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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목수 Oct 24. 2019

존버만이 살 길인가?

극복과 회피의 삶

"오늘도 존버(존나버티기)하세요"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쓰는 말이다. 나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인가 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리둥절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고서야 그 뜻을 알았다. 요즘에는 알 수 없는 신조어들이 넘쳐나고 계속 생겨난다. 젊은 세대들의 성향을 반영하듯 줄임말은 도를 넘어서 의미 유추가 어려울 정도이다.

   

   버티는 것이 정답일까? 과거 직장 생활을 하던 시기 항상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은 '버티자'였다. 여기서 낙오하면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회사에서도 살아남지 못하는 자가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매달 받는 월급은 나의 버티기 노력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더럽고 억울하고 아니꼬워도 그냥 눈과 귀를 닫고 있으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믿었다. 다음 달 빠져나갈 카드값과 각종 보험료, 자동차 할부금 등을 채워 넣기 위해서 버티고 견뎌야 했던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도 별 수 있겠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문득 의구심이 생겼다. 이렇게 계속 버티는 종착점은 어디인가? 결국 잘 돼봐야 내가 혐오하는 그 팀장의 자리? 더 나아가 부장, 임원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그럼 나도 누군가의 혐오의 대상이 돼야 하는 건가? 존경의 대상은 바라지도 않지만, 그들처럼 비열하고 잔인하게 변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더 많은 급여? 그리고 가족의 생계와 안위?! 내가 나를 희생해서 누군가를 살린다는 고귀한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던가? 내가 예수도 아닌데 그의 삶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나도 살고 타인도 살고 가족도 사는 다 같이 사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왜 누군가는 희생되어야만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는지 세상이 되어가는 걸까?

스카이 캐슬 중에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데..."

                                                                              - [스카이 캐슬] 중에서 -


  우리는 희생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지금 견디고 있는 것인가? 그게 가족이든 애인이든 나중에 받을 보상을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한다. 사랑이 선을 넘으면 집착이 되는 것처럼 상대방이 내가 바라는 데로 되어주길 혹은 내가 살고 싶었던 인생을 대신 살아주길 원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항상 자녀에게 부모가 너를 부양하기 위해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주는 친구가 하나 있다. 그는 아빠도 즐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야! 네가 그러면 아빠가 즐겁지 않찮니, 일주일 동안 힘들게 일하고 온 아빠도 즐거운 시간을 누릴 권리가 있단다. 네가 그렇게 이유 없는 억지를 부리면 내가 화가 나겠지? 내가 너한테 그러면 좋겠니?, 아빠도 네가 한 데로 똑같이 해볼까? 또 그러면 난 너랑 놀지 않을 거다!"


  얼핏 들어보면 '애나 어른이나 똑같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애는 애가 상대해줘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아이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말로 부모가 힘들고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도 똑같이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그런 행동을 제어하게 된다. 아이가 아빠를 달래주곤 한다. 웃긴 상황이지만 아이와 아빠가 동등한 눈높이에서 얘기하니 서로 이해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반면 엄마가 어른스러운 태도로 어르고 달래고 훈계하려고만 드니 아이는 짜증만 내고 엄마를 속이며 종 부리듯 한다. 관계는 악화될 뿐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의 상대방의 세계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인간은 눈높이를 높이는데만 집중하고 낮추는 데는 인색한다. (내가 알 수 없는 타인들의 세계를 모두 경험할 수 없기에 우리는 책을 통해 간접 경험으로 상대방의 생각과 삶을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책 속에는 한 인간의 삶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얘기한 건 가정이라는 공간이 힘들고 괴로운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육아가 힘들고 고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애 잘되자고 부모가 죽어가는 상황은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나중에 그렇게 참고 쌓아왔던 자신의 희생의 대가를 바라는 것이 오히려 아이의 길을 망치게 될 수 있다. 아이에게 일방적인 헌신이 아닌 상호 이해의 관계로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갓난아이나 영아기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아이들이 아닌 어느 정도 인지능력을 갖춘 유아기부터 가능하겠지만...)


"**씨~ 토요일에 뭐해요?"


