 내가 더 많이 가져갈 수 없는 느낌을 가질 때가 온다. 왜냐 계속 더 가지려고만 했기 때문에... 내어주고 양보하는 것에 너무도 인색한 우리들은 결국 논쟁으로 서로를 기만하며 매일 전쟁터 같은 사회 속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차장님 하고는 협상이 끝나면 그 이후가 더 재밌어요"
그와 나는 협상이 끝나면 항상 식사를 나누며 개인적인 생각을 공유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는 서로의 얘기를 경청하며 서로의 세계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를 더욱 존중하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 같았다. 보통 수컷끼리는 만남의 시간이 길어지면 우열을 가리는 관계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그건 마치 동물의 세계와도 같았다. 상하의 위계질서 속에서만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자는 늙어갈수록 외롭다. 수평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기에 먼저 찾아갈 수도 누가 찾아오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러 버린다. 내가 그를 다시 찾은 것은 그런 대화가 그리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호주에서는 어떤 분들과 지내세요?"
"호주에서 있으면서 어린 친구들하고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하고 시간을 많이 보낸 거 같아요"
"하하하 거기서도 낀세대네요 아니 이제 연결세대라고 하죠, 그러고 보니 과장님 회사가 만들던 게 대부분 리테이너(Retainer)나 패스너(Fastener) 부품들 아녔나요?"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수만 가지 자동차 부품
자동차에는 수만 가지 부품이 있지만 그중에서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리테이너와 패스너 부품류들이다. 그것들은 자동차의 주요 부품들을 연결해 주고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부품이다. 리테이너 부품은 작고 눈에 띄지 않으며 비용도 적기에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한다. 엔진이나 배터리, 모터 같은 주요 부품들에 비해 소외되고 관심을 갖지 않는 부품이지만 사실 그것들이 없으면 자동차의 주요 부품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각자 다른 역할을 하는 주요 부품들이 한 곳에 묶어두며 전체가 붙어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어쩌면 리테이너 세대일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자화자찬일지도 모르지만 항상 자신의 처지와 세상을 비관하려기보다 어떻게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눈에 잘 띄지 않고 주목받진 않지만 사회 곳곳에는 이런 리테이너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들이 더욱 튼튼하고 강하게 그 자리를 지켜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분열되고 흩어지며 형체가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항상 엔진이나 모터 혹은 배터리 같은 주목받고 싶은 역할만을 기대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리테이너들이 곳곳에서 그것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것은 모른 체...
한국을 민주화를 이끌고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이끈 기성세대와 저성장의 불확실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 사이에 '낀세대'는 어쩌면 이 둘을 연결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리테이너'세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