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백색 해변을 따라 내려갔다.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육체적 사랑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배운 곳이었다. 어리고 경험 없는, 수도원 같은 집에서 자란 나는 또래 친구들에게야 아무것도 아닐, 그전까지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눈빛의 신비로운 마력을,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키스의 중독성을 알게 됐다.
- 뭉크의 노트 (MM T 2704, 1903~1908)
한 사람의 예술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봐야 한다. 왜냐 예술은 삶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동떨어진 예술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서 그 예술을 바라보면 깊은 이해와 공감이 밀려든다.
에드바르 뭉크(1863~1944), 노르웨이의 대표 화가이자 그 나라에서는 거의 위인 수준의 대접을 받는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 [절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의 실제 제목은 "비명" (영문명 : The Scream of Nature)"에 가깝다. 참 번역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달라진다.
뭉크 [절규 : The Scream] 어쨌든 그는 [절규] 이외에 수많은 다작을 한 예술가 중에 하나이다. 재밌는 사실은 그는 글쓰기에 재주가 있었다. 그는 수많은 그림 작품 이외에도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자신의 첫사랑을 모티브로 한 로맨스 소설까지 썼다. 그의 기록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그는 분명 기록을 남기고 그 기록을 더듬으며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기록들이 아주 문학적이며 시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기록을 읽으면 상상을 하게 된다. 그 상상이 아마도 그의 창작 활동의 촉진제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 역시 삶의 아주 사적인 부분까지 드러내는 글을 썼다"
- 책 속 인용문 -
뭉크는 아주 엄격하고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의 억압 속에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의 마찰로 힘들어했다. 그러다 그는 인생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멘토를 만나게 된다.
한스 예게르, 노르웨이의 사상가이자 작가(소설가)인 그의 영향으로 뭉크 또한 항상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뭉크는 그 수많은 기록들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고 그 기록이 없었다면 그 많은 회화 작품(유화 1,100점, 판화 18,000점, 드로잉+수채화 4,500점)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삶은 글과 그림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예술 창작의 기폭제가 된 것이 한스 예게르였다면 그의 작품 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여자들이 아니었을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의 인생에는 세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뭉크의 작품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뭉크의 대표작인 [절규]만을 기억하지만 사실 뭉크는 여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많이 표현하였다.
순수한 사랑 (밀리)
남자는 보통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아간다. 첫사랑은 남자에게 아주 강렬한 기억을 남긴다. 왜 그럴까 그건 순수했기 때문이다. 순백의 종이 위에 칠해진 그림은 너무도 선명하게 남겨지는 법이다. 만약 그 첫사랑이 육체적 사랑까지 함께 했다면 그 기억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뭉크 또한 그랬다. 그런데 하필 그는 연상의 유부녀와 첫사랑에 빠졌다. 이뤄질 수 없는 인연이었음을 예감했지만 거쳐가야만 했던 운명이었다. 모태솔로가 아니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순수한 사랑의 과정을 거쳐간다. 그리고 그 사랑이 오래도록 무의식에 남아 이후의 이성과의 사랑에 영향을 미친다. 뭉크는 밀리와의 순수한 사랑을 떠올리며 수많은 회화 작품과 일기 그리고 그녀와 자신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로맨스 소설까지 남겼다. 그의 기억 속에 밀리는 하얗고 순수한 선망의 대상으로 기억된다. 서두에 시작한 그의 기록이 그가 밀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뭉크 [키스] 관능적 사랑 (다그니 율)
뭉크는 밀리와 이별 후, 자신이 속한 예술가(검은 새끼 돼지) 그룹에 새 멤버로 들어온 율을 만나게 된다. 음악과 미술의 만남이다. 율은 음악을 하는 여성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한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매너 그리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그룹 내에서 남자들의 흠모의 대상이 된다. 뭉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룹 내 뮤즈이자 팜파탈의 여성이었다. 뭉크는 그녀를 모티브로 한 벌거벗은 여성의 그림을 많이 남겼다. 관능적인 여자의 나체를 향해 뻗은 수많은 남성들의 손길은 당시 자신이 속해 있던 그룹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뭉크 [손들] [마돈나]는 그가 율을 바라보며 여성의 관능미와 그 속에 숨겨진 본질을 꿰뚫어 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여자가 섹스를 통해 도달하는 황홀경이 생과 사의 연결고리를 창조하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성인(가임기)이 된 여성은 이제 점차 노화가 시작되며 죽음으로 향해간다. 하지만 섹스를 통해 죽어가는 몸속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신성한 과정을 황홀경(오르가슴)으로 경험하게 된다. 뭉크는 그런 여성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죽음(노화)과 생명(잉태)의 모습을 마치 성모마리아의 형상처럼 묘사했다. 여자의 머리 뒤로 비치는 아우라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율은 그룹 내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 속에서 결국 한 남자(프시비셰프스키)와 결혼을 하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음악가이자 예술적 재능과 관능미를 갖춘 그녀는 결혼 이후에도 외도와 치정문제에 엮이어 결국 그녀에게 손길을 뻗던 한 남성에게 살해당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서른셋이었다.
