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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Dec 30. 2023

완전함이란...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부제 :비범과 범속 사이)

"비기독교인에게 완전한 인간이란 자신의 모습대로의 완전함을 갖춘 인간이고, 기독교인에게는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완전함을 갖춘 인간이다. 불교도에게 완전한 인간이란 더 이상 인간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의 완전함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이 구절이 이해 가는가? 인간에게 있어 완전함이란 무엇일까? 궁극적인(우주적) 완전함과 인류적인(범속적) 완전함이란 다른 개념이다. 그 가운데 이상한 완전함이 하나 더 존재한다. 그건 기독교가 말하는 완전함이다. 이 세 가지 완전함이 공존한다.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는 당신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달렸다.

 



페르난도 페소아(1988~1935), 신기한 인물을 만났다. 은둔 글쟁이라고 표현하면 맞을까? 지독한 글쟁이였지만 그가 그런 글쟁이였다는 사실은 그가 죽고 한참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글로 세상과 우주 그리고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아와 소통하는 인물이었다. 나중에 포르투갈의 지폐에도 새겨질 정도로 국민 작가를 넘어서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알리기 시작한다. 항상 그렇지만 위대한 자는 항상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나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 잡는다.


그는 현실에서 평범한 보조회계원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이상의 삶은 이미 우주의 또 다른 저편 안드로메다까지 갔다 온 듯하다. 그의 글은 마치 시와 같으면서 철학서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다. 글이 오묘하다. 그래서 더욱 빠져든다. 넓고 깊은 생각의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연말연시 그의 책을 붙잡고 사색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밀려드는 영감들이 수많은 글감들을 떠올린다. 그러다 잠시 읽는 즐거움을 뒤로하고 그 영감을 붙잡아 보기로 한다. 단언컨대 내 인생 또 하나의 운명의 책을 만난 듯하다.


그 첫 번째 글감은 서두의 구절로 시작한다.



 

만약 당신이 서두의 문장을 읽고 뒤통수를 치는 듯한 깨달음이나 충격을 받았다면 당신은 이미 세상을 아주 넓고 또한 깊이 있게 바라보는 사람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페소아는 인간에게 있어 완전함이라는 것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가 구분한 기준을 나의 생각으로 풀어보려 한다.


범속한 완전함 (성공을 향하는 삶)


이 완전함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완전함이다. 이건 인간 세상의 기준으로 만든 완전함이다. 국가와 사회가 만든 시스템(사상, 이념, 문화등) 안에서 추구하는 완전함이다.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끝이 없는 완전함을 향해가는 것이다. 이제는 이것이 누구나 그 끝(종착점)이 없음을 알지만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왜냐 가장 앞서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종착지가 없으니 항상 선두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세상의 발전과 변화를 이끄는 선도자라고 부르곤 한다. 선도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끝없는 부를 통해 명예를 갖는 것이고 또 하나는 끝없는 권력을 통해 명예를 갖는 것이다. 전자의 예를 들자면 빌게이츠나 일론머스크, 스티브 잡스같이 부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들일 것이고 후자의 예를 들자면 시진핑, 전두환, 히틀러 등의 절대 권력을 거머쥐었던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우상이다. 후자의 인물들은 아니지 않나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다. 당신이 권력의 맛을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장 옳은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부와 권력은 세상의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왜냐 우리 모두가 이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차는 이 인간의 욕망이라는 연료를 태우며 달려간다. 인류의 눈부신 발전은 이 욕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끝이 없는 완전함을 향한 욕망이 지금의 우리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욕망을 무시하면 안 된다.  만약 이 욕망을 무시하게 되면 당신의 현실의 삶도 무시당하게 된다. 비록 정신이 천국을 떠돌지라도... 우리는 그런 자를 일컬어 '미친놈'이라고 부르곤 한다. 웃긴 건 우리는 미친놈을 바라보며 비웃지만 미친놈은 또 우릴 보고 웃는다.  그자의 눈에는 우리가 웃긴가 보다.


비범한 완전함 (소명을 따르는 삶)


페소아가 두 번째의 완전한 인간을 왜 기독교에서 찾았을까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들이다. 세상을 창조한 유일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시작되는 이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큰 메시지가 하나 있다. 그건 우리 모두는 신의 창조물이고 신은 우리에게 인간 세상이 추구하는 완전함이 아닌 신이 주신 완전함을 따라가라는 각자의 소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세계 즉 인간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 우리는 현실 세계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이 욕망의 시스템을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벗어나는 것은 현실(속세)을 떠나는 것이고 현실과 괴리된 삶을 사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을 서로 격리시키는 것이다.


신이 주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욕망의 길과는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소명이 인간 세상의 욕망의 길과 어느 정도 겹치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소명을 따르다 보니 덩달아 욕망이 채워지더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비범한 완전함을 추구하는 자는 덩달아 따라오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부산물일 뿐이지 그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관심이 욕망으로 옮겨가지 않는다. 이게 쉽지 않다. 그래서 소명을 찾고 가지는 것보다 지키고 지속하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비범한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왜냐 일단 우리는 인간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소명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만약 신이 주신 소명이 인간 세상의 시스템과 괴리가 큰 것을 주어졌다면 이건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런 소명은 특정한 계기나 환경 혹은 관계를 통해서 알아가게 된다. 세속적 성공을 위해 욕망을 따라 살다가 어느 날 다른 환경 혹은 누군가를 통해 아니면 믿지 못할 상황들을 겪는 경우 말이다. 삶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 겪는 것이다.


