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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Nov 25. 2023

벌거벗은 인간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은 주먹을 꽉 쥐고서는 웃지 못하는 법이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


당신은 주먹을 불끈 쥐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가? 한 번 도전해 보시길 바란다. 쉽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웃음은 진짜 웃음이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내가 이 [인간실격]을 읽게 된 계기는 독서모임에서 어느 한 분께서 이 책을 소개해 줬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의 책 소개보다는 이 책의 저자인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너무 인상 깊어서 나중에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그분이 했던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에 남아 있던 것이 작가의 연인과의 동반자살시도 하지만 여자만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것 그리고 이 소설을 마지막으로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가 계속 뇌리에 남았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흡입력 있는 그의 문장과 진정성 있는 내용이 나로 하여금 순식간에 읽어 내려가게 했다.  그리 길지 않은 중편 소설이라 한 자리에서 거의 다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읽다가 메모해 둔 것들을 다시 읽으며 그때의 감흥을 써보려 한다.

[인간실격]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 있었다. 내 앞에는 내가 주먹을 꽉 쥐게 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하지만 나의 입고리는 올라가 있었다. 화가 나지만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화가 드러나지 않게 화를 내보내야 한다. 미소와 분노라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 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다. 다행히 그와 나 사이에는 카운터 테이블이 막고 있어 나의 하반신은 그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꽉 움켜쥔 주먹을 통해 빠져나가는 분노가 내 안에 가득 차서 얼굴에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 자작 소설 중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물론 주먹을 움켜쥐는 것이 아닌 다른 행동들과 혹은 자신만의 습관으로 분노를 잠재우는 경우 말이다. 우리는 이성을 가진 동물로서 이 감정을 잘 통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하는 상대로 인하여 나 또한 이 통제가 무너지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나만 교양을 갖추고 이성적이라고 해서 이성적인 세상이 될 수 없다. 타자의 무례함은 나의 이성과 교양을 언제든 무너뜨리고 나 또한 그와 같은 무례함의 영역으로 넘어가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 소설 진짜 쓰레기예요. 개소리하는 작가예요, 지 생각 지맘대로 끄적인 글이 마치 명언인 거 같이 만들어져서는]


단톡방에 책에서 감명 깊게 읽은 한 줄을 올렸더니 누군가가 이런 답글을 달았다. 그도 책을 읽은 듯한데 같은 책을 읽어도 이렇게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한 말이 틀리지 않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다 보면 우리 정서와 너무 맞지 않은 그리고 너무도 비인간적인 듯한 묘사와 서사들 섞인 내용이 거부감이 든다. 아마 톡방의 저분은 참 정의롭고 한치의 거짓 없이 사는 분일 거라 믿고 싶다.


"죄의 반대말은 대체 무엇일까?...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하지 않는 것,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 죄와 벌을 앤터(반대말)로 생각한 도스토옙스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


[인간실격]이 일본에서 왜 그렇게 위대한 소설로 회자되는지는 이 소설에 겉으로 드러난 내용과 표면적인 것 때문이 아니다. 이건 한 인간의 처절한 회개록(고백록)과도 같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을 쓰고 자살했다. 아마 그는 견디기 힘든 죄책감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 실격당한 자신을 자신 스스로 정죄(定罪)하고 죽음으로 집어넣었다. 죄와 벌을 모두를 스스로 행한 것이다. 보통 죄는 내가 지어도 벌은 항상 타인에 의해서 받게 되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죄인은 판사에게 벌을 받는다. 인간이 인간을 벌한다. 하지만 죄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신이 죗값을 스스로 치르는 것이다. 그것도 가장 큰 죗값인 사형을 말이다.


[인간실격]은 자전적 소설이지만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고백록에 가깝다. 그가 왜 이런 방식으로 소설을 썼을까 생각해 봤다. 아마 그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제3의 인물인 '오바 요조'(주인공)를 등장시켜 그에게 자신을 완전하게 투영시키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관조하는 태도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 것이다. 물론 소설의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소설을 쓰고 난 후 자살을 했다는 사실과 소설의 도입부에서의 문장으로 미루어 그는 소설을 통해 자신의 인생 고백록을 쓴 것이라는 추측이 중론이다.


