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로 글을 시작해 보려 한다. 시를 읽으며 잠시 아이로 돌아가 보길 바란다. 초콜릿의 맛을 음미하되 지금이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아주 어린 시절 먹던 초콜릿의 맛을 떠올리며 읽어야 한다. 왜냐 다 큰 어른은 초콜릿의 브랜드와 칼로리 양과 온갖 잡다한 생각들과 함께 맛을 정의하고 분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뭔가 자신이 뭔가 되는 것처럼 초콜릿의 맛을 정의한다. 아이는 그냥 초콜릿을 통해 전해지는 맛으로 기분 좋아지는 자신의 존재를 느낄 뿐이다.
알바루 드 캄푸스, 페르난두 페소아의 또 다른 이명(異名)이다. 그의 입을 빌려 형이상학을 얘기한다. 초콜릿을 먹는 것과 형이상학이 무슨 관련이 있는가?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존재의 근원을 연구하는 것과 초콜릿을 음미하는 것과의 상관관계를 찾아야만 이 시가 의미 깊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페소아는 철학과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 시에는 형이상학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철학과 종교(신앙)를 통해 존재의 이유 그리고 나와 무궁한 존재(철학 = 우주, 종교 =신)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끝없는 사색과 생각 혹은 기도와 찬양 같은 행위들로 우리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그 안에서 그 이유를 찾아간다. 그런데 무언가 찾았다 싶으면 또 다른 것들이 생겨나고 또 그것을 알고 나면 또 다른 것이 생겨나는 끝없는 의문과 생각의 도돌이표 같은 노래(음악)를 반복한다. 그 반복되는 음률에 심취해서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아이들은 보면 어떤가? 어린아이들은 초콜릿을 음미하는 순간 초콜릿의 포장지에 쓰인 칼로리 함량과 브랜드를 들여다보며 또 다른 정보를 입력해 그 정보를 통한 또 다른 생각과 의문들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냥 그 맛의 느낌과 존재에 빠져든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사물의 존재 그리고 자신과 사물의 상호작용을 온전히 느낀다. 내가 존재함을 사물(타자)을 통해서 경험하고 느낀다. 경험에서 존재의 근원을 안다. 아니 안다기보다 그냥 느낀다. 감화된다.
"피터팬 증후군"이라는 병!? or 꿈?!
한 번쯤은 들어본 말일 것이다. 이건 질병인가? 아니면 축복인가? 이 증후군은 사실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왜냐 이 용어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몸이 되었음에도 사회적 활동과 역할과 책임, 즉 취업과 결혼과 출산과 양육 같은 사회적인 성인의 행동양식을 회피하는 자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동의하는가?
피터팬 증후군
자! 그럼 어린아이의 특징을 살펴보자. 난 어린 시절 동생과 이명 놀이를 자주 즐겼다. 당시 '코코블록'이라는 지금의 레고의 레트로 버전의 블록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 나는 아빠를 여동생은 엄마를 연기하며 블록으로 집도 짓고 차도 타고 가며 나는 아빠를 투영하고 동생은 엄마를 투영해 말을 하고 행동하는 놀이를 즐겼다. 이것이 바로 이명 놀이이다. 나는 이 놀이에 자주 빠져들곤 했는데, 때론 동물 모양의 '코코블록'을 손에 쥐면 그 동물의 소리와 동작을 흉내 내며 말을 했고 손에 들려지는 사물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흉내 내는 것을 꽤나 즐겼다.
