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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08. 2023

다시 태어나지 않으려면...

[클래식 클라우드 - 니체] 이진우 (부제: 빛과 그림자)

"복개천 위에 지은 거라 재개발도 못하고, 그냥 이대로 있다가 수명이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애. 나도 터를 잘못 잡았어, 지구에 태어나는 게 아닌데."

"그래서? 어디에 태어나고 싶은데요?"

"안 태어날 거다 새꺄!"

(모두 웃으며 따라간다)


                         - [나의 아저씨] 중에서 -

[나의 아저씨] 보다가

요즘 한가한 시간이 이어지며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주옥같은 대사들과 배우들의 명품 연기 그리고 잔잔하면서도 울림과 떨림이 있는 스토리가 나에게 많은 상념을 던져 준다.


극 중 동훈의 대사로 글을 시작해 본다. '당신은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어디에서 태어나고 싶은가?'


다들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지금 그대로의 모습과 환경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자는 '내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아모르파티(Amor Fati , 운명애)를 철저하게 실천하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과 누리는 것에 대한 감사나 만족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만 바라보며 달려간다. 그건 아마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 환경과 시스템 속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쉽지 않다.


"What do you want to be next life?"

(다음 생에 뭘로 태어나고 싶어?)

"I don't want to live again. I just want to be disappear forever. That's being forever."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 영원히 사라지고 싶어, 그것이 영원하게 되는 거야)


나는 인도 친구가 한 명 있다. 호주에서 목수일을 하다가 알게 된 친구인데, 처음에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동갑이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때문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호주 인테리어 회사에서 일하면서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항상 머리에 하얀 터번을 두르고 다니는 친구였는데 (시크교: Sikhism, ਸਿੱਖੀ)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물어보니 태어나서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털이 그 천 안에 둘둘 말려있다고 했다. 그와 한 번은 시드니 외곽으로 출장을 가는 길에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했더니 그가 한 대답이 지금 갑자기 떠올랐다.


나는 그때 다시 태어나면 돈 많은 집 아들 아니면 절세미인으로 태어나서 부와 명예와 인기를 한 몸에 누리는 삶을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 말을 했고 나 또한 그에게서 그런 비슷한 류의 대답을 기대했지만 그의 대답은 너무도 의외였다. 그 대답의 의미가 지금 다시금 상기되는 것은 최근에 읽은 책들과 드라마 그리고 나의 삶 속에서 크게 와닿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왜 다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일까?


"너는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네 생애의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일들이 네게 또 다시 일어날 것이다."

                                                   - 책 속 인용문 -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악령의 입을 빌려서 이와 같이 말한다. 이 문장이 니체 하면 떠오르는 '영원회귀' 사상을 한 문장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내가 왜 니체의 사상에 매료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니체 관련 서적들과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삶은 처절했지만 그는 인간의 모순적인 삶을 정말 잘 꽤 뚫어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죽은 지 1세기(100년)가 훌쩍 지난 지금 그의 철학은 사람들로부터 재평가되며 다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운명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쓸쓸히 죽어간 그였지만 그는 죽고 난 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져가고 있다.


시대를 넘어서는 생각은 그 시대에 외면받고 핍박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대를 앞서가는 자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또 그 고독이 그들의 철학과 사상을 완성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한 꼬마목사


니체는 기독교의 적으로 여기는 자들이 적지 않다. 나도 교회에 몸 담고 있다 보니 기독교가 바라보는 니체의 사상과 철학은 그들에게 달가울 리 없다. 하지만 니체를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니체가 왜 '신은 죽었다'는 말을 남겼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것을 신이 죽었다의 표면적인 뜻으로 이해하면 니체를 제대로 아는 자가 아니다. 니체의 저서들의 대부분 그렇지만 좀 많이 어렵다. 그가 신이 죽었다고 한 것은 인간들이 신의 존재를 죽여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니체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사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기독교적인 신앙 속에서 살아온 자이다. 그의 어렸을 때 별명이 '꼬마 목사'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기독교 사상과 교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가 기독교가 만들어내고 있는 시스템과 관념화에 지쳐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인간들이 규범화하고 관념화시키는 기독교 체계가 과연 예수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이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개신교)에서 신약의 상당 부분을 기록한 사도 바울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건 그가 예수의 인성보다 신성의 관념화와 체계화에 가장 힘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니체는 그의 행적이 예수를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발상이다. 기독교의 부흥에 힘쓴 자의 이면을 들여다 봤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

                                     - [고린도후서] 3:6 -


의아한 사실은 바울이 복음 알리기 위해 수많은 서신(편지)을 썼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이 편지가 경전에 못박히게 될 거라 생각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바울 자신도 문자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울이 예수를 알리려 그토록 노력한 것들이 니체가 바라보기엔 예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둘 다 예수를 사랑했지만 둘은 완전히 다른 생각으로 예수를 바라봤던 것이다. 바울은 빛 봤고 니체는 빛이 만든 그림자를 봤다.