비극적 사랑 (톨라 라르센)
툴라, 그녀는 뭉크의 마지막 사랑이자 비극의 사랑이었던 여자이다. 그녀는 뭉크의 미술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상류층의 신여성이었다. 둘의 관계는 이전의 여자들과의 관계와는 달랐다. 그녀가 먼저 뭉크에게 빠져들었고 점차 헌신적이고 집착적인 사랑으로 빠져들었다. 뭉크는 그런 그녀를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다. 마치 쫓고 쫓기는 연인관계라고 해야 할까 여자가 다가가면 남자는 한발 물러나는 그런 관계를 이어간다. 연상이었던 그녀는 점점 불안해하며 뭉크에게 결혼을 재촉한다. 뭉크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약혼을 하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뭉크가 작품활동에 집중해야 한다는 핑계로 계속 그녀와 만남을 회피하자 그녀는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다.
뭉크 [삶의 춤] 뭉크는 톨라와 한창 교제 중일때 [삶의 춤]을 그렸다. 그림은 여자의 사랑에 대한 태도를 춤으로 묘사했다. 춤은 짝이 함께 호흡을 맞추며 완성해 가는 행위예술이다. 여기서 춤은 사랑을 표현하고 하얗고 순수한 어린 여성은 이 사랑을 적극적으로 갈망하며 무대 중앙으로 올라가 붉게 타오르며 사랑에 빠지고 다시 무대에서 내려와 까맣게 재가 되어 이제는 사랑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이 되어간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그녀가 그 사랑을 포기하도록 모든 방법을 다 써봤다. 그는 그녀에게 그가 사랑에 빠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내려진 저주, 즉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으로 갖고 태어난 병 말이다. 그래서 그는 결혼해서 가족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신성한 의무감을 느꼈다.
- 뭉크의 노트 (MM T 2734, 1909~1911)
둘 사이의 이런 불화로 인해 총기 오발 사고가 생겼고 뭉크는 중지 손가락이 불구가 되는 상처를 입게 된다. 그 사고 후 둘은 이별하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로 떠나 아홉 살 연하의 다른 예술가(아르네 카블리)와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순탄치 못했고 이혼과 재혼 반복하며 불안정한 삶을 이어간다. 뭉크 또한 툴라와의 이별 후 외롭고 피폐한 삶을 이어간다. 툴라는 뭉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여자였지만 그녀로 인해 그는 창작활동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결국 툴라를 마지막으로 그는 여자의 세 단계를 완성시킨다.
여자의 세 단계
이 그림이 뭉크가 여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남자들이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다. 남자는 설레고 순수한 첫사랑으로 시작해 관능적이고 중독적인 사랑에 빠져들고 그 사랑 뒤에 찾아오는 여자로 인한 상처 대한 두려움을 가지며 살아간다. 그림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순백의 여성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살색의 여성 그리고 마치 퀭한 눈에 사신의 모습을 한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옆에서 피를 흘리며 상처받은 한 남자가 서 있다. 그 남자는 아마도 뭉크 자신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뭉크 [여자의 세 단계] 아직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았기에 이런 뭉크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크게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첫사랑을 기억하면 그때는 그 여자만 떠올랐던 것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마냥 사랑스럽고 마치 신성하고 순결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현실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로시 그 사람만 바라보는 그런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다가오는 사랑은 이전과 같은 감정을 느끼긴 어려웠다. 이제는 이상과 현실이 섞여있는 사랑이다. 그 사람과 사랑만 볼 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아가는 사랑을 원한다. 사랑이 밥 먹여 주지 않지만 또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모순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 다가오는 사랑은 이제 순수함을 잃어버린다. 사랑은 현실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사랑이 고통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 설레고 가슴떨림 후에 다가올 처절한 현실을 알기에 더 이상 쉽게 사랑에 자신을 내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뭉크는 아마도 그림을 통해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 이성과의 사랑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점점 현실적인 사랑으로 변해간다. 사랑은 이상 속에 머물 때 아름다운 법이다. 현실 속에서는 사랑이 지속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이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속물이 되어가며 점점 사랑이 고통이 되어간다.
어쩌면 남자의 삶은 여자와의 사랑을 통해서 순수(이상)와 욕정(모순 : 갈망하지만 통제해야 하는)과 고통(현실)을 배우는 것은 아닐까?
유성혜 [노르웨이에서 만난절규의 화가 - 뭉크]
글짓는 목수 (유튜브 계정)
https://www.youtube.com/watch?v=-4rBPmnBpMA&t=133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