  과거 직장을 다닐 때 일찍 결혼을 해서 애가 둘 딸린 동갑 유부남이 직원이 있었다.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에 갑자기 물어본다. 왜냐고 되물으니 토요일 같이 영화 보러 가지 않겠냐는 것이다.(남자랑 그것도 직장동료랑?!) 집에서 출근한다고 도망 나와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집에서 애 돌보고 아내의 잔소리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는 것이다. 영화라도 보고 싶은데 혼자 보긴 그렇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회사 경영 상황이 안 좋아 토요일 잔업을 없애버려서 벌어진 상황이다), 또 다른 직장에 있을 때 동기였던 과장은 밤에 퇴근하면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PC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족들이 다 잠든 늦은 밤에 집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숨긴 채 웃는 얼굴로 애들과 놀아주고 아내의 말 상대까지 해 줄 심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갈 곳 잃은 중년의 가장의 보금자리는 거실 소파였다. 어머니는 안방을,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 아버지는 방이 없다. 어쩌다가 가정이라는 공간이 가장에게 가장 불편한 곳이 되어버린 것일까?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버텨야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휴식하고 충전을 한단 말인가?


"그 남자 미친 거 아녜요?"


 이런 얘기를 과거 소개팅 때 여자한테 재미 삼아했더니 반응이 싸늘하다. 물론 회사 때문에 미쳐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말을 직접 듣고 나니 있던 호감도 사라졌다. 남자만 힘든 건 아니겠지만 그런 말을 한다고 나아지는 건 없다. 관계만 악화될 뿐이다. 그 유부남들도 그 사실을 아내에게 들켰다면 똑같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도망치고 숨어 살고 견뎌야만 하는 것이 가장의 길이라면 누가 가고 싶겠는가? 아무리 종족번식의 욕구가 강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너무 잔혹하다면 포기할 수도 있다. 종족번식은 아니더라도 성욕은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남자들이 초식남이 되어가고 결혼을 기피하는 것은 본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비겁하고 남자답지 못한 것이 아니다. 경제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정도도 못하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상대방도 똑같이 되물을 뿐이다. 현상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현상만을 탓하고 비난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으니 변화는 묘연하다.


극복과 회피 (OVERCOME vs AVOID)


  인류는 과연 극복하며 발전하였는가? 추위와 더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견디며 발전해 왔던가? 아니다. 인류는 그런 열악한 환경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극한의 환경은 과학이 발전하고 견딜 수 있는 장비와 시설이 갖추어진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과거 인류의 조상은 열악한 환경을 피해 비옥하고 온화한 땅을 찾고 식량이 풍부한 땅으로 이동하며 퍼져나갔다. 강(4대 문명 발상지)이 있고 녹지와 평야가 있는 곳에 인류의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인류는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을 회피하며 발전한 것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본능은 쾌적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찰을 극복하는 시도보다는 줄이는 과정 속에서 발전해 왔다.


   관계 또한 그 마찰을 줄이는 방향으로 변해간다. 한국이 결혼을 기피하고 이혼이 만연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극복하려기보단 회피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작용한 것이다. 결혼이라는 현실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고난이라면 당연히 피해야 하는 것이다. 인류가 회피해 온 역사처럼 말이다.

긱 경제

   관계의 불편함은 산업 생태계도 바꾸고 있다. 긱(gig) 경제는 그중 하나이다. 여기 호주에도 우버를 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내 주변의 친구, 동생들도 하고 있다. 여기는 다행히 미국이나 한국처럼 택시면허가 없어도 우버가 가능하다. 우버는 긱 경제의 대표 주자로 불편한 상하 조직 관계를 탈피시켜 주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애틋한 보살핌과 부족함 없이 자라온 지금 세대들에게 상하 조직 속의 관계 적응은 가장 어려운 난제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왜 내가 한두 명의 상사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에 의구심을 가진다. 혈액형, 별자리, 상성 조합이 맞지 않는 상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조직 내 상사가 결코 한 인간으로서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저 관련 업무에 관해 자신보다 많이 알고 경험이 더 많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종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젊은이들은 대중의 공정한 평가를 받는 유튜브로 향하지 않았던가? 그곳은 전 세계의 수많은 대중의 평가를 받는다. 적어도 꼰대 상사 하나 잘못 만나 인생 꼬일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관계를 극복하는 방향이 아닌 회피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조장한 것이다?!


   자본가와 권력가들의 통치 수단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공장을 가동해야 그들의 호주머니가 두둑해졌기 때문이다. 노동 시간의 증가는 노동자들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으며 그래서 정치인들은 무지한 시민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알것이다. 과거 진시황은 지식인이 많아지면 사회통합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라님께서 잘 하시겠지"하며 그냥 따라오길 바란다.


