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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Jan 05. 2024

두 가지 진리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 세 번째 - (부제 :삶과 예술 사이)

"삶에 비하면 모든 문학과 예술적 창안들은 파리하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파리하다'?! 생소한 단어이다. 그 뜻을 찾아보니 "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 [네이버 국어사전]이다. 원서(포르투갈어)에서는 어떤 단어를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나라면 아마도 '(표면적으로) 궁핍하다'라는 쉽고 간단한 단어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번역가의 고민의 흔적이 느껴진다. 


[불안의 서]의 번역가(배수아)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원서는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색채가 달라진다. 그래서 원작자의 글과 번역자의 글은 본질은 같지만 형태는 달라짐을 어찌할 수 없다. 문제는 번역의 실패는 원작의 본질까지 변질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번역이 중요하다. 과거에는 이 번역이 부실해 많은 원서들이 오역되고 또 잘못 이해되어 전파된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은 번역의 수준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물론 이것은 번역가의 경력과 문화언어적 소질에 의해 결정된다.


배수아(1965~),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과거 적지 않은 소설을 썼고 또 적지 않은 원서들을 번역했다. [불안의 서]가 잘 읽히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찰지고 감성적인 소설가적 소양과 해외를 드나들며 익힌 외국문화와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 때문이리라. 번역의 기본은 그 원서 언어의 문화적 이해가 기본이 되어야 하고 또한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표현에 능숙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을 다루는 자가 번역가라면 그보다도 좋은 경우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덕분에 어려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술술 잘 읽힌다. 물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지만 그녀의 적절한 어휘력과 문장력이 페소아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번역가와 작가의 궁합이 중요하다. 특히 마이너 언어권에 있는 작가에게는 어떤 번역가를 만나느냐는 원석이 보석이 될 수 있느냐를 좌우한다. 해외에서...


"작가의 뇌를 들고 다니기 어렵지 않지만, 그 뇌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모국어로 짜여 있다. 작가는 모국어에 묶인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


이 말에 나는 크게 공감한다. 나는 호주에 머물고 있으면서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책을 원서로 찾아서 읽어본 적이 있다. 독서가 마치 토익 시험의 Reading Comprehension (읽기 이해)의 시험 시간이 되어 버렸다. 독서가 고통이 되어버렸다. 독서는 취미이고 즐거움이 되어야 하는데 원서는 시험에 들게 만든다. 마이너 언어권에 사는 작가들은 평생 이런 고충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럼 그 나라 언어를 공부하면 되지 않느냐"


맞다, 정답이다. 정답임을 알지만 그게 쉽지 않은 것이 또한 작가의 숙명이다. 작가는 잠시도 모국어를 떠나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또 발전한다. 작가는 그 언어(모국어)의 문화권에서 그 변화와 발전에 발맞춰 가야 한다. 작가가 모국의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모국의 문화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작가로서의 생명을 잃어가는 것과 같다. 작가가 현실을 완전히 벗어나면 독자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는 현실에 몸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독자의 괴리가 생겨난다.


가끔씩 내가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났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럼 아마도 나의 글은 좀 더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고 공감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은 자유지만 현실은 항상 구속 아니던가 구속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럼 모국어 안에서 찾은 자유에 만족하면 된다. 뭐 나도 언젠가 나의 글을 잘 이해하고 번역해 줄 인연을 만날지도 모를 일 아닌가.


모국어라는 감옥


그래서 작가는 모국어라는 감옥에 갇혀 산다. 모국어라는 소프트웨어를 버릴 수가 없다. 모국어를 버린다는 건 이건 마치 구글 크롬(Chrome)을 쓰다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빙(Bing)으로 검색엔진을 바꾸는 것과 같다. 아니 MS Window를 쓰다가 Apple의 macOS로 전환한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물론 뭐가 좋다고 우열을 가리긴 어렵지만 바꾸면 쓰기가 아주 힘들고 불편하다.