"恥の多い生涯を送ってきました。

自分には、人間の生活というものが、見当つかないのです."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


마치 고해성사를 시작하려는 듯한 뉘앙스의 소설의 시작은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삶을 반성이라도 하려는 듯한 인상이 들지 않는가? 이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계속 회자되고 또 극찬받는 것은 우리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삶 속에서 항상 거짓과 가식과 위선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는 항상 참되고 진실되며 선한 것처럼 보이려 노력한다. 이건 타인과 자신을 모두 기만하며 살아가는 것과도 같다. 자신이 욕망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이가 많지 않다. 왜냐 그러면 사회와 이웃들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복음 8:7] -


예수도 과거 음행을 저지른 여성 앞에서 서서 그녀의 대변인이 되어 만인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임에도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타인을 정죄하는 것에만 혈안 되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외람되지만 단톡방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쓰레기로 비난하신 그분은 완전히 정결하신 분일까 의심된다. 왜 우리가 그의 소설을 극찬하는지는 우리가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해냈기 때문이 아닐까?


글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지만 자신 스스로에게 가장 의미 있는 글은 바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이다. 회개하는 글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장편의 이야기로 쓰면서 가슴 아파하며 또 눈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바로 자신의 죄를 바로 보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기를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 비밀스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는 자신만 보는 글이기에 정제되지 않고 두서도 없으며 온갖 복잡한 감정들을 지저분하게 쏟아낸 글일 수도 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부끄럽고 창피하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자신의 일대기를 만인에게 드러내었다. 물론 그는 전업 작가이기에 그나마 정제되어 소설로 만들어진 것뿐이다. 작가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글로 정제하며 깊이 들여다보는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만들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바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떠난 것이다.

Jesus Christ

과거 예수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만인이 보는 가운데 죄 없이 벌을 받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어갔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모든 이가 그들의 죄를 바로 보길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만이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예수는 죽어야만 영원히 그들 속에 살아 숨 쉬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땅에 수많은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가 성경을 잘못 읽고 있음이라 그렇지 않다면 상식도 지혜도 없으리니..."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


다자이 오사무는 성경을 읽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여러 번 읽은 것 같다. 소설 곳곳에서 언급되는 성경 구절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설 속 이 문장이 많은 상념을 일으켰다. 사실 모두가 성경 속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이 땅에 다른 상식과 지혜가 굳이 필요가 있을까?(물론 성경 속의 표현이 시대가 오래되어 이해와 공감을 위한 표현법의 변화가 필요하긴 하지만) 왜냐 상식과 지혜가 필요한 이유를 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상식과 지혜는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 상식과 지혜가 이미 몇 천년 전에 다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또 수많은 상식과 지혜를 필요에 의해 만들어내고 있다. 그 필요가 과연 필요인지 과분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은 상식과 지혜는 자칫 본질을 헷갈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이 가장 상식적이고 지혜롭다는 사실을 세월이 한 참 흐른 뒤에야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나도 호주에 온 이후 삶이 단순해지면서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이런 단순한 삶이 원망스럽고 괴로웠지만 지금은 이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 이처럼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없었을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나는 서로를 속이면서도 깔끔하고 밝고 뒤끝 없이 살고 있는, 또는 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한 인간을 이해하기 어려울 따름입니다. 인간은 끝내 내게 그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에서 -


나는 가끔 생각한다. 신(하나의)이 있다면 그가 생각하는 하나의 진리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가 생각하는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을 딱 하나 얘기하라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순이다.


변치 않는 진리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신이 이 세상을 모순 속에 가둬놓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진실되게 살아라고 하지만 절대로 진실되게만 살 수 없는 곳이 인간 세상 아니던가? 신의 입을 빌려 인간이 말하는 진리가 인간이 서로를 기만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이 이렇게 모순적일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모순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 실격]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을 모두 드러내고 결국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왜냐 우리는 절대 벌거벗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체 벌거벗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벌거벗은 모습으로 세상에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완전히 진실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남들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을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는 '인간실격'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어느 누가 감히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벌거벗을 수 있겠는가?


[인간 실격] with 도넛&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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