삶이 방향이 전환되는 일은 참으로 괴롭고 힘든 일이다. 왜냐 이런 일이 보통 세월이 좀 지나고 세상을 좀 살아가다 보면 생기기 때문이다. 이제 좀 안정을 가지고 싶을 때쯤 이게 또다시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과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학창 시절 그리고 이제 갓 세상(사회)으로 나온 자들이 이것을 깨닫기란 쉽지 않다. 물론 일치감치 자신의 소명을 깨닫는 자도 있으리라.


왜냐 그들이 배우고 만나고 경험하고 머무는 곳이 비슷하고 또한 그 환경은 인간세상의 시스템(교육, 사회화)에 맞춰져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델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찍 알게 된 자들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부모(모태 신앙)를 통해 훈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건 다행일지 불행일지는 미지수다. 왜냐 스스로가 깨달은 것이 아닌 사회와 국가가 교육시키고 훈련시킨 것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배움과 깨달음은 다른 것이다. 비범한 완전함은 깨달음 뒤에 수행이 오는 것이지 수행 뒤에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다. 뭐 더 큰 깨달음이 올 순 있겠다. 범속한 완전함(훈련을 통해 성공을)과는 반대이다. 앞뒤가 바뀌었다.


어쨌든 이 비범한 완전함(소명)을 따르는 것은 그 행위 안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범속한 완전함이 행위의 결과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과 다르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행복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현실(범속)을 살아야 하기에 현실의 초라함과 고통을 견뎌야 하는 큰 약점을 지녔다. 그래서 계속 시험에 들게 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마태복음] 6:13 -


교회에서 주구장창 외워대는 이 구절은 이 때문일 것이다.


완전함 = 무 (보이지 않음)


페소아가 말하는 마지막 완전함은 설명하기가 참 쉽지 않다. 그가 이 완전함을 불교에서 찾은 것은 불교가 무(無)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교 하면 떠오르는 단어인 '무소유', '무아', '무위'인 것은 불교가 사라지고 없어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건 인간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얼마 전에도 드라마를 보다가 받은 영감으로 이에 관한 글[태어나지 않으려면]을 쓴 적이 있다. 인간 자체가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자연주의이다. 도교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물리학자에게 있어서 생명이 있음과 없음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얼마 전 읽었던 김상욱 교수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에서 그가 말했던 구절이 떠오른다. 물리학에서는 생명(생물)과 무생명(무생물)을 구분해서 설명할 수 없다. 생명을 가진 것이나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나 모두 원자로 구성된 분자조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은 세상의 가장 기초단위인 원자로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하지만 생명의 있고 없음은 설명이 불가하다. 그래서 과학으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그래서 신과 종교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물리학자에게 생명이란 원자의 가장 불완전한 조합 상태이다. 생명을 가진 생물(동식물)은 그 원자들을 꾸역꾸역 억지로 붙들어 놓은 상태라는 것이다. 불완전한 상태인 것이다. 원자는 자유롭게 돌아다녀야(순환) 하지만 생명은 그것을 붙잡아 두고 있다. 그래서 생명은 죽음으로 향한다. 왜냐 죽음이 더 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원자가 자유로워지는 상태이다. 물리학자가 생각할 수 있는 영생은 아마도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원자가 떠돌며 어디든 가서 움직이고 있는 상태가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은 원자가 모인 상태에서 의식과 사고가 생겨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와 철학으로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


어쨌든 페소아가 본 세 번째 완전함은 없어짐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인간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는 자연과 함께 순환하지만 유일하게 자연의 순환에 역행하는 존재인 인간이 없어져야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가 된다고 본 것이다.


비범과 범속 사이


인류의 발전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자극하는 산업자본주의와 정신적 욕망을 자극하는 자유민주주의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구촌에서 가장 잘 나가는 그리고 잘 사는 나라는 대부분 이 원칙을 철저히 따르며 발전했다.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이용한 나라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그 이면을 드려다 보면 그 나라들이 지구를 가장 많이 파괴했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가치관은 인류의 발전과는 반대된다. 왜 기독교 국가가 세계를 주도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가.


인류의 발전 방향은 페소아가 말한 세 번째 완전함과 완전히 반대된다. 그럼 그 차선책은 두 번째 완전함이다. 발전하고 파괴되더라도 통제가 가능하고 막장으로 가지 않는 치유회복이 가능한 상태이다. 그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면서 파괴의 속도를 지연하는 것, 그게 두 번째 완전함(비범한)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범속한 완전함을 추구하지만 그 속에서도 비범한 완전함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상태, 범속함 속에 머물며 비범함을 추구하는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범함을 지향하면서도 범속(세속)적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며 범속함을 회개하며 범속함에 머무른다.


왜냐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in Library

오디오 영상 - 릴스

https://www.instagram.com/reel/C1kltuaSqPg/?igsh=cDhqNG5xcGk4cW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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