그것을 다 큰 성인이 된 후 어린아이들에게 해주면서 아이들이 이걸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런데 어른이 다른 존재(아이들이 좋아하는)에 투영해 아이들에게 말을 하면 상황이 바뀐다. 유치원 교사나 아동심리학을 공부하는 자들을 잘 알 것이다. 아니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라면 모두 아시리라. 아직도 모르겠고 이해가 안 된다면 그 엄마는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어른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소꿉 놀이 = 이명 놀이
아이들의 세계는 이명 놀이의 세계와도 같다. 그들은 만화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한다. 그래서 겨울 왕국의 엘사도 되고 뽀로로도 된다. 그럼 나는 엘사의 올라프(눈사람)가 되고 뽀로로의 친구 루피가 되어서 말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 어설프게 하면 아이들은 어느새 실증을 느낀다. 리얼할수록 아이들은 깊이 빠져든다. 현실에 있지만 나와 아이만의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진다. 온전히 그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건 어린아이들 뿐이다. 시공간을 잊어버린다. 어른들이 항상 시간에 쫓기고 자신이 처해 있는 공간(장소)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이런 역할극에서 멀어져 간다. 왜냐 하나의 자아 정체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자아가 강화되고 굳혀지는 과정이다. 이건 다른 의미로 색깔을 가지고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우리가 말하는 사회화이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탈피할 수 없는 딱딱한 표피를 입은 성체 갑각류가 되어버린다. 이제 더 이상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변신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고 변화에 부정적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세계와 타자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한다.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지도 그렇다고 다른 영역이 자신의 영역으로 넘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자신이 만든 껍질 안에 갇혀 버렸다. 이제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
이명(異名) 놀이 = 역할극
페소아가 자신을 감추고 이명의 인물들로 글을 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이 아직 아이를 졸업하지 못한 피터팬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것을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쓴 글들을 그가 살아생전 자신의 실명으로 오픈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글은 그가 죽고 나서 발견되었고 그 수많은 원고들은 아직도 정리되고 있고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글을 읽으며 감명받지만 그런 인물이 실제로 주변에 있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상하게 바라본다. 모순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모순적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페소아는 이명 놀이의 대가로 불린다. 그가 만든 이명의 인물은 75명이 넘는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각기 그들만의 직업, 성격, 문체, 서명 심지어 출생연월과 사망일자까지 완벽한 현실 속 인물로 만들어져 있다. 실물만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존재를 만들었다. 이건 마치 요즘 영화를 제작하기 전 스토리 전개에는 굳이 필요 없어 보이는 각 인물들의 배경과 모든 설정을 만들어놓는 것과도 같다. (실제로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제작에 들어가기 전 영화 속 모든 인물의 성장배경부터 일대기까지 설정한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현실에 가져다 놓아도 아무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디테일한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페소아는 100년 전에 이미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완벽한 시나리오 작가였던 것이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리얼리티 작가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명의 인물들이 페소아였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가명(假名) 놀이 = 사기극
나는 '글짓는 목수'라는 필명을 쓰지만 이건 이명이라고 보긴 어렵다. 왜냐 아직 필명에 완전히 다른 색깔을 부여해 나와 분리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어찌 보면 가명에 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어른들이 가명을 쓴다. 목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실명을 숨기고 가명으로 자신의 원하는 무언가를 취하려 한다. 하지만 실명과 가명은 동일한 존재이다. 그냥 존재를 가리고 숨기는 행위인 것이다. 이건 또한 기만전술이다. 손자병법에서 추천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처세술 중 하나이다. 완벽한 기만은 나도 속을 만큼의 치밀함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기만전술의 달인은 요즘으로 치면 리플리 증후군(허언증)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SNS에는 이런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과거 봤던 영화 [거짓말 2015]가 떠오른다. 외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인물(사람들의 부러움과 인기를 사는)을 설정하고 자신을 거기에 투영해 현실에서 그 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현실의 삶을 환상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현실과 환상을 분리하지 못하는 것은 병이 된다.
리플리 증후군을 다룬 영화 [거짓말 The Liar, 2015] 중에서
반면 페소아는 이명을 자신과 완전히 분리한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명과 가명 사이의 그 어떤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내 생각에 나와 이명(필명)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마도 이 둘이 분리되고 있는 과정인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페소아의 글이 너무도 공감되고 깊이 와닿는다. 나 또한 현실의 내가 아닌 다른 세계를 만드는 글을 쓰는 존재로서 이명(필명)에 다른 생명을 불어넣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명(필명)이 만들어 내는 글 속의 인물들 또한 또 다른 이명의 존재가 되길 희망한다.
내가 소설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 즐기던 역할극의 연장선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또한 내가 나와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처럼 연약함을 드러내어 타자도 자신의 연약함을 드려다 보게 하려 함이다. 어린아이들처럼 허물없이 어울리는 세계 속을 경험하고 싶은 피터팬과 같은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결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이다. 왜냐 나는 한참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연약함은 언제 어디서나 공격의 대상 된다. 그런 약점을 노리는 사냥개들이 득실 한 세상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항상 강해지고 빈틈없어지려고 그렇게도 열심히 노력하며 산다. 그러다가 육체와 정신의 노화가 심해지고 이제는 아무리 강해지려 해도 약해지기만 하는 어느 순간이 되면 그런 자신을 슬퍼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이젠 어린아이로 돌아갈 시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슬프고 괴롭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죽음 앞에서 삶을 후회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