  과거 기독교(개신교)가 부흥한 배경에 의구심이 든다. 산업혁명 이전 농경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은 농번기가 끝나면 집에서 가족과 쉬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할 일 없는 겨울은 그들에게 심심한 계절이었다. 겨울철 뜨근한 온돌방 아랫목에 누룩을 만들어 마시며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뭐하겠는가? 겨울만 되면 아기가 생긴다. 겨울의 길고 긴 밤은 부부의 관계의 횟수를 늘려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 호주 시드니에서 외곽으로 3시간 떨어진 교외로 일을 다닌 적이 있었다. 광활한 대지 위에 하우스 지붕 공사를 할 때였다. 임시 거쳐로 슬레이트 차고를 이용하고 있던 호주 집주인 가족 있었는데... 아침에 아이들 등교를 시키기 위해 세워둔 한국의 카니발(9인승) 차량은 임시 거처에서 나온 6명의 아이들 태우고 사라지곤 했다. 고등학생쯤 보이는 큰 애부터 이제 아장아장 걸음마를 뗀 아이까지 엄청난 대가족이다.


 "여긴 밤이 길지 밤 되면 뭐 할 게 있겠니? 애나 만들겠지 하하하" 


  사장 목수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산업혁명(1760~1820)의 도래는 기존의 인간들의 생활 패턴을 바꿔야 놓아야만 했다.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모두 나와서 공장을 돌려야 했다. 밤낮과 계절의 변화도 상관없다.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아간다. 기계 옆에는 인간이 붙어 있어야 한다. 해가지면 집에 가고 밤이 되면 애를 만들고 겨울이 되면 술에 취해 쉬는데 익숙해진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온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개신교)를 번성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전 가톨릭과는 달리 금욕과 절제의 삶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성욕과 식욕(술, 담배, 금식)등의 절제를 통해 노동의 시간을 증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본디 인간이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 저항이 거세다. 그렇지만 그것이 신이라면 상황은 쉽게 바뀔 수 있다. 현재의 기독교 국가(북미, 영국, 북유럽 등)와 가톨릭 국가(스페인, 필리핀, 남미 등)를 비교해 보면 확연히 구분할 수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기독교(개신교)와 더 잘 어울려 보이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인가?

세계 종교 분포도

  한 주간 노동 속에서 지친 인간들은 안식일(일요일) 교회라는 공간에 모여 신의 위로를 받으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 삶의 무게와 노동의 강도가 더해질수록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날이 많아진다. 신앙이 절실해진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긴 하지만 심신이 편안할 땐 신을 찾지 않는 법이다. 곤궁해지고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을 기댈 수 있는 곳은 인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는 신뿐이다. 신은 나의 곤궁함을 알아주고 나의 죄를 감춰주고 내 얘기를 가만히 들어주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공간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민중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물론 결국 나중에 러다이트 운동(Luddite, 1811년) 일어나기 했지만.

러다이트 운동 (1811~1812)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그렇게 이기고 극복하고 견디는 삶을 강조했다. 노동쟁의는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다. 삼성이 왜 그렇게 노조 결성을 저지하는지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삼성이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한 데는 노조가 없다는 것도 큰 몫을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대(자동차, 중공업)의 사측과 노조의 대결구도가 심심치 않게 뉴스에 뜨는 걸 보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이제는 기업도 인간의 회피 본능을 더 이상 저지할 수 없어 보인다. 민중은 이제 너무 똑똑해졌고 정보와 지식은 도처에 넘쳐난다. 숨길 수도 없다. 존버를 강요하던 기업들은 회피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긱 경제가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고용이 아닌 간접고용을 통한 노동자의 저항을 회피하고 노동자도 노동 강요와 압박에서 탈출한다. 플랫폼 노동, 공유차량 서비스 등, 사람들은 플랫폼을 이용한 세포 마켓(인스타, 페북)이나 마케팅 혹은 콘텐츠 제작(유튜브), 운송 서비스(우버)등을 제공하며 노동의 방식을 바꾸어 간다. 직장이 사라지고 돈 주는 사람(고용인)과 비대면의 무마찰 경제가 일상화되어 갈 것이다. 인간은 인간과 부딪치며 발생하는 마찰을 최소화시켜간다. 인간(人間: 인간과 인간 사이)이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극복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회피하며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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