우리는 기존에 쓰던 소프트웨어의 유저 인터페이스(사용자 이용화면?)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 기성 세대가 윈도(MS Window)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아니던가. 물론 둘 다를 병행해서 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국어가 더 익숙하고 편하고 친근함은 어쩔 수 없다. 바꾼다면 언어적 문화적 베이스의 용양과 질이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작가의 본연의 역량이 모국어를 쓸 때보다 현저히 떨어짐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중 소설이나 칼럼이 동화책이나 낙서장처럼 되어버리는 경험을 할지도... 그럼 메이저 언어권의 하급 수준의 글이 될 뿐이다. 뱀의 머리냐 용의 꼬리냐? 음... 그래도 뱀의 머리가 낫지 않은가... 나는 그렇다.


나는 호주에 머물며 이런 언어적 고민과 항상 함께 해왔다. 작가가 읽기와 쓰기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삶을 살아내려면 육체가 머물고 있는 언어 환경과 문화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항상 모순 속에 사는 듯하다. 그러면서 모순을 벗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냥 스스로 정의했다. 작가는 모순을 견디는 직업이라고.


나는 외국어 능력을 향상 시키는 방법을 안다. 나는 과거 중국어를 전공했기에 외국어 능력 향상에 대한 나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과거 그렇게 중국어 실력을 향상시켰기에 중국인들과 대화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중국어를 할 때면 다들 놀라곤 한다. 이젠 그런 상황들이 익숙하다. 나는 스스로도 모국어와 외국어를 쓸 때 서로 다른 자아를 만난다. 그게 내가 공부해 왔던 방식이다. 소프트웨어가 바뀐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나의 말투나 행동(제스처)이 바뀌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와 언어의 색깔에 맞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을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이다. 입만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제스처가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건 어린 아이가 처음 어머니에게서 모국어를 배울 때와 같다. 부모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듯이.


만약 나에게 그렇게 영어를 다시 공부하면 되지 않냐고 묻는다면... 고민이 된다. 왜냐 내가 중국어를 공부하던 시기는 모국어를 떠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한국(모국)과 관련된 것들을 모두 차단하며 살았다. 나 자신을 철저하게 중국인의 환경과 관점에서 체험하고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몇 년간을 살았다. 그리고 그때 익숙해진 차이니즈 소프트웨어는 이제 나의 뇌에 고착되어 자리 잡았다. 쓰지 않으면 어눌해지긴 하지만 또 쓰는 환경에 처하면 점점 가동 속도를 올리며 뇌 속 중국어 언어신경들이 재연결 되는 것을 느낀다.


"모국어의 바다를 떠나면 이런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고 언어의 신선도에 덜 민감해진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


작가의 꿈을 향해가는 나에게 또 다른 외국어의 도전은 아주 어려운 결정이고 또한 큰 방향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할 수는 있지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더 의미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다. 모국어에 능한 것이 외국어의 공부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이건 또한 모국어와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글을 읽고 쓰는 것에서 떠나 있으면 글쓰는 방법을 잊어갈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댓가로 영어가 익숙해질 것이다. 그럼 언어학자가 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작가에선 멀어진다. 그래서 작가는 모국어를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이다. 


페소아 그 또한 언어감각이 남달랐던 인물이다. 그는 남아공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여러 영문학을 접하고 프랑스어도 배웠으며 외국어에 남다른 이해와 두각을 보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고국(포르투갈)으로 돌아와 인생의 마지막 30년을 리스본에 머물며 모국어와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그는 포르투갈 최고의 시인이자 작가로 수 많은 글과 이름(이명)들을 남기고 떠났다.


"두 개의 진리는 서로가 서로를 배척한다. 현명한 자는 이 두 가지를 서로 통합하려는 희망을 포기하고, 둘 중 어느 하나를 배척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둘 중 하나를 따르며 자신이 따르지 않는 진리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여기서 말하는 두 가지 진리가 바로 삶과 예술(문학)이다. 나 또한 이 둘 사이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듯하다. 삶을 무시할 수도 예술(문학)을 무시할 수도 없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현실의 삶 속에서 채워지지 않은 다른 것들의 기회비용이다. 글을 쓰는 동안 행복하고 글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환희를 느끼지만 현실의 삶으로 돌아오면 그 시간 채워지지 못한 현실의 것들이 못내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조금 더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좀 더 진리에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난 언어란 진리를 찾아가는 도구이지 진리 자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진리인지는 당신이 어디에 더 집중 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삶(현실)과 예술(문학) 사이에서...


불안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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