나는 기록하는 자이다. 그래서 바울과 니체 양쪽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전에 내가 썼던 에세이[이성과 신앙사이]에서 언급했듯이 기록이란 변형과 화석화(고정)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록은 중요하지만 또한 이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염려해야 한다. 과거 예수를 비롯한 모든 성인(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들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입으로 묻고 답하는 방식의 토론(문답)형태로 진리를 설파했다. 하지만 후세의 인간들은 모두 그것들을 기록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을 눈에 보이는(기록) 존재라 관념화시키며 종교화 시켰다. 니체는 이점을 우려했던 것이다.

니체와 바울

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사상을 빠르게 널리 퍼뜨리는 데에 집중했다. 그 당시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서신으로 전파하는 것이었다. 기록된 서신은 돌고 돌며 베끼고 카피되어 퍼져나갈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은 신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크다. 그는 끊임없이 기록하는 자였다. 그것이 신약교회의 성립에 아주 큰 공헌을 했다. 그렇기에 예수와 동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그에게 사도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바울은 현실적이고 효과적으로 예수를 알리고자 했고 니체는 그 과정이 진정한 예수가 사라질 수 있음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파격적이고 상징적인 한 마디 문장으로 인간들이 예수(신)를 사라지게 하고 있음을 알리려 한 것이었다.


모순 속 진리


바울과 니체의 관계 또한 모순이다. 의도한 바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가는 것도 모순이다. 실제로 기독교는 예수 사후 수많은 세월 변형을 거듭하며 수많은 개혁과 분리의 과정으로 거쳤다. 쪼개지고 또 쪼개졌다. 이제는 뭐가 맞는 건지도 헷갈리게 되어 버렸다. 다들 지들이 맞고 더 우월한 기독교라 생각한다. 과연 예수가 살아서 이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난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세상일이 의도한 데로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사도 바울도 존경한다. 그의 예수를 향한 사랑은 그 누구보다 컸지만 그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 그가 예상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까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미친 듯이 사랑하면 정말 예상치 못한 미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과거 내가 미친듯이 사랑한 사람이 나를 미친놈으로 봤듯이... 바울도 지금 세상의 모습과 교회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어라? 난 이걸 생각한 게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지?"


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록의 모순이 가져온 결과를 보고 탄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한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또한 이렇게 예수의 존재가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하진 않은가? 기록하면 널리 많은 이가 알게 되지만 본질이 훼손되고 변형되거나 혹은 변화하지 못하고 화석화되는 두 가지의 과정을 피해 가지 못한다.


변형(교리)과 변이(바이러스)


마치 바이러스와도 같다. 처음 탄생한 바이러스는 퍼져가며 변이를 거듭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얼마 전 우리가 경험했던 코로나19 또한 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면 계속 변이를 일으키며 나중에는 원형과는 완전히 다른 바이러스로 형태를 바꾸었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백신을 개발해야 했다. 변이를 쫓아 변해가는 백신, 그리고 결국엔 그 수많은 변이 과정을 거치며 이제는 인간들 몸속에서 인간들과 존속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이러스가 생존하는 방식이다. 숙주를 죽이지 않으면서 자신도 영원히 존속해 가는 방식, 그렇게 바이러스는 형태를 변형하며 치사율을 낮추며 사람들 속에 퍼져가나 가며 그들에게 수시로 나타나 아프게 한다.

바이러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아마도 이걸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모습은 계속 변형되지만 그 본질은 비슷한 형태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지만 우리의 삶의 모습은 계속적인 반복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이 이 뜻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변화하려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나아가며 자신이 변화되고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생각하지만 사실 이건 크기와 형태, 즉 겉에 드러나는 현상에 차이만 있을 뿐 그 본질은 바뀌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아픈 짝사랑을 경험했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고 다짐한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다시금 그런 짝사랑의 굴레 속에 빠져들게 한다. 과거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지켜보며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어느 순간 그들과 닮아있음에 놀라곤 하지 않는가. 도돌이표 같은 인생을 산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STOP이다. 여기서 반복되는 운명의 고리를 끊어내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살지 않고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영생이다.


이건 내가 사라지고 나를 구성하는 고유의 원자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의식이 사라진 영생이다. 이전에 적은 서평에서 이것을 설명한 적이 있다. 우리 모두는 단지 원자들의 조합이며 이 조합이 우리의 형태와 색깔과 모습을 만든다고... 하지만 원자들은 모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형태와 색깔과 모습을 지니지 않으며 영생한다. 다시 살지 않는 것이 바로 영생하는 것이다.


[나의 아저씨]의 대사와 인도 친구의 대답 그리고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서로 연결되며 그 속에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있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의 삶이 힘들고 괴로운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은가? 다른 삶은 결코 오지 않는다. 지금 삶이 후회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감사하고 만족하고 가진 것과 주변의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왜냐 이 삶은 계속 반복될 것이기에...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Amor Fati ,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의 진정한 의미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럼 당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고통도 번뇌도 없는 상태(원자)로 영생할 것이다.


[알프스에서 만난 차라투스트라 - 니체] in 별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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